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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삼한·가야의 교통 일본·중국은 물론 먼 나라 인도까지 진출 - 자동차생활" 중 가야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가야의 건국과 교통
2002-08-10 자동차생활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말을 잘 탔던 부여인들은 조직적인 정치와 농경, 목축으로 국력을 키워 고구려가 점령하기까지 만주북부일대를 차지한 강력한 나라로 군림했다. 동서남북으로 도로를 잘 닦고 수레도 폭넓게 이용했다. 삼한과 가야에서는 수상교통이 더 발달했다. 일찍부터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교역을 했고, 특히 농업과 철 생산, 철제 수공업 기술이 뛰어났던 가야는 일본과 활발히 교역하며 적극적으로 문물을 전파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가야시대 배의 토기



수로왕비 허황옥이 이용한 인도배 추상도

가야국의 탄생과 교통 

가야국은 원래 변한에 있던 작은 부락 모임으로 변한이 쇠퇴하면서 낙동강 유역에서 일어난 6개 부락의 연합국가다. 그 중 경남 김해지역에서 김수로가 기원전 42년에 건국한 금관가야가 주축이 되어 발달한 나라로서, 김수로는 아라가야(경남 함안지역), 고령가야(경북 상주지역), 대가야(경북 고령일대), 성산가야(경북 성주지역), 소가야(경남 고성지역)등 5가야에 각각 제후를 두고 전체 가야국을 통치했다. 

가야국들을 주도했던 금관가야의 건국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천지개벽 이후 이 땅에는 나라와 임금과 신하도 없었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류수간, 류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기간 등 9명의 추장들이 100호에 7만5천 명의 백성을 다스렸다. 그런데 임인년(기원전 42년) 3월에 북쪽 구지봉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나서 이상히 여긴 사람들 200∼300명이 모여 달려갔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여기에 누가 왔는가?” 하는 목소리만 들렸다. 이에 달려온 9한(간)들이 “우리가 왔다”고 하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 “구지봉”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이곳에다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라 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말을 따라 9한과 백성들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랏빛 긴 끈이 하늘로부터 땅위로 내려졌다. 끈이 닿은 땅을 찾아가 보니 붉은 색 보자기에 금함이 싸여 있었다. 

이상히 여겨 열어 보았더니 황금 알 6개가 들어 있어 아도간이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이튿날 함을 열어보니 6개의 황금 알이 6명의 동자로 변해 있었다. 6명의 동자는 10일만에 얼굴과 눈이 빛나고 키가 9척이나 되는 건장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이 중 맏형이 이 달 보름 날 금관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고, 제일 먼저 나타났다해서 수로라는 이름을 붙여 김수로라 불렀고 나머지 5명도 각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런 설화로 등장한 가야국은 농업과 철기문화가 발달했고 특히 철 생산지로 유명해 삼한에 이어 중국, 일본에 철을 수출하는 등 상품교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나 AD 532년 신라에 정복당하고 말았다. 

가야국에는 농업과 철 생산, 그리고 철제품 수공업이 상당히 발달해 특히 일본과 활발히 교역했을 뿐만 아니라 가야사람과 가야문화가 일본으로 많이 건너갔음이 남해 일대 가야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인도와 뱃길 터 
인도 공주 허황옥, 배를 타고 가야로 
 
육상교통은 해상교통보다 그리 발달하지 못했다. 대개의 가야국이 낙동강유역과 남해안에 위치했기 때문에 수상교통이 더 발달했고 평지가 많아 육상교통이 쉬웠으므로 주로 소와 말을 많이 타고 다닌 것으로 보인다. 수레도 사용했으나 승용이 아닌 도성 내에서 화물운반용으로 사용한 듯하다. 가야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길마, 앞뒤 턱장식, 옆장식 가죽띠, 청동제 말 모양 고리 등 마구류 제품이 많은데, 이를 보면 소보다 말을 많이 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토된 도자기 중 두 개의 수레바퀴를 아래위로 연결한 통 모양의 도기에 바퀴살 18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수레는 주로 화물운반용으로 쓰인 것 같다. 화물을 운반하려면 수레가 튼튼해야 하므로 살을 많이 설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지 중 한전에는 ‘가야 사람들은 소와 말을 타고 시집과 장가를 가는 예절풍습이 있다. 바퀴살이 18개가 있는 수레바퀴 모양의 도기가 있는데 이는 가야사람들이 달구지를 많이 만들어 소나 말에 매워 운반용이나 군사용으로 썼던 것을 의미한다’는 기록이 있다. 

