출처 : https://newstapa.org/article/jgo76
[조동(朝東) 100년] ⑨ 전두환 찬양과 유착으로 '고속 성장'
홍주환 2020년 03월 23일 08시 00분
박정희 독재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한 젊은 언론인들을 몰아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1979년 10월 26일 유신독재가 끝나는 순간에도 조선일보는 박정희를 미화하고 찬양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찬탈한 이후, 조선과 동아는 독재자 전두환을 향한 낯부끄러운 찬양 기사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충성의 대상이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광주시민, ‘폭도’·‘극렬분자’로 표현…계엄군 ‘자제’, ‘노고’ 칭찬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조선과 동아일보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와 극렬분자, 난동자, 불순분자로 매도했다.
▲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을 ‘난동자’로 표현했다.
▲ 1980년 5월 26일 동아일보는 계엄군이 광주 시민들을 ‘불순분자’, ‘극렬분자’라고 발표한 것을 그대로 옮겨적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는 사회부장 김대중 씨(현 조선일보 고문)가 광주 현장을 취재했다. 공수부대의 ‘전남도청 학살’ 이틀 전인 5월 25일, 김대중 씨는 현장 르포 기사를 낸다. ‘바리케이드 너머 텅빈 거리엔 불안감만…무정부 상태 광주 1주’라는 제목이었다. 김 씨는 기사에서 광주시민을 ‘총을 든 난동자’로 묘사했다.
▲ 1980년 5월 25일 조선일보에 실린 ‘무정부 상태 광주 1주’ 기사. 광주 시민을 ‘총을 든 난동자’라고 묘사했다.
5월 27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전남도청에 있는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다. 전남도청이 아직 피로 물들어 있던 5월 28일, 조선일보는 이런 사설을 냈다.
조선 사주 방우영...전두환의 ‘국보위’ 참여
1980년 5월 31일 전두환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출범시킨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방우영(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의 삼촌)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한다. 전국지 규모의 언론사 사주로선 유일했다.
▲ 008년 1월 22일 열린 방우영의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악수하는 전두환과 방우영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언론사 사주가 국보위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조선일보가 신군부와 밀착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당시 정당성이 부족했던 쿠데타 정권은 국보위에 언론사 사주를 포함시켜 정당성을 부여받으려고 했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두환 신군부 세력 입장에서 조선일보는 굉장히 고마운 신문사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두환 ‘구국의 지도자’…매년 새해 첫날 1면 전두환 사진 등장
전두환이 대장으로 전역하고 대통령 자리를 꿰찰 무렵, 조선 동아 두 신문은 노골적인 찬양 기사를 냈다. 전두환의 전역식 하루 뒤인 1980년 8월 23일 두 신문이 내놓은 기사다. 각각 ‘인간 전두환’,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상’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 1980년 8월 23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인간 전두환’.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 1980년 8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제목은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상’이다.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다음날, 두 신문은 아래와 같은 전두환 기사로 지면을 채웠다.
이후 두 신문은 새해 첫날 신문 1면에 전두환 또는 전두환 부부·가족 사진을 신년사와 함께 크게 실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있었던 마지막 해인 1987년까지 한해도 빠뜨리지 않았다.
▲ 1981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전두환 가족의 사진과 함께 신년사가 실렸다.
▲ 1982년 1월 1일 동아일보 1면. 전두환 부부 사진을 올렸다.
▲ 1986년 1월 1일 동아일보 1면. 한복을 입은 전두환의 사진을 실었다.
‘민주화 목소리’ 외면…좌경·용공으로 ‘매도’
반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대학생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수백·수천 명이 시위에 나섰지만 두 신문은 보도하지 않거나, ‘1단 기사’로 처리하기 일쑤였다.
또 80년 5월 광주 시민들을 ‘폭도’, ‘난동자’로 매도했듯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대학생들을 ‘좌경’, ‘용공’, ‘불순세력’, ‘폭력세력’으로 몰았다.
조선·동아, 전두환 정권 거치면서 매출액 급등
전두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거대 신문사로 성장했다. 2003년 강준만 교수가 펴낸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편』에 따르면, 1980년 동아일보 매출액은 265억 원이었지만 1988년에는 885억 원으로 증가했다. 조선일보 매출액은 1980년 161억 원에서 1988년에는 914억 원으로 5배 넘게 뛰었다.
방우영 “5공화국과 유착해 소리(小利)를 택한 일은 한푼도 없다”
1988년 언론청문회가 열렸을 때, 전두환 정권과 두 신문의 유착과 특혜를 따져 묻는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당시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특혜 사실을 부인하며 “정부의 일반적인 선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또 방우영 사장은 “본 증인 또 조선일보사는 5공과 유착해서 소리(小利, 작은 이익)를 택한 일이 한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의 개각 발표가 임박하면, 언론사마다 누가 장관이 될지 예측하는 이른바 ‘하마평(下馬評) 기사’를 쏟아낸다. 그런데 80년대 조선일보의 하마평 기사 적중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뭘까?
뉴스타파는 국내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이른바 ‘1등 신문’, 조선일보 급성장의 또 다른 비밀을 다음 편(3월 25일)에서 공개한다.
제작진
취재기자 홍주환 김용진 박중석 조현미
데이터 최윤원
촬영기자 최형석 신영철
편집 정지성 박서영
CG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출판 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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