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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 2] 벽화로 본 고구려…(7)쌍쌍파티
기사입력 2004-03-01 19:23:00 기사수정 2009-10-10 03:10:45

중국 지린성 지안의 장천 1호분 앞 칸 서벽 위쪽 벽화. 남녀의 만남, 여성의 거문고 반주에 맞춰 남자가 춤을 추는 장면이 벽화 위아래에 시간 순으로 펼쳐진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사람들은 노래와 춤, 즉 가무(歌舞)를 즐겼다. 5세기 무용총, 장천 1호분, 마선구 1호분, 통구 12호분 등 특히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고분벽화에는 어김없이 춤 그림이 등장한다. 또 악가무(樂歌舞)가 크게 발달했음이 여러 문헌에 전한다. 당시 중국인도 고구려의 음악과 춤에 대한 인상이 각별했던 모양이다. 당(唐)나라는 고구려 무악의 예술성을 인정해 궁중음악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백성은 가무를 좋아한다. 나라의 마을마다 밤이면 남녀가 서로 무리지어 서로 쫓아 노래하며 희롱한다.(其民喜歌舞 國中邑落 幕夜男女相聚相就歌戱)”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의 10월 대축제인 ‘동맹’에 관한 기사이다. 이처럼 가무는 사냥과 함께 축제의 양대 행사이자 놀이문화였다.

● 무예를 연상시키는 무용총의 직선적 춤

무용총에 그러한 양대 문화가 잘 나타나 있다. 안 칸 왼쪽 벽에는 사냥그림이 배치되고 맞은편 오른쪽 벽에는 춤 그림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의 리더가 무용단을 선도한다. 뒤로는 두루마기 차림의 두 여자 무용수와 바지저고리 차림의 두 남자 무용수가 따른다. 또 반대편에서 한 남자 무용수가 춤 대열로 움직인다. 5명 모두 맨머리의 처녀 총각이다. 이들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7명은 대기조거나 가수로 보인다.

춤추는 형상은 어색한 자세인 데다 화면의 앞에 그려진 팔보다 뒤에 그려진 팔이 더 길다. 동작 묘사가 정확하지 않으나, 내딛는 첫발에 힘이 실려 있다. 양손을 뒤로 바짝 젖혀 긴소매를 늘어뜨리고 잠시 멈춘, 어깨춤 같다. 뒤로 훌친 한삼 형태의 긴 소매가 움직임을 크게 하고, 한발 한발 일렬로 진행하는 단순한 스텝이다. 춤이라기보다, 절도 있고 씩씩한 무예(武藝) 같은 느낌을 준다. 낙천적이고 직선적인 고구려인의 심성과 미의식이 묻어나는 춤이다. 물방울무늬의 춤옷도 역시 흰색과 노란색 바탕의 명랑한 색감이다.

한편 쌍쌍의 군무(群舞) 속에서 청춘남녀는 눈 맞은 이들끼리 자유연애를 하지 않았을까. ‘북사(北史)’에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혼인시킨다’고 했듯이. 고구려 민간에서는 중매혼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그대는 거문고를 뜯고, 나는 춤을 추겠소

그런 남녀의 만남과 춤은 장천 1호분의 축제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 칸 서벽 왼쪽에 이야기를 전개하듯이 상하로 연계된 두 장면이 그것이다. 위에서는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남자는 왼손에 든 연봉오리를 여인에게 올리며 한 곡조 신청하는 자세다. 두 가닥의 애교머리를 내린 여인의 뒤로는 거문고를 세워 든 시녀가 따른다.

뜻이 통한 모양이다. 아래 그림에서 여인의 거문고 연주에 맞춰 남자가 춤을 춘다. 긴 소매의 춤동작은 몸을 앞으로 내세우며 왼팔을 뻗고, 오른팔을 안으로 굽힌 모습이다. 왼팔의 소매는 정지한 상태로 늘어뜨리고, 오른 소매는 금세 펄럭이며 밖으로 뻗는다. 움직임이 느긋하고 정제된 동작이다. 무용총의 군무보다는 춤다운 느낌을 준다. 네 박자의 굿거리장단쯤 될까. 두 사람 사이에는 반쯤 핀 연꽃이 날고 있다.



