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6038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2)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6865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3)
* "5-1이 없고 5-3이 두개라 5-1로 제목을 바꾸었고 부제는 검색 편의를 위해 내용에 따라 붙였습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연재 내용이 섞여 있어 비슷한 내용들끼리 묶어 편집했습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1
고구려의 기원과 건국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5월 31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고구려 제1대 국왕은 부여(扶餘)에서 왔으며, 고구려와 부여는 혈연적으로 연결되었다. 부여는 고구려 주요 족원(族原)의 하나이다.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경 예인(穢人)의 한 무리들이 탁리국(橐離國)을 건립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탁리국 왕자 동명(東明)이 그 내부에 분쟁이 발생하자 일부 무리를 데리고 누루하강(鳥裕爾)유역 남쪽, 송화강과 넌강이 만나는 지점에 부여국(扶餘國)을 건립했다. 
 
부여국의 강역이 대단히 컸다. 현 길림성 농안(農安)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은 도아할강(洮兒河)하류,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 남쪽으로는 휘발하(輝發河)의 북쪽, 그리고 송화강 중하류 사이까지의 영역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부여국은 동이족(東夷族)으로서 가장 큰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은 송료(松遼)평원을 지칭했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에 3개의 부여국이 건립되었다.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와 졸본부여(卒本扶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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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은 고양(高揚)의 후손으로서 성씨를 고씨(高氏)로 사용했다. 고구려의 개국신화는 난생(卵生)을 시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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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들은 혼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고구려민족[고이, 高夷]을 형성시켰다. 역사발전 중 북방의 부여(扶餘), 예족(穢族), 맥족(貊族)과 혼합되어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민족의 원류를 ‘예맥(穢族)족’이라고 부른다. 
 
고조선(古朝鮮)의 조상[先人]들은 양이(良夷)라고 부르며 고구려인들의 조상과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또한 위씨조선(衛氏朝鮮)은 연인(燕人) 위만(衛滿)과 연제(燕齊), 월국(越國)의 망명자들에 의해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國]’의 기원은 ‘민족(民族)’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또한 국가의 기원과 민족의 기원은 엄격한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다. 실질적으로 민족과 국가 기원은 차이가 있다. 각 민족이 모두 국가를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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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중국 한원제 건초2년(漢之帝建昭)에 국가가 설립되었다. 동북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주몽(朱蒙)이 국가를 창립했다. 고구려족은 부여족, 옥저족(沃沮族), 중국 한족(漢族)등을 조합시킨 다민족을 구성했다. 즉, 부여족이 고구려족의 주된 족원(族原)으로 인정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언어[同語]와 같은 민족의 융합은 빠르고 강하다고 보고 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기원 668년에 신라와 중국 당조(唐朝)에 의해 패망되었다. 존속기간은 705년이다. 그 사이의 지배자 국왕(國王)은 28인(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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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를 성씨(姓氏)로 하고 고구려(高句麗)의 명칭에 관해 5가지 설이 있다. 1)고이(高夷)로부터 왔다. 2)고신씨(高帝氏)와 연관 있다. 3)고이인(高夷人)들이 흙을 다진 토양 대지위(土台上)에 나무집(木屋)을 지었다는 뜻에서 왔다. 4)산이 높고 물이 맑음[山高水澈]의 뜻에서 왔다. 5)고탁리국(古橐離國)과 연관이 있다는 등의 상기한 5가지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흥미있는 내용은 고구려의 최초의 왕 주몽은 “나는 태양신의 아들이며, 하백신(河伯神)의 외손자이고, 흘승골성(紇升骨城)에서 왔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천신을 숭배하고 존중했다[尊崇天神, 존숭천신]”며 그것이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고 믿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천인합일’은 ‘임금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君權神授, 군권신수]’라고 주장했다. 
 
실질적으로 국가와 단체가 공고하고 확실하게 하려면 ‘백성이 가장 소중하고, 국가는 그 다음이며, 임금은 더욱 가볍게 봐야 한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는 것으로 보아야 된다고 주장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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