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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무왕의 패전
`패자는 침묵' 신라·백제의 결전 `승자는 통곡'
2011. 06. 15   00:00 입력 | 2013. 01. 05   06:54 수정

경남 함안 도항·말산리 고분군에는 아라가야의 왕들이 묻혀 있다. 그들 가운데 하나는 602년 신라 진평왕의 ‘아나(阿那)의 통곡’을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진평왕은 이곳 함안에서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한 귀산을 맞이하며 통곡했다.
 
신라의 5개 요새가 바둑알 같은 집을 짓고 있는 운봉 분지였다. 백제군은 요새가 보이자 행군을 멈췄다. 왜군과 신라를 협격하기 위해 ‘4만’ 대군을 동원했다. 하지만 왜군은 오지 않았고, 통과할 고개로 여겨졌던 운봉이 결전의 장소가 됐다. 

요새를 등지고 서 있는 신라군 대열들이 보였다. 백제군은 화살의 사정거리가 못 미치는 거리에서 정지했다. 이윽고 수없이 많은 보병의 진(陣)들이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싸움이 벌어졌다. 초반 전투에 병력이 우세한 백제군이 오히려 밀렸다. 

전투의 공간에도 적정 병력이 있다. 2인용 참호에 5명이 들어가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백제는 신라가 요새화한 운봉 분지에 너무나 많은 병력을 투입한 꼴이 됐다. 백제군의 대열은 신라군보다 밀집돼 있었다. 양측의 궁수들이 화살을 일제히 발사했다고 해도 백제군이 많은 피해를 봤을 것이다. 백제군의 퇴각이 시작됐다. ‘삼국사기’ 귀산전은 이후의 싸움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다.

백제군은 천산(泉山) 서쪽 부근의 계곡으로 물러났다. 그곳에 넓은 늪이 있었다. 신라 장군 무은(武殷)은 자신의 중무장 보병 1000명과 함께 백제군을 추격하다 늪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진펄에 발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몸은 우둔해지고 지쳐 갔다. 무은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말을 탄 무은을 노리던 백제군들이 있었다. 그들이 뒤에서 퇴각하던 무은을 갈고리로 찍었고, 말에서 끌어내렸다. 백제군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무은은 결박당했고 백제군은 그를 끌고 갔다. 장군이 포로가 되자 사기가 떨어진 신라군들은 요새를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은의 아들 귀산은 아버지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귀산은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무사는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 감히 내가 달아나겠는가.” 귀산은 친구 추항과 함께 말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아들과 신라 장군을 포로로 잡아 공을 세우겠다는 백제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이익을 다투던 다수의 백제군이 둘의 필사적인 사투에 밀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수십 명이 창에 찔려 죽었다. 아버지를 만난 귀산은 포박을 풀어 주고 자신의 말에 태웠다. 아버지를 태운 말이 적진을 빠져 나가고 귀산과 추앙은 적군에 포위돼 난투극을 벌였다. 처절하게 싸우는 둘의 모습을 본 신라군들이 돌아섰다. 

격분에 찬 신라군들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진법이고 뭐고 없었다. 그것은 기세였다. 신라군에 눌린 백제군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판의 싸움은 전투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삼국사기’는 그 결과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적의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해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전투가 끝난 들판, 시신들 사이에서 귀산과 추앙을 찾아냈다. 숨은 붙어 있었다. 치료를 위해 그들은 수레 위에 올려졌다. 살아남은 자들의 눈물에 소매는 젖어 갔다. 그들의 이야기는 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귀산은 부모를 구했으니 효를 다했고, 나라를 지켰으니 충을 다했다. 

신라 진평왕이 그들을 불렀다. 부상을 당했지만 크게 포상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왕은 왜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마산만의 배후 지역인 함안에 있었다. 진평왕은 장군들과 함께 함안 아나(阿那)의 들판으로 마중 나왔다.

