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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교통 넓은 영토를 발판으로 수레·도로 발달
2002-09-11 자동차생활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고구려는 다양한 종류의 수레를 만들어 폭넓게 활용한 나라였다. 도로는 수레의 운반과 교역을 위해 자연스레 발달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는 64개의 성과 1천400개의 촌락이 있을 만큼 영토가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성을 중심으로 각 성과 촌락을 통치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대의 도로망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먼 거리는 쉬어 갈 수 있도록 역참제도를 만들어 시행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고구려의 건국과 경제상황 

첫 국가인 고조선 이후 자전거, 인력거, 객마차 등 신식 탈것과 기차, 자동차, 동력선, 비행기 등 자동 탈것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시대 후반까지, 육상 수송의 주 수단인 수레를 가장 많이 그리고 다양한 종류로 만들어 쓴 나라는 고구려였다. 그 뒤 나라가 압록강 이남으로 축소되었던 고려시대부터는 수레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여진, 원나라, 일본 등의 외침을 막기 위해 도로를 방치하는 바람에 수레 왕래용 교통로가 폐쇄된 것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또 수레를 끄는 소·말 등을 종주국인 중국(수·당·원)에 조공물로 많이 빼앗겼고, 수공업 기술자의 천대, 문관우대 정책 등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없어 수레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던 것도 원인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12세기경 만주의 요하(遼河) 서쪽에 건국한 고조선 제후국들 중 한 작은 나라였다. 그 후 기원전 1세기경 위만과 중국 서한(西漢)의 황제인 무제가 침략하자 고구려족 일부가 요하 동쪽으로 이동했고, BC 37년에 부여족 출신인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졸본에 도읍해 비로소 독립국가인 고구려를 건국했다. 이후 고구려는 급속히 세력을 키워 5세기 초 광개토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았고 만주 전역과 대동강 이북에 이르는 최대 영토를 갖게 되었다. 

산과 골짜기가 많고 평야가 적은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구려 국민들은 어느 주변국가보다 강인하고 근검했다. 그 결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흡수, 5세기에는 최대의 영토를 갖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는 풍부한 철광산지를 이용해 철제 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경지 개간에 힘써 농업과 목축을 발달시켰고, 비옥한 농토와 울창한 산림, 수많은 강과 하천, 풍부한 지하자원 덕에 일찍부터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농목업이 발달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동북쪽인 함경도와 황해도 북쪽 요동반도 연안 등의 긴 해안선과 함께 내륙에 큰 강, 하천, 호수들이 많아 수산업도 발달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옥저’ 전에는 이 같이 긴 해안선을 낀 바다에서 나는 소금과 물고기를 천리길이나 되는 수도 국내성(압록강 상류)까지 배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구려는 요동지방과 백두산·두만강 일대에 있는 철광산지에서 철·금·은·동을 생산했기 때문에 철제 수공업이 어느 나라보다 일찍 발달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질 좋은 강철을 제조하는 기술이 발전해 망치·도끼·톱·자귀·끌 등의 공구와 가래·괭이·호미·보습·삽·낫·쇠스랑 등의 철제농기구를 일찍부터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켰다. 또한 철제 공구로 수레와 배를 많이 만들어 사용해 경제가 일찍부터 발달할 수 있었다. 한반도 북부지역인 황해도·압록강 이남지역에 산재한 고구려무덤에서 수레용 철제 부품들이 많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철제공구의 발달로 수레 제작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레를 중심으로 한 육상교통문화 

고구려가 육상교통에 수레를 많이 사용한 것은 여러 무덤의 벽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건국사인 ‘동명왕편’을 보면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적혀 있다. 신화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수레는 일찍부터 왕과 귀족들의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수레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굴대통 등 철제 수레 부품들이 무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고구려 고분 95기 중에서 18기의 무덤 속 벽화에서 40대의 수레와 4개의 수레바퀴, 그리고 수레관련 그림 등이 발견되어 수레를 이용한 고구려인들의 생활상과 수레의 종류·특징·신분별 구분 등을 추정해볼 수 있었다. 이런 수레의 그림들은 357년에서 6세기말까지의 고분벽화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고구려에서 수레를 사용한 기록은 여러 역사책에 남아 있다. 그 중 중국 당나라 사기인 ‘구당서 본기’ 제5권에는 669년 5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이긴 당나라군대가 고구려인 2만8천200명을 데려갈 때 수레 1천80대, 소 3천300두, 말 2천900필을 함께 가져갔다고 적혀 있다. 고구려 후기에도 수레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수레의 구분과 신분별 특징 

