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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의자왕의 친위 쿠데타
백제, 642년 신라 서남부 지역 40개 성 점령
2011. 10. 05   00:00 입력 | 2013. 01. 05   07:14 수정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던 거창 거열산성의 과거와 현재 모습. 거창군청 홍보실 제공
  
642년 정월 29일 나라(良) 왜국의 궁정. 백제에 사신으로 갔던 아담(阿曇連比羅夫)이 급하게 도착했다. 백제 사신과 함께 규슈 츠쿠시(현 후쿠오카)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역마(驛馬)를 갈아타 가면서 600㎞를 달려왔다. 백제 쪽에서 뭔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일본서기’는 그의 첫 말을 이렇게 전한다. “백제에서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3일 후인 2월 2일에 백제 사신이 나라에 들어왔다. 왜 조정은 백제에서 일어난 일을 아담을 통해 이미 들었다. 하지만 확인이 필요했는지 백제 사신이 머물고 있는 객사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물었다. 백제 사절단장이 짧게 말했다. 

“우리 백제국왕(의자왕)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일만 한다. 귀국하는 (백제사신의) 종자에게 딸려 보내달라 청해도 왜 조정이 허락하지 마시오.”

새상은 백제 의자왕의 동생이었다. 그의 귀국을 의자왕이 거부하는 메시지였다. 백제의 사절단장은 자신의 보신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러자 왜인들은 단장의 종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입을 열었다. ‘일본서기’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 백제국왕(國主)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교기를 비롯해 왕의 혈족 4명과 내신좌평 기미(岐味) 등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습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 사극드라마 ‘계백’에서 ‘교기’는 의자왕의 이복동생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왕 동생(弟王子)의 아들(兒)이므로, 왕의 조카가 확실하다(弟王子兒翹岐). 

백제왕의 숙청은 안구돌출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의 효성과 형제들과의 우애는 동아 3국에 정평이 나 있을 정도였다. 이제 그것이 왕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는 아버지 무왕의 그늘에서 형제들에게 시달리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가 왕위에 오른 직후 모친이 사망하자 일을 저질렀다.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회복한 것이었다. 

내신좌평을 비롯한 40여 명의 귀족들도 숙청됐다. 무왕 치세 42년 간 백제 조정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로 여겨지는 그들의 재산은 몰수됐을 것이다. 624년 백제는 지리산을 돌파해 남강유역의 적지 않은 땅을 차지했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이 아버지의 신하들에게 사여됐을 것이다. 

반면 왕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는 전국에 있는 주와 군을 직접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지 않은 자는 모두 풀어주게 했다. 잡혀 가거나 인신이 구속된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을 다시 만난 백성들은 왕의 은총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으리라.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642년) 2월에 왕은 주(州) 군(郡)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를 살펴서 사형할 죄 이외에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고대사회에서 백성들은 상당수가 귀족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그것을 갚지 못해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고, 굶주림으로 인한 절도죄로 검거된 사람들도 많았다. 대사면은 새 국왕의 존재를 백성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사면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왕경으로 돌아온 의자왕은 행정력을 가동했다. 지방의 각 행정단위에 명령을 내려 사람들을 징발하고 군수물자를 수취하게 했고, 자신은 흥수와 윤충 등의 유능한 장군들과 머리를 맞대고 전쟁기획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목표는 신라의 서부지역 총사령부인 대야성이었다.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유역의 그 요새를 차지하기 위해 어떻게 인력과 물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공급할 것인지 참모들 간에 토론이 있었다. 

대야성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40여 성들이 바둑알처럼 촘촘히 집을 짓고 있었다. 대야성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그 주변의 보호막을 파괴해야 했다. 점령해야 할 성들의 순위와 그 와중에 공격부대를 배후에서 방어하는 계획 등이 수립됐다. 

남원에 집중된 병력과 물자가 지리산을 넘어 남강유역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 왕과 장군들이 왕경인 부여에서 출발했다. 교통로상 왕경 부여의 남쪽 관문인 익산을 경유했다. 의자왕과 그의 부하들은 익산에 찬란히 우뚝 솟은 미륵사 9층탑을 보았다.

