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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피할 수 없던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 돌궐-거란 영향력에 수나라 `노심초사'
2011. 01. 19   00:00 입력 | 2013. 01. 05   06:18 수정
 

돌궐의 본거지인 몽골 초원에서 말들이 이동하고 있다. 수나라는 돌궐의 군사력을 이용하려 했지만 고구려는 노련한 외교로 수나라의 기도를 막았다. 필자 제공

수양제는 고민에 빠졌다. 고구려 침공을 목전에 둔 609년 그에게 우호적인 동돌궐의 계민칸이 죽었다. 계민칸의 아들 실필칸은 군사 지원 요청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고, 의례적 관계도 거부했다. 수양제는 돌궐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조금만 위협을 가하면 그들이 고구려와 손을 잡을 것 같았다. 

만일 실필칸이 고구려와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수나라의 수도권을 위협하면 치명적이다. 이러한 수양제의 우려에는 이유가 있었다. 598년 아버지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이 실패했다. 수나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요하의 홍수와 황해의 풍랑 때문만이 아니었다. 돌궐이란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수서’ 양소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해 고구려의 책동에 넘어간 돌궐이 수나라의 북쪽을 침공했던 것이다.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던 한왕(漢王) 량(諒)을 비롯해 고경·두언(杜彦) 등 거물급 지휘관들은 초원으로 가서 돌궐과 싸워야 했다. 

유목민들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침공에는 보급이 보급을 낳는 엄청난 농경민 병력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경우 자칫하다가는 병력만 지나치게 많아서 자기 진용 안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일부터 곤란해질 터이고, 바로 이 점이 전장에서 큰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611년 양제의 우려는 현실화돼 가고 있었다. 중국 전국에 걸쳐 강제적인 징집이 단행됐다. 낙양에서 지금의 베이징 부근에 있던 탁군을 연결하는 운하인 영제거(永濟渠)는 오로지 고구려 침공을 위해 그 무렵 준공됐다. 운하에 배가 1000리를 메웠으며, 산더미 같은 물자와 상상치도 못할 병력이 지금 북경 주변인 탁군에 집결됐다. 도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괴로운 행렬 속에서 지쳐 쓰러져 죽는 자가 속출했고, 송장 썩는 냄새가 길거리에 진동했다.

산동과 하남에 큰 홍수가 났고, 저주산(底柱山)이 무너져 황하가 10리나 역류해 30여 개의 군이 수몰됐다. 일손을 잃어버린 농촌은 황폐했고, 관리들은 냉혹하게 백성들을 쥐어짰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조세수탈에 지쳐버렸다. 곡식 값이 폭등했다. 그래도 수나라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하중은 어찌할 수 없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시 수나라 병사들은 요하를 건너기 직전에 100일분의 식량과 갑옷, 무기, 옷감, 야영도구를 지급받았다. 1인당 3석의 무게였다. 식량을 버리면 처형된다는 명령을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병사들은 그것을 모두 가져 갈 수 없었다. 병사들은 장막을 치고 그것을 땅에 묻었다.

노회한 고구려와의 전쟁은 너무나 난관이 많은 위험한 일이었다. 수양제도 이 전쟁을 피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3가지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 고구려가 끊임없이 돌궐에 접근해 이간질을 할 뿐만 아니라 수나라 내부의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수나라 건국 중신들은 고구려가 접근한 계민칸이 수나라에 대해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수양제에게도 적발될 정도로 고구려의 사절과 상단은 초원을 자주 왕래했다. `수서'에 실린 605년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북방 돌궐제국과 지속적인 대규모 교역을 한 증거가 포착된다. 상단은 수만에 이르는 규모였다. 고구려는 돌궐인들이 원하는 곡물 등 생필품을 주고, 말을 포함한 가축을 받았다. 돌궐의 칸들은 고구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계민칸은 자신의 궁정에 수양제가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침 찾아온 고구려 사신을 결코 홀대하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곡물 없이 겨울을 넘기기가 힘들다. 그러니 초원에 곡물을 정기적으로 운반하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증대할 수밖에 없었고, 수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정보는 축적돼 갔다. 