고구려에서 수레는 대개 귀족들의 전용교통수단으로 이용된 것 같다. 따라서 신분별로 수레의 모양이 구분되었고 이에 따른 수레의 치장도 차별화했음을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수레는 크게 남성용, 여성용, 화물운반용의 3가지로 나뉜다. 남성용수레는 주로 왕과 귀족이 탔고 가마방(지붕 달린 차체)이 없는 개방형으로 햇빛과 비, 눈을 막을 수 있는 큰 차양이 달렸다. 신분에 따라 수레의 크기, 치장, 의자모양, 색깔이 달랐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크고 화려했다. 


왕과 귀족의 수레 그림


귀족 내외의 수레 행차


귀족의 수레 차고


수레를 타고 외출하는 귀부인

여성용 수레는 왕과 귀족들의 처나 첩이 타는 수레로서 대개 가마방이 설치되어 있고 남성용보다 크기가 작았다. 여성용 수레도 남편의 신분에 따라 차양의 유무와 수레의 크기가 달랐다. 이 외에도 여성용으로 가마방이 없는 아치형 개방수레가 있는데 사람이 끄는 형태였다. 

짐수레는 소·중·대형 3가지 크기로 제작되었고 가마방이 설치된 대형수레는 주로 장거리 화물 운반이나 상업, 외국과의 교역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고려 때부터 널리 사용한 가마도 고구려에서는 수레와 함께 사용했다. 벽화에 그려진 가마는 귀족의 도성 내 외출용으로 네 사람이 허리높이로 들고 가는 형태다. 

그밖의 수레 종류와 용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해 가던 초기, 군사훈련과 확장한 영토의 통치, 확인을 위해 왕은 전국을 순시하며 수레를 타고 돌아다녔다. 이때의 수레는 장거리 여행에 편안하도록 크고 사치스럽게 만들어진 최고급품이었다. 왕의 긴 행차가 그려진 벽화를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 같은 용도 외에 수레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전투 때 사용했던 것도 여러 사기(史記)에서 엿볼 수 있다. 바로 쇠 화살 수레인 차노(車弩), 큰 쇠뭉치를 수레에 달아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적의 성벽을 넘기 위해 접이식 긴 사다리와 높은 곽을 설치한 운제(雲梯), 돌 투석기를 설치한 포차(抛車)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수레무기는 원래 수나라와 전투 때 수나라 군대가 쓴 것이었는데, 그 중 고구려에서 포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수레기술이 발달한 고구려가 수나라의 여러 가지 수레무기를 본따 만들어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수레무기 중 중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전투에 쓰였던 전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산악지대가 많아 전차가 기마병보다 능률이 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전투는 평지나 도로보다 산간지대에서 많이 벌어졌다. 이런 지형에서 전차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구려는 전차대신 기동성이 민활하고 전투능률을 올릴 수 있는 기마병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고분벽화에 전차는 보이지 않고 철제갑옷을 말에 입힌 중무장 기마병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수레를 끄는 동력 

중국에서는 대개 속도가 빠른 말이 수레를 끌었고 말을 모는 마부나 주인이 수레에 함께 타고 다녔지만 고구려에서는 속도가 느린 소가 수레를 끌고 소를 모는 하인은 소와 함께 걸어 다녔다. 이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속도를 내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느긋하게 수레 타기를 즐겼던 것 같다. 또한 수레가 특정계급의 전유물임을 과시하기 위해 소를 모는 하층계급과 동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말은 주로 전투와 사냥 등에 사용한 듯하다. 

