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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약장수 무왕
어린 시절 고된 삶 … 서동, 세상에 눈을 뜨다
2011. 06. 01   00:00 입력 | 2013. 01. 05   06:51 수정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이곳에 무왕이 별궁을 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왕의 정비인 사택왕후의 후원으로 조성된 미륵사 옛터의 현재 모습.
 
641년 음력 3월 건조하고 더운 봄 날씨였다. 사비 백제왕궁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무왕(武王)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신음 속에서 왕은 이미 죽은 생모 ‘어머니’를 계속 불러댔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어머니가 꺼져 가는 그의 의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자인 의자(義慈)와 왕후인 사택부인(沙宅夫人)이 옆에 앉아 있었다. 몇 명의 다른 왕후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신음하는 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 뒤로 음산한 방에서 억눌린 울음소리와 경건한 기도소리가 새어 나왔다. 수많은 첩들이 모여 있었다. 

왕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자 모든 이들이 절규했다. 우뢰와 같은 소리는 왕궁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이 왕의 운명을 직감할 만큼 음폭이 깊고 컸다. 소리는 왕통을 계승한 의자왕과 그 어머니 사택부인에게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의 첩들에게는 종말을 고하는 신호였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진 남자라고 해도 어떻게든 왕의 자식을 낳아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는 여자들의 욕망을 붙들어 맬 수 없었다. 백제는 신라와 달리 어떠한 여자가 낳은 왕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후궁에 거주하는 여자들은 애타게 봄을 꿈꾸는 만송이의 꽃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끝없는 기다림의 세월과 영원한 겨울의 잿빛 풍경 속에서 세월과 함께 시들어 갔다. 42년간 왕국을 통치한 왕의 임종은 애첩들 사이의 암투를 영원히 매장시켜 버렸고, 애증이 뒤얽힌 경쟁과 야합을 먼지처럼 날려 버렸다. 

무왕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여러 첩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궁궐에 거처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 꿈을 꾸지도 못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것도 아니었고, 사랑은 더더욱 받지 못했다. 존재감이 없는 잊혀진 여자였다. 아버지의 보살핌이 없이 버려진 채로 자라난 서동(薯童·훗날의 무왕)의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동은 남자가 가진 욕정의 열매였다. 어머니는 궁궐 남쪽 연못가에 살았다.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았고 이미 한번 결혼해 전남편을 여읜 과부였다. 어느 날 어머니는 ‘부여선(夫餘宣)’이라는 왕족을 만났다. 위덕왕의 조카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새로운 삶을 주겠다고 했고 화려한 집과 격상된 신분을 약속했다. 그 순진한 약속을 믿었던 어머니는 아이를 가졌다. 

아버지는 삶의 강가에서 난파됐다. 왕족이 누리는 윤택한 생활과 젊은 여자들의 웃음 속에서 서동과 그 어미는 점점 잊혀져 갔다. 어머니는 망각 속에 침몰된 아버지를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서동을 데리고 떠돌았고 어느 시기 익산에 정착했다. 서동은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몸에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했다. 일찍 철이 든 서동은 산에서 ‘마(薯)’를 채취했다. 그것을 팔아 힘든 삶을 꾸려갔다. 그는 시장에서 장사꾼들을 만났고, 원거리 장사가 더 많은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장해서 그는 시장 사람들과 함께 신라를 드나들며 장사를 했다. 그것은 577년 이후 602년까지 신라와 백제가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 정확히 말해 602년 신라와의 전쟁을 재개해 26년의 평화를 깬 것은 서동(무왕) 그 자신이었다. 

그는 험준한 소백산맥을 넘나들었다. 어머니가 계시는 익산에서 출발해 전주에 도착하면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전주에서 무주의 나제통문을 넘어 성주로 넘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전주에서 남원을 거쳐 운봉을 넘어 함양에 이르는 길이었다. 