둘째 고구려 기병이 수의 영토를 국지적으로 침공했다. 수나라가 고구려 휘하의 거란ㆍ말갈족을 끊임없이 유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구려의 전마와 기병자원의 원천이라 이탈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터였다. 거란인들의 이동 물결은 584년에서 599년까지 지속됐다. 수는 거란의 추장들에게 대규모 물량공세를 취했다. 돌궐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의 별부 4000여 가와 고구려 휘하에 있던 거란의 출복부(出伏部) 외에 여러 부족도 여기에 동참했다. 

수는 그들에게 영주 북방의 초원을 줬고, 시장을 개설해 자유로운 교역도 허락했다. 거란에 대한 돌궐과 고구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수 왕조의 적들에 대한 대리 공격을 감행할 용병으로 그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수는 말갈족에게도 유혹의 손짓을 했다. 586년에서 600년 사이 돌지계의 8부가 수에 투항했다. 영주의 유성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수나라 휘하의 기병으로 배속됐다. 

하지만 고구려는 수의 포섭 정책에 찬물을 끼얹었다. 598년 고구려 휘하의 말갈 기병 1만이 요하를 넘어 공격을 가했다. ‘수서’를 보면 당시 수양제는 “고구려가 거란의 무리들과 함께 바다의 수나라 경계병들을 죽이고, 말갈을 이끌고 요서를 침범하였다”거나 “말갈을 몰아치고 거란을 완강히 막았다”고 고구려를 비난하고 있다. 

셋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고구려가 옛 북제왕조, 즉 하북 지역 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수나라는 중국 서북 지역에 있던 북주의 후신이다. 북주는 577년 하북지방에 중심을 둔 북제를 무너뜨리고 통일을 달성했다. 고구려와 인접한 북제 사람들은 북주와 그 후신인 수나라에 대한 반감이 컸다.

고구려는 북제 부흥운동의 주동자인 장군 고보령에게 휘하의 말갈과 거란 병력을 제공했다. 577년에서 그 이듬해로 넘어갈 무렵 북주는 고구려의 적대적인 군사원조에 보복을 가했다. ‘삼국사기’ 온달전이 이를 증언한다. “후주(북주)의 무제가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치니 (고구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배산(拜山)들 앞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溫達)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 명을 베니 여러 군사가 승승장구하여 크게 이겼다.” 

북주 무제의 손자 선제에게 왕위를 탈취한 양씨의 수 왕조는 하북지방에 대해 고구려가 끼칠지도 모를 영향력이 두려웠다. 대부분의 고구려 간첩은 그곳에서 암약했고, 정보를 수집해 갔다. 고구려가 쇠뇌(弩) 만드는 기술자를 수나라 태부(太府)에서 빼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수서’ 고려전을 보면 “왕은 (우리 수나라에 대한) 불신감에 젖어 시기하고 의심하여 사신을 보낼 때마다 소식을 밀탐해 갔다”거나 “지난해 몰래 소인에게 뇌물을 주어 그를 움직여 사사로이 쇠뇌 제작자를 그대 나라로 빼갔소” “종종 기마병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유언비어를 지어 냈다”처럼 고구려 평원왕을 비난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612년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넘었다. 수나라의 황제가 직접 모든 것을 결정하는 허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고구려는 그것을 철저히 이용했다. 수나라 군대는 일일이 황제의 허락을 받고 움직였다. 요동성 공격 실패 원인도 그 때문이었다. 고구려군은 매번 불리하면 항복한다고 했고, 수나라군이 그 전갈을 황제에게 전하는 사이에 고구려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저항했다.

그것은 압록강 앞에서도 반복됐다. 수나라의 정예병 30만이 평양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에 집결했다. 그러자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이 직접 찾아와서 항복했다. 이 사실을 요하 부근에 있는 황제에게 전하고, 내린 명령을 압록강까지 가져와야 했다. 고구려의 항복 조건도 일일이 황제에게 보고돼야 했고, 결정을 다시 전달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수나라 병사들의 식량은 고갈돼 갔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 고구려 땅으로 들어갔지만 어떠한 성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뽑아내지 못하고 지나친 수없이 많은 고구려성 안에는 철군하는 그들을 도살할 사냥대가 조직되고 있었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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