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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수상교통과 신라의 길 : 일찍부터 바다로 나간 고구려인들"에서 "고구려의 수상교통"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의 수상교통 
자동차생활 2002-10-10
 
고구려의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크게 발달했다.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통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갔다. 한반도 이남의 백제·가야·신라를 점령하는데도 해로를 이용했다. 한편, 신라 제8대왕인 아달라는 대구에서 상주를 거쳐 계립령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했다. 계립령 교통로는 초기에 물물교환과 왕래에 이용되었으나 소지왕 이후부터는 영토를 넓히기 위한 북진의 길이 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영토확장 계기로 열린 바닷길 


광개토왕의 해로 공격도

고구려는 3세기 초까지 국토가 만주내륙의 일부였기 때문에 바다와 인접해 있지 않은데다 강과 하천만 분포되어 있어 배가 발달할 만한 환경이 못되는 해상교통의 불모지였다. 그러나 국토가 급속히 확장되던 3세기 중엽 황해와 동해북부가 국토와 연결되면서부터 해상교통이 개척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해상활동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지’의 오주전에서 볼 수 있다. 233년 3월 양자강 하류의 오 나라가 요서와 요동에 있던 공손씨 세력과 동맹을 맺기 위해 서해를 통해 사신을 보냈으나 공손씨 정권의 배반으로 오 나라 사신일부가 죽음을 당하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들어와 목숨을 건진 후 고구려의 도움으로 배를 타고 서해로 귀국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해상교통은 370년 이후 급속히 발달했다. 과거에는 대륙을 통해 중국과 교역을 했지만 국토확장으로 바다와 접하게 되면서 해로를 이용해 중국 남부 여러 나라와 교역하거나 사신이 오갔고, 해상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물자의 대량수송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한반도 이남의 백제·가야·신라를 점령하는데도 해로를 이용하기 시작했고 전성기인 5세기초에는 요동반도 해역인 발해만과 한반도 서해를 거처 제주도에 이르는 해역을 장악, 일본까지 왕래할 수 있었다. 

고구려의 해상교통개척은 수군의 활동도 크게 도왔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인솔해 압록강어구에서 출발, 서해로 남하해 한강으로 들어가 백제를 공격했다. 404년에는 고구려 수군이 역시 압록강 어구에서 해로를 통해 산동반도로 들어가 전연국 지역을 공격했고, 5세기 초에는 함경도 연안에서 동남해로 진출해 왜군을 격퇴했다. 또한 607년에는 서해로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이 같은 수군 활동과 대외 교역, 인접국 사절 파견 등으로 고구려의 항해술과 조선기술은 계속 발달해갔다. 특히 대규모의 수군이 이동하려면 군용선과 무역을 위한 해양선이 절대 필요했다. 

이뿐만 아니라 최대의 국토를 가졌던 5∼7세기의 고구려는 발해만·동해·서해의 큰 바다를 접한 것은 물론 내륙의 유통을 위해 흑룡강·송화강·압록강·두만강·대동강 등 수많은 큰 강들과 호수 등을 이용해 내륙수상교통도 함께 발달했다. 


조선기술과 배의 모양 
 
같은 시대인 신라 배의 유물이나 기록은 다소 발견됐지만 고구려 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중국과 신라 배를 중심으로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고구려는 3세기 이후부터 해상교역·수군활동이 왕성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바다를 다닐 수 있는 큰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땟목배나 강에서 사용하는 나룻배로 대해를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풍성하고 뛰어난 재질의 나무를 써서 중국의 누선(樓船)을 모방, 변형한 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누선은 배의 갑판 위에 방을 세운 것인데, 고려 이후의 배가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데다 우리 민족이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인 성향인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배도 평저선에 돛이 없고 노를 저어 가는 노선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중기의 해양선

해운선은 많은 짐과 사람을 운반하는 큰 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런 큰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십 명의 사람이 수십 개의 노를 저어야 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전쟁에서 잡혀 온 노예나 최하층 계급 서민들이었다. 