무주의 나제통문으로 덕유산을 넘어가는 코스는 험난했다. 하지만 신라 왕경으로 가는 가장 단거리 코스다. 운봉으로 지리산을 넘어가는 코스는 비교적 평탄했다. 굳이 고개라고 못 느낄 정도다. 하지만 소백산맥을 넘어선 현재 함양·거창에서 합천으로 넘어가는 길은 험했다. 함양에서 남강을 따라 진주 방향으로 가는 길은 평탄했다. 대신 신라의 왕경과 멀어진다. 서동은 신라와 백제 변경 지역에 대한 인문지리적 감각을 생업을 통해 체득했다. 

가난하지만 마음은 넉넉했다. 신라에서도 가는 곳마다 베풀었다. 모든 사람에게 다정한 남자였다. 특히 아이들을 좋아했다. 산에서 캔 ‘마’를 선뜻 주기도 하고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놀기도 했다. 낙천적이고 순진한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담대하고 큰 사람이었다. 사고가 유연하며 끝 간 데 없는 배짱이 있었고, ‘오지랖’도 바다와 같이 넓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재기(才器)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무왕은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살면서 인간 삶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목격했다. 결핍은 그에게 지혜를 줬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근성을 남겼다. 치밀한 계획과 꺾이지 않는 투지가 삶의 일부가 됐다. 무엇보다 장사를 하면서 사람의 속성에 대해 간파하게 됐다. 

신라 백성들은 관심이 많은 왕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서동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게 됐고 신라 사회구조에 대해 감지했다. 첩의 아들은 왕족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왕실의 제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고 왕위계승 자격이 없었다. 그들은 ‘진골(眞骨)’이 되지 못했고 6두품의 신분이 됐다고 한다.

신라 왕족들은 모두 내물왕의 후손으로 진정한 뼈 ‘진골’로 불리며, 바로 그 아래 신분으로 6두품이 있다. 하지만 왕족들에 대해 너무 종속적이고 힘이 없었다. 신라에는 ‘진골’ 왕족은 있었지만 귀족이 없다시피했다. 왕족 이외에도 8개의 성씨가 귀족사회를 두텁게 구성하고 있는 백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십대 초 중반 무렵 그는 백제에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위덕왕에게 아들이 없었다. 신라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거나 살아남은 자식도 병사했다. 다음 왕위계승자로서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夫餘季)가 유력했다. 왕의 또 다른 동생 아좌(阿左)가 있었다. 그는 외교상 목적으로 왜국(倭國)에 가 있었다. 본국으로부터 너무나 오래 떨어져 있었고, 나이가 많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그는 백제 궁정 내부의 기반이 없었다.

부여계는 서동의 할아버지였다. 위덕왕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형과 나이가 비슷한 고령이었다. 그러니 부여계의 큰아들 부여선 또한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부여선의 여러 아들들 또한 주목받게 됐다. 

백제 최대 귀족 집안인 사택씨가 익산 시골에서 서동을 찾아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동이 거주하던 익산 지역은 사택씨의 거대한 농장이 있는 영지(領地)였다. 사택적덕(沙宅積德)은 농장 관리인들을 통해 서동의 비범함에 대해 알게 됐다. ‘삼국사기’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름이 장이고 법왕(부여선)의 아들이다.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했다.”

서동을 알아본 사택적덕은 아버지 부여선에게 다가갔다. 부여선이 당시 서동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사택씨는 서동을 인간선물(人間先物)로 구입하려고 했다. 593년을 전후한 시기에 서동은 사택적덕의 딸과 혼인했다. 직후 장남인 의자를 낳았다. 이제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은 처가인 사택씨였다.

598년 위덕왕이 죽고 조부인 혜왕이 즉위했다. 서동은 직계 왕손으로 격상됐다. 이후 그는 제대로 된 왕족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혈육들에게 대접받지 못했다. 왕위계승이 가능한 4촌들과 이복형제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생모가 고위 귀족의 딸들이었고 든든한 외가가 버티고 있었다.

왕자나 왕손들의 서열은 그의 어머니의 출신 신분에 따라 결정됐다. 어머니가 미천한 서동에게 외가의 존재는 없었다. 그는 혈육들에게 존재감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보호막이 됐다. 환영받지 못했지만 미미한 존재라 견제받지도 않았던 것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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