거문고 반주의 독무(獨舞)는 통구 12호분 남쪽 방에도 나타난다. 또한 마선구 1호분 안 칸 남벽에는 두 사람이 추는 쌍무(雙舞)도 보인다. 고구려의 춤옷은 안악 3호분의 남자 독무를 제외하고는, 모두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소매 자락을 길게 이어 댄 것이다. 손에 아무 것도 들지 않은 긴 소매의 맨손 사위춤이 고구려적 특징이랄 수 있겠다. 고 김숙자 선생의 당찬 살풀이춤을 연상케 한다.

● ‘슬로, 슬로’에서 ‘퀵, 퀵’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에는 고구려 춤을 ‘바람처럼 돌아간다(旋轉如風)’고 묘사했다. 이태백은 ‘널따란 소매 펄럭이는 춤(翩翩舞廣袖)’이라고 읊었다. 이는 7세기 이후의 표현으로 그보다 앞서 조성된 무용총이나 장천 1호분 춤의 묘사라고 볼 수는 없다. 느린 춤에서 빠른 템포로 변한 걸까.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후기 벽화에는 풍속화적인 요소가 사라져 춤 모습을 찾기 어렵다. 다행히도 천장화에 비천이나 신선들이 그려져 있어, 이를 통해 빠른 춤의 형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지안(集安)의 통구 오회분 4호묘의 천장 받침에 보이는, 나무들 사이에서 추는 농신과 불신의 춤동작이 그 좋은 예다.

소머리의 농신(農神)은 두 팔을 벌리고 무릎을 굽힌 채, 노랑색 깃에 분홍색의 화사한 천의(天衣) 자락을 날린다. 그 맞은편 노랑 깃에 진녹색 천의를 걸친 수신(燧神·사람들에게 부싯돌로 불을 일으켜 음식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쳐 준 신)의 동작이 특히 ‘바람처럼 펄럭이는’ 춤답다. 긴 장삼의 왼손은 머리 뒤로 젖히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불을 들고 있다. 뒤로 굽힌 양발은 엉덩이를 차며 팔짝 뛰는 동작이다. 탈춤 같은 투박함이 느껴진다. 속도감에 신명이 실린, 여전히 기세 찬 고구려의 춤사위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 태평성대 장수왕 시절 풍속벽화 부쩍 늘어

태평성세를 이룬 장수왕(재위 413∼491년) 시절,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는 가무 사냥 등을 다룬 생활풍속도가 크게 발전했다. 427년 평양 천도 후 고구려가 안정적으로 광대한 제국을 경영하게 된 것이 그 계기로 보인다.



바지저고리 차림의 묘 주인 초상이 한 인간으로 살았던 그의 다양한 생활 장면으로 바뀐 것이다. 고구려적인 가무를 비롯해 전별도, 손님맞이, 가족나들이, 광대놀이 관람, 사냥, 씨름, 춤 등을 한 폭의 풍속화로 풀어냈다. 또 소재가 풍부해진 만큼 회화적 기량도 크게 진전됐다. 이런 변화는 이 시기 고구려의 번영에 따라 상류층의 삶과 정신이 여유로워진 사회현상을 엿보게 한다. 고구려가 고유의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단단히 다진 결과이다.

그 전 시기인 4∼5세기 초의 초기벽화고분에서는 황해도의 안악3호분(4세기 중엽)이나 평안남도 덕흥리 고분(408년) 등 신격화된 묘 주인의 초상화가 중심을 이뤘다. 이 고분들은 중국적 기물과 복식을 빌려 권위를 실어냈다. 그 후 시기인 6세기 후반 이후의 후기고분들은 사신도를 주로 담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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