고구려 사람들이 수레를 널리 쓸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소와 말을 많이 키웠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건국 이전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힘을 쏟아 소와 말 등 가축을 많이 사육했다. 특히 고구려 북쪽지역인 옛날 부여국은 명마산지로 유명해 중국도 탐내던 말을 많이 키웠고 정복한 국가로부터 소·말·양 등 가축을 많이 탈취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유목민인 비려국을 정복하고 수많은 소와 말을 빼앗아 왔고, 479년에는 우량마의 산지로 유명한 지두우(부여)를 정복하고 말을 공급하도록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439년에는 800필의 말을 송나라로 수출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구려에 말과 소가 많았다는 사실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645년 안시성 전투 때 15만 명의 고구려군이 사용한 말과 소는 각각 5만 마리라 했고, 667년 설하수(청천강)전투 때도 고구려군 5만 명이 전장에서 말과 소를 각 3만 마리나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수레를 끄는 말과 소가 고구려에 많았던 것은 일찍부터 농업과 더불어 목축을 장려한 이유도 있지만, 5세기 들어 아세아 최강국이 되어 더 이상 말이나 소를 조공물로 바칠 강대국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레 제작기술의 발전 

위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고구려의 수레는 왕족과 귀족의 전용교통수단으로 발전했다. 즉 수레를 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귀족들은 자연히 수레에 관심을 가졌고 신분별로 수레의 크기, 모양, 치장을 구분하기 위해 다양한 수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레의 제조기술이 발전해갔다. 일반 백성들도 수레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짐수레에 한했다. 서민들의 생업 활동, 물자 운반용으로 짐수레의 사용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철제 바퀴가 달린 짐수레 벽화


제륜신(바퀴의 신)을 묘사한 그림


바퀴놀이를 하는 그림


수레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퀴 만드는 기술이었다. 귀족들이 타는 수레여서 바퀴제조기술자는 국가적으로 보호를 받았다. 고구려에서 목재, 철제품 등 수공업이 발달했던 것은 이 같은 기술자 우대정책에도 힘입었다. 바퀴 제조기술은 상당히 발달했는데 초기에는 나무바퀴를 쓰다가 5세기에 들어와 철제품 수공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쇠태를 입힌 바퀴로 발전했다. 오희 분묘 벽화에 그려진 제륜신이 그 증거다. 대장간에서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제륜신 옆에 바퀴가 놓여 있어, 고구려 중기부터 튼튼한 쇠태 바퀴를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쇠를 불에 벌겋게 달궜다가 물에 집어넣으면 오그라든다는 것을 알고 이 원리를 바퀴 제조에 이용했다. 즉 바퀴 접지면의 폭과 같은 둥근 쇠판을 만들어 불에 달군 다음 만들어 놓은 나무바퀴에 끼우고 즉시 물에 담그면 쇠판이 오그라들면서 튼튼한 바퀴가 만들어진다. 이런 수레바퀴 제조법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수레와 바퀴의 발달은 고구려의 왕성했던 국내외 상업활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요동과 백두산·두만강 유역 또는 옛 부여쪽 영토에 풍부한 철광산지를 가진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 멀리까지 철, 농산물, 직물 등을 수출했다. 특히 무거운 철은 사람이나 소·말이 대량으로 빠르게 장거리 운반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장거리 수송에 가장 적합한 운반도구가 짐수레였다. 

고구려의 짐수레는 쌀 13가마를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컸다. 험한 비포장도로를 따라 머나먼 거리를 오가자면 수레가 튼튼해야 하고 무엇보다 이러한 장거리용 수레에 안성맞춤이 바로 쇠태 바퀴였다. 초기 벽화를 보면 짐수레 바퀴가 나무로 만들어져 바퀴의 두께가 두껍고 크며 바퀴살도 굵고 튼튼했다. 노면의 충격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바퀴가 크면 클수록 무겁고 험한 길을 다니며 잘 부서져 수명이 짧았다. 

고구려는 철기문화시대를 맞았던 중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나무바퀴를 쇠바퀴로 바꾸었다. 고분벽화 속에 나오는 수레바퀴의 대나 살이 모두 가늘고 크다는 것은 철제를 이용한 바퀴로 바뀐 증거다. 

