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100800
단군[檀君]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 표준영정 /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개요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간주되고 있으며, 단군신화에 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단군에 관한 내용은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
2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신화
단군에 대해서 설명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이용되는 자료는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충렬왕 7년(1281년)에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로서,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은 설화와 불교 관련 내용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단군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상으로부터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였으며,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신정(神政)을 펼쳤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했고, 환웅이 알려준 방법을 잘 따른 곰은 인간의 여자(웅녀)로 변신하였다. 웅녀가 다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자, 환웅은 웅녀와 혼인하였고, 웅녀는 단군왕검(壇君王儉)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 임금 재위 50년에 평양성에서 조선을 건국하였고, 후에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다. 재위 1500년경에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오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천도하였고, 1908세가 되어 산신이 되었다. 관련사료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신화가 고조선대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단군의 할아버지라 하는 ‘환인’은 산스크리트어의 ‘Sakrodevanam Indrah’라는 말을 한자로 표현한 ‘석제환인(釋帝桓因)’과 같은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불교의 여러 신 중 하나에 해당한다. 그런데 불교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4세기 이후이다. 또 풍백·우사·운사 등은 도교와 관련된 표현인데, 도교 역시 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전해졌다. 따라서 불교 및 도교와 관련된 표현이 사용된 단군신화는 적어도 한반도에 불교와 도교가 유입된 이후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만들어진 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다가 어느 시기에 문자로 정착한다. 그러면서 문자화된 그 시기의 용어와 표현 양식이 신화에 남게 된다. 따라서 후대의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신화 자체가 뒷 시기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군신화에서 하늘신의 아들인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와 세상사를 주관하다가 곰이 변한 여인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고, 단군이 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신화는 신라의 혁거세 신화, 가야의 수로왕 신화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동북아 지역 고대 국가들의 건국 신화 유형 중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단군신화에 내포된 역사적 함의와 신화의 서사구조에 주목하여, 당시의 역사상을 그려보는 것이 단군신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3 단군신화에 대한 이해
단군신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시각은 매우 다양하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최남선은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사실에 주목하여 이들 동물을 대상으로 한 토테미즘의 존재를 강조하였고, 근대의 민족주의 사학자인 신채호는 고조선을 신·불·말조선, 즉 삼조선으로 구성된 역사체임을 전제로 하여 이들의 중심 무대가 요서와 요동 지역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 산둥반도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벽면의 화상석(畵像石)에 나타나 있는 그림과 단군 신화가 연결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이 단군 신화라는 설명도 있으며, 단군신화를 태양신화와 토테미즘이 결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나아가 단군신화 속에서 주술사인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샤머니즘의 종교적 세계를 찾아 볼 수 있고 또한 토테미즘이라는 사회적 요소도 찾아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와는 달리 실질적인 한민족(韓民族)의 형성이라는 측면에 집중하여, 한반도에 먼저 존재하고 있던 고아시아인과, 이주해 온 북몽골인이 동화하거나 교체되는 과정이 단군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는 견해도 있으며, 단군신화는 농경문화가 개시되는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설명들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단군신화가 반영하고 있는 역사상을 보다 치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헌 자료들과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들을 연결하여 단군신화를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4 단군에 관한 기록을 수록한 또 다른 자료들
『삼국유사』 외에 단군신화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또 다른 자료는 『제왕운기(帝王韻紀)』이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인 고려 후기 충렬왕 13년(1287년)에 이승휴(李承休)가 쓴 역사시이다. 그런데 『제왕운기』에 기록된 단군의 모습은 『삼국유사』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일단 단군왕검이 아니라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환웅의 손녀가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웅천왕 곧 단군을 낳았다고 하였다. 또한 고조선의 건국 시기가 요 임금 재위 원년이라고 하였고, 단군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를 낳았으며 신라·고구려·옥저·부여·예·맥 등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은 『제왕운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단군에 관해 기록한 자료가 여러 계통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단군에 관해 기록한 문헌들이 있다. 먼저 『세종실록』에서는 단군의 사당과 제사에 관한 조정의 논의 내용이 실려 있다. 신하 정척(鄭陟)은 단군의 사당과 신위를 옮겨 제사하는 것이 옳다고 아뢰었고, 관련사료 세종은 예조에게 단군과 기자 및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시조의 제사에 관해 논의하여 정할 것을 명하였다. 관련사료 『세종실록지리지』의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조에서는 단군이 제사지내던 곳이라 하여 참성단을 설명하고 있으며, 관련사료 평양부(平壤府) 조에서는 이곳이 원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라고 하면서 단군과 고조선(전조선), 기자조선(후조선) 등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관련사료
또한 조선 전기의 문신인 권근은 태조 5년(139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명나라 황제에게 시문을 지어 바쳤는데, 그 중 한 시에서 단군이 요 임금 원년에 조선의 왕이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천년 이상 왕위를 이어갔다고 서술하였다. 관련사료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도 단군을 한반도 역사의 시작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중종 대에 편찬된 관찬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평안도 강동현 서쪽에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단군의 능이라고 전해진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관련사료
* 맨뒤 관련사료 링크 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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