그들을 실은 수레가 왕 앞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는 도중에 그들의 마지막 남은 희미한 숨마저 떨어져 있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전사한 그들이 불쌍해서인지 왕은 눈물을 흘렸다. 장군들도 왕을 따라 곡(哭)을 하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대부분 왕의 친족인 왕족(진골귀족)들이었다. 

왕의 통곡의식은 강요의 절규였다. 앞으로 진골귀족들도 자식들을 기꺼이 국가 보위 전쟁의 신성한 재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지배층이 사지(死地)에 자식들을 내몰지 않는다면 백성들도 국가 수호전쟁에 자식을 내놓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왜국의 약속 불이행으로 백제군 4만이 희생됐다. 3년 상을 끝내고 전쟁을 주도했던 무왕이 궁색해졌다. 칩거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603년에서 604년까지 2년 동안 기록은 침묵을 하고 있다. 백제는 이후 9년 동안 전쟁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왜국과 백제는 손발이 맞지 않았다. 왜국이 602년에 신라를 공격해 줬다면 신라가 함안에서 운봉으로 원군을 투입하지 못했을 것이고, 무왕은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듬해인 603년 왜국에 중요한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해 2월에 신라원정군 총사령관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죽었고, 4월 그 자리에는 당마황자(當摩皇子)가 임명됐다. 하지만 백제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는지 아니면 패전의 상처가 너무 컸는지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고구려가 군대를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은 바빴다. 왜군의 신라 침략이 실행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신라 진평왕은 군대의 주력을 낙동강 하류 함안지역에 계속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국의 신라 침공 계획이 또다시 중지됐다. 정보가 전해진 직후인 그해 8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진평왕은 남쪽에 있는 병력 1만을 빼 직접 한수 하류지역으로 가서 북한산성을 구원했다. 

신라를 포위하고 있는 고구려·백제·왜국은 한꺼번에 날지 못하는 닭들과 같았다. 박자가 맞지 않았다.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고구려의 고국원왕, 백제의 개로왕처럼 서로의 왕들을 죽였던 고구려와 백제의 구원(舊怨)에 있었다. 멸망할 때까지 결코 서로를 믿지 못했다. 598년 백제 법왕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돕겠다고 사신을 보내 약속했고, 배알이 뒤틀린 영양왕이 그해 말에 백제를 공격해 약탈했다. 

한강하류 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가로막고 있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직접 국경을 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선박을 동원해 뱃길로 백제를 공격할 정도로 감정이 있었다. 598년의 상황은 607년에도 다시 되풀이됐다. 3월에 무왕은 좌평 왕효린을 수나라에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5월 고구려가 백제 송산성을 공격했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지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고구려는 방향을 돌려 석두성을 공격해 남녀 3000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고구려와 백제의 대규모 원조를 받아 먹은 왜국도 신라 침공을 위해 591년부터 603년까지 규슈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600년 단 1회 신라를 공격했을 뿐이다. 600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해야 했지만 2년 전 수나라와 전쟁을 하고 난 직후여서 만주의 요하 방면에 있는 주력을 뺄 수 없었다. 백제도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해야 했지만 위덕왕·혜왕·법왕의 3년 상(喪)이 한꺼번에 겹치는 바람에 손을 쓸 수 없었다. 

물론 신라는 왜국의 위협을 받았고 병력의 상당 부분이 남쪽에 묶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왜국의 위협이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신라의 여력을 완전히 증발시키지는 못했다. 608년 2월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 변방을 침공해 8000명의 신라인들을 잡아갔고, 4월에 신라의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이 중요한 시점에 백제와 왜는 각각 신라의 서남쪽을 공략했어야 했다. 

하지만 왜국과 백제의 관계는 602년의 일로 이미 뒤틀려 있었다. 608년 8월 당황제의 국서를 지참한 왜국의 견당사(遣唐使)가 귀국길에 백제의 해안가를 지나갔다. 백제는 사절의 손에 들려 있는 당황제의 국서를 압수했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배반함이 많은 나라다. 길 가는 잠깐 사이에도 오히려 속임수를 쓴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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