아버지 무왕이 건립할 당시 중국지역을 제외하고는 최초의 9층탑이었다. 동아시아 주변국가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탑은 백제의 화려한 재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위한 선전물이었다. 미륵사는 2004년 북제(北齊)의 업(?) 남성(南城) 폐사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동아시아 역사상 최대의 사역(寺域)을 자랑했던 사찰이다. 

향내가 진동하고 낭랑한 염불 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의자왕이 미륵사의 부처 앞에서 무엇을 염원했고, 승려들이 최대의 고객이자 주인이기도 한 그에게 어떠한 기대감을 불어넣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즉위 직후 치러진 전쟁의 패배는 왕에게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익산에서 전주와 남원을 거쳐 지리산을 넘어선 의자왕은 함양에 지휘소를 마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합천의 대야성으로 향하는 길은 여기서 2개로 갈라진다. 함양에서 거창을 거쳐 합천으로 가는 코스는 험했고, 산청으로 가서 의령을 통해 합천으로 가는 코스는 상대적으로 완만했다. 평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최소한 거창지역에 있는 신라의 성들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함양 자체가 위협을 받았다. 함양 안의면에서 거창 마리면을 거쳐 거창읍으로 들어가는 건계정 협곡의 북쪽사면 정상에 거열산성이 위치해 있었다. 백제군이 황강을 따라 합천 대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면 소재지에서 위천(渭川)을 건너 명승리에서 거창으로 진입하는 터널이 있다. 그 왼쪽에 거열산성으로 올라가는 가장 완만한 사면이 있는데, 여기서 싸움이 시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험한 산악지대의 전투는 집단이 정연한 대열을 이뤄 싸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30~50명의 병사가 무리를 이뤄 산림이 우거진 골짜기 구석구석에서 싸웠다. 시야가 좋지 않아 활(弓)은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했고, 긴 창도 용이한 무기가 되지 못했다. 단창과 곤봉을 이용한 패싸움이 주를 이뤘던 것으로 생각된다. 

충분한 물자와 병력이 충원된 백제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이미 18년간 남강 유역에 주둔해 왔던지라 현지 사정도 밝았다. 반면 방어하는 신라군은 40개의 요새에 병력이 분산돼 있었다. 백제군의 집중 공격으로 성은 함락됐고, 규모가 상당한 거창 분지가 백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전투는 거창과 산청 지역에서 합천으로 향하는 좁은 길목을 따라 위치한 40개의 산성에서 차례로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공격하는 백제군은 골짜기의 요충지에서 길목을 지키는 요새 하나하나에 전력을 집중시켜 각개 격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장한 각오를 한 새 국왕이 몸을 사리지 않고 전선에 나와 관전하는 경우도 있어 사기가 높았다. 

신라 측의 지휘관 품석(品釋)은 개념이 부재한 퇴폐적인 사람이었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대야성의 성주이기도 한 그는 신라 진골귀족 가운데서도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다. 선덕여왕의 5촌 조카이자 여동생의 아들인 김춘추의 딸과 결혼을 했다. 장인의 연줄로 대야주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부하들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일신의 보신만 생각하는 어린애였다. 백성과 부하들을 자기의 소유물인 양 여겼고, 경험을 통해 전술을 채득한 유능한 부하들의 작전 판단을 묵살했다. 부하들에게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되묻게 하는 무능한 지휘관의 전형이었다. 

재앙을 뻔히 알고도 당하는 품석의 부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패전은 이미 정해졌고,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여기서 죽어나갈 것인가.” ‘삼국사기’는 전투의 결과만을 전하고 있다. “(642년) 가을 7월, (의자)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다음은 대야성이다. 무능한 지휘관 한 명이 입히는 손실은 적군 수만의 전력과 맞먹는 위력이 있다. 지위가 높을수록 그것은 배가된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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