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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구려의 신라 포위 시도
신라, 고구려-백제-일본 3국 외교망에 갇히다
2011. 01. 26   00:00 입력 | 2013. 01. 05   06:19 수정
 

7세기대 고구려와 백제, 신라, 왜의 위치를 보여주는 동북아시아 상황도. 위키피디아



일본 나라에 있는 호류지의 모습. 호류지의 벽화를 그린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였다. 고구려는 전문인력과 기술 원조를 통해 왜를 신라 포위망에 끌어들였다. 필자 제공
   
618년 9월 고구려 영양왕이 죽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 제국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담대함은 불가사의할 정도다. 그는 일생을 수나라와 끝없는 긴장과 전쟁 속에 보냈고, 결국 승리했다.

그는 사람을 잘 부렸다. 부하를 신임하고 전쟁터에서 전권을 위임했다. 612년 명장 을지문덕이 역사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영양왕의 동생이자 훗날의 영류왕이었던 건무가 대동강 입구에 상륙한 수나라 보급선단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왕은 부하들이 그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그는 국제정세 파악에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고, 해외에 공작원들을 파견해 모든 상황을 고구려에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의 공작 반경은 거대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중국의 하북지방은 물론이고 몽골, 백제, 일본열도에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국익이 된다면 악마하고도 손을 잡는 사람이었다.

한반도 남동부에 영양왕에 맞서는 신라의 군주가 있었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그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신라 진평왕이 접근했다. 수문제도 관심을 표명했다. 594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진평왕을 ‘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했다. 608년에 진평왕은 수에 군사를 청하는 글을 올려 고구려 협공을 자원하고 나왔으며, 611년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단행하려 하자 진평왕도 참전 출사표를 냈다.

신라는 요동에 집중된 고구려의 병력을 남쪽으로 분산시켜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돕고자 했다. 고구려가 국운을 건 세계제국 수와 결전을 앞둔 상황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을 침공한다면 치명적이다. 영양왕은 이런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왜국에 접근했다. 

595년 영양왕은 승려 혜자를 왜국에 파견했다. 혜자는 595년에서 615년까지 20년간 왜국에 머물면서 쇼토쿠(聖德太子)의 스승으로 근시(近侍)했던 이름난 인물이다. 왜가 여섯 번에 걸쳐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한 일도 모두 혜자가 그곳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607년 왜의 사신이 수에 가져온 외교문서는 수양제를 진노하게 했다. 그 첫 문장은 이러했다. ‘해가 뜨는 곳의 천자가 해가 지는 곳의 천자에게.’ 이 외교문서는 고구려 승 혜자가 만든 것이다. 지리상 왜인들이 일본열도를 해가 뜨는 곳이라 보기 힘들다. 그것은 고구려의 위치에서 보았을 때 일본열도는 해가 뜨는 곳이고, 중국은 해가 지는 곳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왜에 승려와 기술자를 보내는 등 경제ㆍ문화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서기’ 추고기 13년(605)을 보면 “고려국의 대흥왕(영양왕)이 천황이 불상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황금 300량을 보내왔다”고 했다. 추고기 18년(610)조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고려왕은 승 담징과 법정을 보냈다. 담징은 오경을 풀이했다. 또 채색이나 종이ㆍ묵을 만들고 또 맷돌을 만들었다. (수력을 이용한) 절구(臼)를 만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은 왜국에 황금 300량을 보냈고, 호류지(法隆寺)에 위대한 작품을 남긴 담징 등의 승려ㆍ기술자ㆍ화가 등을 왜에 파견했다. 고구려의 막대한 원조는 왜국이 규슈에 병력을 집중시켜 신라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력원이었다. 왜국은 596년(추고4)에도 2만5000명의 군대를 규슈 츠쿠시에 파견했다. 600년에 가서는 왜군 1만이 신라의 5개 성을 직접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듬해에 왜국에서 다시 신라 침공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실행준비에 들어갔다. 602년에 병력 2만5000명을 규슈에 집결시켰다. 

규슈에 2만5000명의 왜군이 주둔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신라 병력 중 상당수는 남쪽에 묶였고, 그 군대를 북쪽 고구려와의 국경으로 돌리는 데 제약을 받았다. 고구려는 백제에 접근해 이러한 상황을 알렸다. 양국이 왜가 남쪽에서 신라의 발목을 잡고 있는 사이에 양면공격을 하자고 제안했다. 백제는 긍정적이었다. ‘수서’는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시점이 612년 봄이란 사실을 영양왕에게 알려준 것이 백제였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고구려는 백제와 손을 잡았고, 신라는 양면공격을 끊임없이 받았다. 602년 백제가 먼저 신라를 공격해 줬다. 남원에서 지리산을 넘어가는 길목인 현 운봉면의 아막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신라의 귀산이 여기서 아버지 무은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백제의 아막성 함락은 40년 후 지리산을 넘어 그 운명의 대야성(합천)을 차지하기 위한 첫 단추였다. 신라는 지리산 방어를 강화해야 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603년에 고구려가 신라의 서북방 중요 군사거점인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성은 고구려군에게 포위됐고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진평왕은 무리를 해서 북한산성을 직접 구원하기로 했다. 진평왕이 오자 북한산성의 신라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갔다.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고, 성문을 열고 나올 기세였다. 고구려 장군 고승은 철군 명령을 내렸다. 

608년 2월 영양왕은 다시 신라 침공 명령을 내렸다. 고구려 군대는 신라의 북쪽 변방을 습격해 신라인 8000명을 사로잡아 왔고, 4월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수와의 일대결전을 앞두고 고구려의 병력이 요동에 집중된 611년 백제가 무주 나제통문 부근의 신라 가잠성을 공격해 줬다. 성이 함락되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포로가 됐다. 끝까지 저항하던 현령 찬덕은 홰(槐)나무에 머리를 받아 자살했다. 이로써 소백산맥을 넘는 두 개의 통로를 백제가 장악했다.

612년 수나라군 30만이 전멸하면서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침공은 실패했다. 613년 2차 침공은 수나라 후방에서 일어난 양현감의 반란으로 무산됐고, 3차 침공도 불발됐다. 세계 최강이라 믿었던 수나라의 군대가 고구려군에 대패한 사건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고구려, 백제, 일본 3개국이 신라를 포위하고 있는데, 동맹국 수의 패배는 신라인들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다. 수의 무능이 폭로되고 고구려의 막강함이 드러났다. 진평왕은 의식(儀式)을 통해 백성의 살인적인 중압감을 덜어줘야 했다. 

613년 가을 7월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신라왕경에 도착하자 진평왕은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다. 전국의 고승들이 모여든 사찰 안에는 백 가지의 향내가 진동하고 인왕경 외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백 명의 승려들이 사자좌에 앉아 있었다. 마치 천상의 소리인 듯 범종의 소리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고, 사원의 모든 악기가 일제히 소리를 냈으며, 화려한 휘장이 높이 쳐진 가운데 염불소리가 파도처럼 끊일 줄 모르고 울려 퍼졌다. 

숭불의 소리는 고난 받는 백성의 마음에 희망을 던져 주었을까. 의례는 실제적 작용이 아니라 기대를 갖게 만드는 마법이다. 진평왕은 주술과 의례를 통해 백성을 달래면서 그들을 전쟁에 효과적으로 동원했다. 

하지만 진평왕은 고구려 영양왕이 만들어 놓은 대(對)신라 포위망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했다. 진평왕의 생애는 마지막 나날까지 전쟁에 바쳐졌고, 포위망은 그의 딸 덕만(德曼ㆍ선덕여왕의 이름)에게 대물림됐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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