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41519

한반도 남부를 호령한 가야의 철갑옷, 그 실체를 찾아서
[가야문화권 답사 15] 가야의 갑옷
09.10.20 11:17 l 최종 업데이트 09.10.20 11:17 l 송영대(greenyds)

가야를 흔히 철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철기유물이 풍부하였으며, 또한 철을 통한 교역도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철을 바탕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많이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야의 갑옷의 존재는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무기와 갑옷 분야에서 학자들이 가장 많이 참조하는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들이다. 이 중에서 출토된 갑옷들 중 3/4정도는 옛 가야가 있던 곳에서 출토되었으며 다른 백제나 신라에 비해서도 그 수가 압도적이다.

갑옷의 존재는 그 당시 발달되어 있던 군사문화를 잘 말해준다. 또한 갑옷의 생산은 철제품 중에서도 가장 고난이도의 작업이 필요하며,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서는 그만큼 발달된 철제 가공능력과 과학이 필요하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갑옷들은 그런 점에서 당시의 뛰어난 과학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과학의 발달사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가야의 갑옷들은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나 부산 복천동고분군 등에서 널리 보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야는 이 갑옷과 무기들을 통하여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였고, 한때는 신라를 압박하는 수준까지 이를 정도로 강성 할 수 있었다.

그럼 그 가야 갑옷의 실체는 과연 어떨까? 가야가 자랑하는 철갑옷, 그 변천과정과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야 철갑옷의 등장, 그리고 종장판갑


▲ 종장판갑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갑옷. 가장 이른 형태의 갑옷으로서 세로로 긴 형태의 철판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갑옷과 갑옷을 가죽이나 작은 철못으로 연결하였다 ⓒ 부산대학교박물관

고대의 갑옷은 크게 판갑과 찰갑으로 나눠진다. 판갑(板甲)은 큰 철판 여러 매를 가지고 만든 갑옷을 말하며, 찰갑(札甲)은 여러 철판조각, 즉 소찰(小札)을 이용하여 만든 갑옷을 뜻한다. 흔히 가야는 판갑이 중심으로, 그리고 고구려는 찰갑이 중심으로 발달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가야도 5세기 이후부터는 판갑보다 찰갑이 더 많이 사용되며, 이는 한반도 전체적으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판갑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종장판갑(縱長板甲)이다. 이 이전엔 나무나 뼈, 가죽 등으로 갑옷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러한 갑옷의 형태를 바탕으로 철갑옷도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철갑옷의 등장으로 방어력이 올라가게 되며 이는 본격적인 정복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과 같다.


▲ 김해 양동리 76호분 출토 갑옷 갑옷과 투구가 같이 출토되어 당시 전사의 모습을 추정 복원할 수 있다. 이런 종장판갑은 주로 낙동강 유역의 부산과 김해지역에서 보인다 ⓒ 동의대학교박물관

종장판갑은 주로 4세기 때 만들어졌으며 철판을 세로로 붙여서 만든 판갑이라는 뜻이다. 연결방법에 따라 가죽으로 연결한 형태와 납작한 못으로 고정한 형태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정결(釘結)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의 리베팅(Rivetting)과 유사하다. 리베팅은 철판과 철판을 맞춰 구멍을 뚫고 못을 집어넣은 다음 양쪽에서 두드려 압착시켜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가야의 판갑은 발생 초기부터 이미 도련판, 섶판, 무판 등을 갖추고 경갑과 측경판이 있는 등의 모습을 보여, 이전부터 갑옷의 존재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종장판갑의 윗부분에 부착된 목가리개[頸甲]는 이른 시기에는 작은 철판 여러 매를 부채꼴 모양으로 연결하여 만들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장방형의 철판 1~2매를 세로로 휘어서 만들었다. 이러한 목가리개가 주로 뒷목을 보호해준다면 옆 부분은 측경판으로 보호한다. 측경판(側頸板)은 반달모양으로 생긴 철판으로 어깨너머 앞가슴까지 세워 목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고사리무늬나 새 무늬로 장식을 붙이기도 하여 미적 감각을 더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물로서는 부산 복천동 46호분과 57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김해 양동리 76호분, 울산 중산리 1A-74호분에서 출토된 게 있다. 특히 김해 양동리 76호분에서는 몽고발형투구와 함께 출토되어 서로가 세트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철갑옷의 변화과정


▲ 삼각판갑과 횡장판갑 종장판갑보다 더 발달된 형태로서 고도의 철기술이 요구된다. 이때부턴 주로 작은 못으로 철판을 연결하고 개폐장치를 설치하는게 늘어난다 ⓒ 경남고고학연구소, 계명대학교박물관

앞서 말한 종장판갑은 5세기까지도 계속 이용된다. 하지만 종장판갑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판갑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삼각판갑, 횡장판갑, 장방판갑이 바로 그것이며 앞선 종장판갑보다 좀 더 실용적인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형태 중 가장 앞선 형태인 삼각판갑(三角板甲)은 종장판갑에 비해 몇 가지 부분에서 다른 점이 있다. 일단 철판의 수가 많은 것에서 적은 것으로, 개폐장치(開閉裝置)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그리고 가죽연결이 납작한 못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삼각판갑은 5세기 초에 해당되는 합천 옥전 68호분을 비롯하여 함안 도항리 13호분, 김해 두곡 43호분, 동래 복천동 4호분 등에서 출토 되었는데 이때까지는 입고 벗기 편리한 개폐장치가 없으며 가죽을 이용하여 갑옷을 결구시켰다. 그러나 이후에는 철판 구성은 동일하지만 연결방법을 납작한 못을 사용하며 함양 상백리, 부산 녹산동 가달 등에서 이런 양식의 갑옷들이 출토되었다. 옆구리 아래로 개폐장치를 달아 착용의 편리함을 도모하였는데 이들 개폐장치의 형태를 가지고 지역적 차이를 말하기도 한다.

