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0188 (고구려의 제례의식(祭禮儀式) 8-2)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1117 (고구려의 제례의식(祭禮儀式) 8-3)
"8-2 일부와 8-3의 비슷한 내용을 한데 묶었고 부제는 검색 편의를 위해 붙였습니다"

고구려의 제례의식(祭禮儀式) 8-2
고구려의 외래신앙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9월 13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불교(佛敎)는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로 보고 있다. 불교는 기원전 6~5세기 사이에 인도에서 탄생되었다. 불교의 기초이론은 ‘신은 사라지지 않는다[神不滅]’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체가 사망하더라도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며, 생사(生死), 윤회(輪回)와 인과응보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행위는 선한 보답을 받으며, 악한 행위는 악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의 고통을 받지만 착한(선한)업적을 쌓아야 내세(來世)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는 정신상 사람들을 노동도구로 생각시키고, 인간들의 안정을 마비시키는 정신적 아편으로 취급되어 왔다. 

...

고구려 불교는 기원 372년에 전진(前秦)에서 전입되었다.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중 아도(阿道)를 고구려에 파견시켜 불교활동을 시켰다. 375년에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등 2곳의 사찰을 건립시켰다. 이것이 중국 동북지구에서 ‘불법의시(佛法之始)’가 시작되었다. 

소수림왕의 아우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재임 9년(기원 392년)에 숭불법령(崇佛法令)을 선포해 고구려 모든 사람들이 ‘숭신불법구법(崇信佛法求福)’하도록 선포했다. 고국양왕의 아들 광개토왕이 집정 2년(기원 393년)이 될 때 평양에 9곳의 사원(寺院)을 건립했다. 이에 의해 불교는 고구려의 ‘찰실적기초(紮室的基礎)’가 되었으며, 동시에 동북지구 불교 사상(史上)의 새로운 이정표[里程碑]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원(中原)의 선진문화가 고구려에 전입되고,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고구려 후기에 도교(道敎)가 중원(中原)으로부터 전입되었다. 기원 624년~625년 사이에 고구려는 중국 당(唐)나라에 도교를 알릴 수 있는 지도자를 요구했다. 당 고조(唐高組)가 천중상(天蓴象)과 도덕경(道德經)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것이 고구려에 도교가 전파된 제1차 기록이다. 

기원 643년 연개소문은 유(儒)·불(佛)·도(道) 3교(敎)의 진흥정책을 제시했다. 그는 말하기를 “상기한 3교(敎)는 도자기의 정족(鼎足)과 같다. 하나라도 결핍되면 안 된다. 유고는 병행 발전되었지만 도교는 미비하다”라고 했다. 보장왕은 이에 동의해 당나라에 요청해 도사(道士)등을 요구했으며 동시에 ‘도덕경(道德經)’을 받았다. 고구려왕은 불사를 도관으로 만들었다[佛事爲道館]. 그리고 도사를 유사위로 승격시켰다[尊道士坐儒士之上].

도교의 창시자는 노자(老子)이다. 그는 도교를 인정하기를 세계는 하늘 뜻(天意) 또는 신의(神意, 신의 생각)으로 창조와 관리된 것이 아니고 ‘물질의 기[物質的 氣]’로써 만들어지거나 또는 그 규칙에 따라서 ‘도(道)’가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도교는 사물(事物)을 고정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 없이 움직여서 변화되어 대립적(對立的) 변화(變化)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소박한 유물론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유심론(唯心論)에 대한 반대로서 일정한 적극작용을 제시했다. 따라서 신흥귀족들은 보수적 귀적사상을 반대했다. 고구려에 수십년 동안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시기에 음양(陰陽)의 오행(五行)사상이 널리 알려졌다. 세계 최초의 원소는 나무[木]·불[火]·흙[土]·금(金)·물[水] 등 5종의 물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의 기초는 공기(氣)로서, 이기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나누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기(氣)가 미세의 물질 또는 유사한 공기의 물질로 보았다. 음기는 소극적 음기와 어두운 것이며, 양기는 적극적 빛(光明)이라고 보았다. 음기와 양기의 대립으로서 소위 5행(五行)의 오종 물질의 원소(元素)를 탄생시켰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결합되어 만물(萬物)을 탄생시켰다고 보았다. 

중국 한대(漢代) 때 음양오행설은 동중서(董仲舒)라는 대표적 유학자(儒學)에 의해 채택되어 소위 ‘천인감음(天人感應)’의 이론기초가 세워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이와 같은 기록이 기재되어 있다. 기원 10년 여름 6월에 모천(矛川)강에서 한 떼의 검은 개구리와 붉은 색 개구리가 싸우고 있었다. 결과는 검은 색 개구리가 모두 죽었다. 이 현상을 대신(大臣)들이 평가하기를 오행학설(五行學說)에 따르면, 검은 색은 북방(北方)색이며, 곧 북부여(北扶餘)로서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으며 검은 개구리의 죽음을 북부여가 고구려 승리를 파괴하는 도두아[非頭阿]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헌 기록상에 이러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 않다. 따라서 고구려인들은 오행학설 이용해 길흉화복(吉凶禍福)과 승리실패흥망[勝敗興亡]을 해석했다. 오행학설은 고구려 사회에 널리 이용되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