내륙의 수많은 강에서는 뗏목 배와 작은 목제 구조선이 이용되었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성의 대동강을 타고 다니던 배는 갈대로 엮은 지붕을 씌운 작은 누선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말기의 돛배

고구려의 조선술은 고구려가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고조선시대부터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동과 산동반도를 해로로 왕래했던 경험과 내륙 수로를 이용했던 경험, 그리고 중국과 해상교역을 하면서 배운 중국배의 제조기술과 항해술 등을 바탕으로 조선술의 발달을 이루어간 듯하다. 이와 관련해 235년에는 2년 전 공손씨 세력에 죽을 뻔했던 오 나라 사신을 구해준 대가로 당대 중국에서 항해술과 조선술이 가장 발달했던 오 나라가 보물을 배로 싣고 와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바치자 그 답례로 동천왕이 수백 필의 말을 주었으나 오 나라의 배가 작아 80필밖에 못 실어 고구려의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338년에는 중국의 후조국이 고구려와 합동으로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전연국을 치기 위해 300척의 배에 300만 두의 곡식을 싣고 와 고구려를 도왔다는 기록도 있어, 고구려가 중국 배의 제조술을 접하고 배울 기회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39년 고구려 장수왕 때 남지나 해역과 접해있던 송나라로 한꺼번에 800필의 말을 해상 운반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큰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기술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고구려가 왕도를 첫 도읍지인 만주 내륙 졸본에서 압록강에 인접한 국내성으로 옮긴 이유중의 하나는 압록강의 수로를 이용해 바다로 진출하고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조공물 등 각종물자를 수로를 이용해 대량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 백제와 가야, 왜군을 치기 위해 고구려 수군이 거의 압록강 어구에서 출발했다는 기록을 보아도 고구려의 조선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국내성과 인접한 압록강변이나 압록강어구 또는 요동반도 끝의 비사성 근방, 후기 도읍지인 평양성의 대동강 어구 등에 조선장이 많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을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어 조선소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고구려의 항구 나루터, 부두시설 등의 유적이 나오고 있어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많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항구와 운하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띄우려면 나루터나 항구 등의 정박시설이 필요하다. 강변에 배를 세우는 곳을 나루, 해변에 큰배를 정박시키는 곳을 항구라 한다. 강 너비가 300보(약 540m)인 압록강과 요하, 대동강, 송화강 등의 강변에는 나루와 나룻배가 많았고, 바닷가에는 큰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가 여러 곳 있었다고 ‘통전’ 중 고구려에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국내성 터 남쪽강변에 배를 매어두는 돌이 발견되었고, 압록강 입구 안동시(중국쪽) 북쪽 강기슭에서도 부두를 만들었던 석축시설이 발견되어 고구려에 항구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 후기에는 평양성에 대동강을 연결하는 운하까지 만들어졌음을 유적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도를 427년 평양으로 옮긴 후 대동강의 수상교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평양 근처에 운하와 갑문까지 만들었다. ‘조선 유적유물도감’에 보면 청암리성(평양) 동문 근처에는 배가 성안으로 드나들도록 작은 운하를 만들었고, 평양외성에서 중심까지 3km의 운하를 팠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평양성기’는 대동강의 조수가 늘면 물이 이 운하로 들어와 노선(갈대 지붕을 씌운 나룻배)들이 물자를 싣고 중성까지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운하는 조공물이나 왕궁에서 필요한 물자를 신속하게 왕궁내 창고까지 운반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양 외성 밖(평천구역)에는 보조 운하까지 만들어졌다. 너비 10m의 축석 운하로, 큰 운하에 배들이 찼을 때 사용하기 위한 비상용이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평양 외성 운하입구인 다경문에는 큰 판석으로 축조한 갑문시설도 있었다. 조수의 간만에 관계없이 운하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해 항상 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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