장방판갑(長方板甲)은 앞서 말한 삼각판갑과 마찬가지로 대금과 대금 사이의 지판 구성이 장방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장방판갑은 일본에서는 그 출토 예가 많으나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김해 두곡 72호분, 돌래 연산동 8호분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 전 김해 퇴래리 갑옷 왼쪽 사진이 최근에 복원된 것이며, 오른족 사진은 과거에 복원된 것이다. 2005년도부터 보존처리를 실시하면서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국립김해박물관 도록

횡장판갑(橫長板甲)은 종래의 판갑들이 여러 매의 삼각판을 이용하던 것을, 세장방형의 철판을 인체의 곡률에 맞게 구부려 가로로 대어 못으로 연결시켜 만든 것을 의미한다. 여러 판갑의 형식들 중 가장 나중에 나타나며 고도의 제작기술이 요구된다. 합천 옥전 28호분, 고령 지산동 32호분, 동래 복촌동 112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백제지역인 전남 장성과 충북 음성의 망이산성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갑옷 중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갑옷이 5세기 중반의 것인 전(傳) 김해 퇴래리 갑옷이다. 등과 가슴 부분에 고사리무늬가 부착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명작이다. 철판을 가로와 세로로 맞춰 철 못을 이용하여 짜 맞추어 만들었다. 애초에는 측경판이 가슴 앞에 부착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렇게 복원되어 있었지만 2005년 7월부터 9개월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실시된 보존처리를 통하여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판갑을 보조하는 갑옷들, 그리고 찰갑으로의 변화


▲ 목가리개와 어깨가리개 판갑이나 찰갑에 부속되어 사용된 갑옷으로서 특히 목가리개는 가야와 고구려에서 보이는 독특한 갑옷이다. 이 외에도 여러 부속갑옷들이 존재하였다 ⓒ 동의대학교박물관, 계명대학교박물관

이러한 판갑 외에도 부속적인 갑옷들도 여럿 있었다.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한 목가리개[頸甲]는 말 그대로 목을 보호하는 부속구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널리 보인다. 부산 복천동 11호분, 김해 양동 107호분 등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그리고 어깨가리개[肩甲]라고 하여 5세기 때에 유행한 삼각판갑과 횡장판갑에 부속되어 사용되었다. 주인공의 어깨와 쇄골부위를 보호하기 위해 입는 갑옷으로서 U자형으로 휜 세장방형의 철판으로 만들었는데 고령 지산리 32호분, 부산 복천동 112호분, 김해 가달고분군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리고 팔뚝가리개[肱甲]의 경우 주인공의 팔꿈치 아래에서 손목 위까지를 보호하는 갑옷의 부속구이다. 2매로 된 철판을 원통형으로 맞대어 만든 것으로서 부산 복천동 11호분과 상주 신흥동 나지구 37호분에서 완전한 형태의 유물로 출토된 바 있다. 애초에 복천동 11호분에서 출토될 당시에는 정강이가리개로 인식되었지만 연구 결과 팔뚝가리개임이 밝혀졌다.


▲ 가야 무사 복원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가야 무사의 복원 모습. 5세기 이후의 모습으로 이때는 주로 찰갑을 이용하여 무장하였다 ⓒ 국립중앙박물관

이 외에도 투구와 마갑의 존재도 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해 주는 갑옷의 일종으로 가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투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마갑은 말을 보호해 주는 갑옷의 일종으로서 주로 중장기병의 말에 사용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말을 방어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이러한 모습이 잘 나타나며 함안 마갑총에서 우수한 마갑이 출토되었고, 최근 경주 황오동 쪽샘지구에서도 완전한 형태의 마갑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판갑 중심이던 가야의 갑옷은 서서히 찰갑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찰갑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신라를 거쳐 가야에도 전래되었다. 판갑은 큰 철판을 이용해서 만들었기에 행동의 불편함과 제약이 있었던 반면에 찰갑은 행동이 좀 더 편하도록 작은 철판들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서 말한 보조갑옷들도 찰갑과 함께 같이 사용되어 방어에 취약한 부분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4세기 대의 찰갑은 동래 복천동 38호분과 64호분, 경산 임당의 1A-60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있지만 복원은 힘든 상태이다. 5세기대의 찰갑 역시 구체적인 복원은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준다. 찰갑은 판갑처럼 전체가 이어져서 출토되기 힘들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래되는 게 적은 면도 있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선 껴묻거리를 많이 묻던 풍습이 적게 묻는 풍습으로 변한다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흔히 가야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약한 존재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가야가 과연 그 당시에 약소국이라고만 보아야 하는지에 의문이 간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풍부한 갑옷과 무기들이며, 이들은 가야의 무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이를 통하여 한반도 남부에서 가야의 세력은 한때 신라를 압도할 정도라고 보기도 하며, <삼국사기>에서도 그러한 기록들은 종종 보인다. 가야에 대한 편견은 이런 고고학적인 자료를 보고, 당시 역사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극복이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 가야의 갑옷에 대해 정리해 본 글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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