영토의 확장과 도로의 발달 

고구려는 영토를 넓히기 시작하던 3세기 초부터 주변소국들을 흡수해 확장하면서 국토를 주·군·현 등 지방행정단위로 구분하고 이들 지방행정 중심지와 정부가 있는 국내성을 원활히 연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지방행정구역을 국내성에서 빠르게 통치하는 정책적 수단이기도 하지만 유사시 군대를 신속히 파견하고 복속국들이나 지방에서 바치는 조공물자의 수송뿐만 아니라 국내외 교역을 위한 상품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서도 시급했던 것이다. 또 지방통치, 군사파견, 조공물수송, 교역상품 운반 등에 거의 이용될 만큼 수레가 활발하게 보급된 것도 도로 발달의 요인이다. 

도로 발달의 증거는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시대 많은 성들의 유적에는 성벽 안팎으로 오르내리는 수레 길의 자취가 남아 있다. 길림성(중국) 유하현에 있는 나통산성에는 성벽 안팎에서 소천안(송화강 유역)과 연결하는 큰 수레 길의 자취가, 소천안산성에서 송화강 북쪽의 농경지인 큰 평야를 연결하는 수레 길이, 요령성 철령시에 있는 최진보산성 성벽 안에서는 4∼8m 폭의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무순의 고이산성 성벽 안팎에도 폭 3m의 수레길이 있고 이런 성벽 중심의 수레 길은 한반도의 대관성, 평리고성 등 여러 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도로유적이 발견된 곳이 고구려 말기의 수도였던 장안성(평양성)이다. 장안성은 고구려 최대의 왕도로서 내성·중성·외성·북성 4개 구역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 외성은 4곳의 거주구역으로 구분되어 있고 구역 사이에 소로와 대로가 있었다. 소로(3묘로)의 도로 너비는 3.4m이고, 대로(9묘로)는 너비가 14m나 되는 수레길이다. 또 도로 양쪽 갓길에는 너비 60cm 정도의 하수도까지 만들어져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압록강 상류 중국 지역에 위치했던 수도인 국내성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큰 도로를 만들었는데, 북쪽도로는 평탄하고 천산 산맥을 끼고 있는 남쪽도로는 험했다고 전한다. 

상당히 발전했던 고구려의 토목기술 

고구려의 도로 포장술은 비교적 발달해 대도시 안 거주지역 도로는 잔 자갈이나 깬 돌, 벽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안학궁(평양성) 안 도로, 고이산성 안 도로, 대성산성 앞 도로가 그렇고, 남평양성, 요양(중국)에서는 너비 7m 정도의 포장도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는 각종 수레들과 사람의 왕래를 원활하게 해 상업을 발달시키고, 영토를 넓혀 가는 한편 원활한 통치를 위해 다리를 많이 만들어 도로를 발전시켰다. 413년에는 평양성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기 위해 안학궁성 남쪽 대동강에 평양 주대교를 놓았다. 

평양의 청호동과 휴암동 사이 대동강을 가로질러 놓은 이 다리는 길이 375m에 너비가 9m인 나무판과 돌로 만든 다리로, 쇠못을 쓰지 않고 나무 이음법으로 연결한 다리인데 깔판에 난관까지 갖춘 것으로 1981년에 발견되었다. 

이외에 ‘삼국사기’ 중 신라본기를 보면 668년 당나라의 침입으로 평양성 전투 때 대동강에 사천교와 남교 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고, ‘신중 동국여지 승람’에도 평양성 대동강에 통한교와 연우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광범위한 도로망을 만들었던 고구려는 초기부터 그 관리에 힘썼을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특히 64개의 성과 1천400촌락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넓힌 광개토대왕 때는 국내성을 중심으로 각 성과 촌락들을 통치하고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최대의 도로망을 구축하면서 이들 도로와 수레, 사람들의 통행을 관리하고 먼 거리는 쉬어 갈 수 있도록 역참제도까지 아울러 만들어 시행했을 것이다. 역참이나 우역제도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같은 시대의 신라가 이미 소지왕 9년(487년)에 우역제도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에 비춰 볼 때, 산라보다 경제·도로· 수레교통이 더 발달했던 고구려가 일찍 이런 제도를 만들어 활용했을 것임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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