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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마장산성

1) 학술조사

1962년 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城博物館 集安考古隊)가 길림사범대학(吉林師範大學), 길림성철학사회과학연구소(吉林城哲學社會科學硏究所), 집안현문물관리소(集安縣文物管理所) 등과 합동으로 집안시(集安市) 전역의 유적을 조사한 뒤, 6월 15일에는 관마장산성(關馬墻山城)을 현급 중점문물보호단위(縣級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하였다. 그 뒤 1963년 5월에 망파령관애(望波嶺關隘)와 함께 관마장산성(關馬墻山城)을 집중적으로 재조사하였다.

2) 위치와 환경

집안시(集安市)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65km 떨어져 있고, 높은 산이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심산협곡심(山峽谷)으로 집안-통화(集安-通化) 도로에서 가장 좁은 요충지이다.

3) 유적의 현황 및 성곽의 구조

관마장산성(關馬墻山城)은 협곡(峽谷) 남북 양쪽의 가장 높은 곳과 목선두구(木銑頭溝) 안쪽 115m 지점에 남벽․북벽․동벽 등을 축조하여 하나의 성보(城堡)를 형성하였다. 성벽은 많이 허물어졌고, 대체로 크기가 일정치 않은 강돌로 쌓았다. 강돌은 조금 다듬었으며, 크기는 대체로 30cm, 50cm 전후이다. 

(1) 북벽 
속칭 두도관마장(頭道關馬墻)으로 불린다. 성벽, 참호, 참호벽 등을 이루어져 있다. 동단(東端)은 위사하(葦沙河)에서 끝나며 강 건너편에는 절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다. 서변은 산기슭까지 직선으로 쌓았는데 잔장(殘長)은 77.6m이고, 서변의 산기슭에는 외벽이 일부 남아 있다. 단면은 보면 돌로 바깥면을 가지런하게 쌓았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약간씩 물리면서 축조하였다. 북벽의 중부는 도로에 의해 절단되어 성벽, 참호, 참호벽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다만 도로 서측 성벽 기초부의 돌이 안팎으로 기다랗게 쌓여 있는데, 너비가 24m나 된다. 

(2) 남벽 
이도관마창(二道關馬墻)으로 불리며 심하게 파괴되었다. 형세는 북벽과 대략 비슷하며, 중부는 도로에 의해 잘렸다. 성문터도 파괴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참호와 참호벽은 본래부터 없다. 잔장(殘長)은 69.7m, 아래폭 7m, 잔고(殘高) 2.1m, 방향은 255도이다. 

(3) 동벽 
이도관마창(二道關馬墻)으로도 불리며, 형태와 구조는 남벽과 동일하다. 북단은 목선두산(木銑頭山)의 산기슭까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목선두구(木銑頭溝)를 지나 약황정자산(撂荒頂子山) 등성이의 암벽까지 직선으로 쌓았다. 전체 길이 125m, 아래폭 6.5~6.9m, 잔고 0.5~0.7m이고, 방향은 310도이다. 성벽 중앙에 폭 4m로 트인 곳이 있는데, 양 옆의 성벽은 안팎으로 뻗어 나가 길이 9.6m, 폭3m인 한쌍의 장방형(長房形) 평대(平臺)를 이루고 있다.

 

관마장산성을 애에워싼 협곡                                      관마장산성 위치도(《吉林省志; 文物志》, 113쪽)

4) 역사적 성격

관마장산성(關馬墻山城)은 성 내부의 지세가 평탄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군대가 주둔하기에 적합하지만, 아직 건물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세 성벽 가운데 남벽의 구조가 가장 간단한 반면, 북벽은 튼튼하게 구축되었을 뿐 아니라 바깥쪽에는 참호와 참호벽이 있다. 

대체로 342년 대전연전시(對前燕戰時) 북도상(北道上)의 요충지로 추정되는데, 서북 7km에 위치한 대천초소(大川哨所)와 함께 위사하(葦沙河)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호형방어선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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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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