가야무덤 출토품에는 말 투구, 말 갑옷, 말 궁둥이에 꽂는 깃발대, 말 가슴에 다는 말창, 말 자갈, 갑옷 입은 말에 탄 병사 모양의 도기 등이 있는데 이을 보면 가야인들은 육지에서 말을 많이 탄 것 같다. 평상시에는 승용과 화물수송용으로, 전시에는 전투용 기마대로 많이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삼국유사 가라국(가야국)기에 보면 기원전후 가라국의 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락국의 기마병이 신라의 기마대와 자주 싸운 기록이 있어 가야국 사람들은 말타기를 잘했고 기마대가 상당히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소형 배, 나룻배 뗏목 등을 이용한 내륙 수상교통도 발달했지만, 가야국의 머나 먼 원양 진출은 놀랍다. 삼국유사 가라국가에 보면 김수로왕이 저 멀리 인도의 한 작은 나라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천한(최고통치계급 9한 중 1한)을 시켜 배에 좋은 말을 싣고 망상도(김해의 남쪽 섬)로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기한(9한중 1한)을 시켜 승점(김해의 턱 아래 있는 소 가야국)으로 가도록 했다. 섬에 있던 류천한 등은 배에서 허황옥과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 횃불을 들어 궁궐에 알렸다. 이를 본 신기한은 대궐로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하니 김수로왕은 기뻐하면서 9한들을 시켜 찬란하게 꾸민 배로 이들을 맞이하게 했다’고 적혀 있다. 

봉수 횃불 통신법 제일 처음으로 사용 
일본으로 건너가 가야 문물 적극 전파 
 
이 기록을 보면 김수로왕은 인도와 이미 해상교류를 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왕비 허황옥은 과연 어떤 바닷길을 통해 가야로 왔는가 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인도의 아유타국을 배로 출발해 니코발군도, 탐록(랑군), 수마트라, 양자강 어구를 지나 황해를 건너 가야국으로 들어오는 험하고 먼 해로를 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보면 아유타국의 조선기술과 항해술이 얼마나 발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제 해상 교통로 였던 것이다. 

허황옥을 태우고 온 아유타국의 배가 돌아갈 때 김수로왕은 선원 15명에게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씩을 주어 보냈다고 한다. 15명의 선원들과 많은 짐을 실을 정도라면 왕비 허황옥이 타고 온 배는 꽤나 큰 노 젓는 배였을 것이다. 또한 왕비를 맞이하기 위해 왕이 찬란하게 꾸민 배로 마중했다는 기록을 보면 금관가야의 수상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수로왕이 수백 척의 전투선과 수군을 거느렸다는 기록도 있어, 가야국의 수상교통이 꽤나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썼다는 봉수 횃불통신법은 가야국에서 먼저 사용했던 것이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할 때인 서기 48년, 왕비가 배를 타고 김해 앞바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환영 나간 신하들이 횃불로 궁궐에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가야국에서는 일찍부터 적의 침입 또는 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횃불로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가야인들은 또 선대인 삼한이나 고조선보다 일본으로 적극 진출했음을 한일 간의 여러 유적, 유물을 보고 알 수 있다. 가야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곳에 작은 부족국가를 건설하고 가야의 문물을 전파했다. 이들이 대한해협을 건너 자유롭게 바다를 통해 일본과 왕래할 수 있었던 것은 향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고조선으로부터 해류의 흐름을 이용하는 항해술을 전수 받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노 젓는 배로 오갈 수 있는 쿠로시오(흑조) 뱃길을 잘 간파했기 때문에 일본으로 적극 진출할 수 있었다. 

가야인들의 일본 진출증거는 일본 큐슈 북쪽 이토시마 반도 일대와 동남부지방에 남아 있는 가야 관련 지명들이다. 이 일대에는 아직도 가라향, 가야산, 가야촌, 게야, 가야 등의 지명을 가진 부락이 있고 가야의 철기들이 많이 출토된다. 또 이토시마 반도(후쿠오카의 나가사키 반도) 북단에 있는 가다자키촌을 고대에는 `가라도마리`라 불렀는데 이것은 ‘조선의 배가 정박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가야의 배가 얼마나 많이 드나들었던가 알 수 있다. 그러면 일본과 빈번하게 해상왕래를 한 가야는 어떤 해로를 택했을까. ‘삼국지’ 위지의 왜인전은 김해-대마도-이키섬-일본의 뱃길을 주로 이용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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