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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백제의 남강유역 점령
백제, 624년 함양·산청 일대 점령 성공
2011. 06. 29   00:00 입력 | 2013. 01. 05   06:57 수정
 

거창 분지의 전경. 624년 이곳에 신라의 5개 사단(상주정·하주정·귀당·서당·법당)이 집결했으나 포위당한 아군 구원을 포기하고 철수를 했다. 거창군청 홍보실


600년대 초반 왜국의 실권자였던 성덕태자가 건립한 호류지(法隆寺). 현재 일본 성덕종의 본산이다. 필자제공#
 
622년 왜국(倭國)을 이끌어 오던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세상을 떴다. 그는 일본을 불교국가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법륭사(法隆寺)를 지었고, 17조 헌법을 만들어 삼보를 공경할 것을 명하고 선악의 도리로 불교를 채택했다. 

이전 왜국은 숭불파(崇佛派)와 배불파(排佛派)가 대립하고 있었다. 587년 5월 21일 태자의 아버지인 요메이 천황(用明天皇)이 죽자 양파 간의 투쟁이 벌어졌다. 성덕태자는 숭불파인 소가씨(蘇阿氏)를 지원해 승리하게 했다. 성덕태자와 소가씨는 부처의 이름 아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 문물을 가지고 왜국에 접근했다. 자국의 군사적 이익을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왜국·백제·고구려 삼국의 견제로 고립됐다. 하지만 602년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를 협격하기로 한 왜국이 파병을 연기하면서 백제 병력 4만이 지리산 중턱에서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무왕은 성덕태자를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습적인 신용불량자로 여겼다. 

신라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610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해 관계를 정상화했고, 611년·616년·621년 3회에 걸쳐 사절단을 보내 왜국과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신라는 성덕태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왜국의 유력한 중신들인 사가이베노오미(境部臣) 등을 매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덕태자가 죽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소가씨의 독주체제가 시작됐다. 과거 백제는 소가씨에서 아스카(飛鳥)에 사찰을 지어줄 정도로 둘의 관계는 돈독했다. 왜국에서 친신라계 사람들은 힘을 잃어 갔고, 신라에 대한 왜국의 압박이 다시 밀려왔다. 

623년 왜국의 사신 반금(磐金) 등이 신라에서 외교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였다. 바다에서 왜국의 군사를 가득 실은 배들이 신라의 해안에 수없이 나타났다. 왜국의 군대가 상륙하고 신라를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진평왕은 놀랐다. 해안에 대한 방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왜국의 사신이 신라에 도착해 양국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사신을 전송하려던 찰나에 침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성덕태자의 죽음으로 그동안 왜국에 공을 들여온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됐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진평왕은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 그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막대한 재물이 건네졌다. 앞서 왜국에 도착한 견신라사 반금(磐金) 등이 천황 이하 소가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이번 신라 파병은 성급한 판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진평왕의 물량 공세와 왜국 조정 내부에서 반금 등의 발언으로 왜군은 물러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백제 무왕이 신라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늑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623년 10월이었다. 늑노성의 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지리산 중턱인 운봉 넘어 경남 함양군 입구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624년 10월 무왕은 백제 여러 지역에 산재한 거의 모든 병력을 남원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지리산을 넘어 함양으로 진군시켰다. 

그는 이번에는 꼭 신라의 주력 부대들을 그곳으로 유인해서 모두 전멸시킬 작정이었다. 

무왕은 군대를 나누어 함양과 산청 일대에 산재한 6개 성(속함·앵잠·기잠·기현·혈책)을 모두 포위했다. 무왕이 예상한 대로 신라 진평왕은 상주정·하주정·귀당·법당 ·서당 등 5개 사단으로 구성된 구원군을 파견했다.

경북 상주에 주둔하고 있는 상주정과 귀당은 김천을 경유, 남진하다가 거창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는 대덕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왕경-대구-성주에서 온 수도사단인 서당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3개 사단은 그곳에서 합류해 거창으로 내려왔다. 합천읍 대야성에 주둔한 하주정과 그 현지인으로 구성된 법당은 거창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 5개 사단은 거창에서 합류해 함양으로 향했다. 

백제군의 일부가 6성을 포위한 가운데 나머지 주력군이 거창에서 함양으로 넘어오는 어느 지점에서 신라군 5개 사단을 맞이했다. 백제는 준비된 군대였다. 전장의 주요 지점은 이미 요새화돼 있었고, 연락체계와 보급도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였다. 

백제군의 진용을 본 신라군 장군이라면 누구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눌최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5개 군이) 도착해 백제 군사가 진용을 갖춘 것의 당당함을 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못하였다.” 

당시 신라군은 백제와 고구려·왜의 3면 공격을 받으면서 지쳐 갔다. 초기에는 승리했고, 진평왕은 직접 낙동강 하류에서 한강 하류를 오가면서 싸워 위기도 잘 넘겼다. 하지만 신라 국가 전체의 피로 누적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번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것이 확실했다.

백제 무왕은 이번에 싸움이 크게 벌어지면 한 번에 신라의 주력을 궤멸시킬 작정이었고, 싸움 없이 신라군 주력이 물러나도 남강 중상류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미 포위된 신라의 6개 성 가운데 속함(함양읍)·기잠·혈책(산청) 등 3개가 함락되거나 항복했다. 

싸움의 결과는 신라에 재앙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러한 상황에서 왜군이 남해안 방면에서 함안을 덮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진평왕은 나이가 들어 현장 지휘관들에게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던 것 같다. 

신라 장군들은 왕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현장에서 판단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진평)대왕께서 5군을 여러 장군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병가(兵家)의 말에 승리가 판단되면 진격하고, 어려울 것 같으면 후퇴하라 하였으니 지금 강적이 앞에 있으니 계략을 쓰지 않고 직진했다가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장군들의 보좌관과 참모들도 모두 동의했다. 하지만 회의 석상에서 침묵이 흘렀다. 성에 남겨진 전우들이 죽을 것이 자명한데, 그들을 남겨 두고 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못할 짓이었다. 그래도 신라 주력 사단들이 온존해야 국가의 미래가 있다. 

신라의 장군들은 병력을 이끌고 전장에서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토목공사를 했다. 노진(奴珍) 등 6개의 요새를 만들었다. 아마도 백제군이 진안이나 함양 방면에서 거창 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축성이었던 것 같다. 요새가 완성되고 신라 주력 부대들은 철수했다. 성을 지키던 신라군들이 그대로 남겨졌다. 

포위된 3개 성에 남겨진 병사들을 지휘했던 눌최라는 장군이 분개한 모습과 병사들의 각오를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눌최는 눈물을 흘리면서 병졸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성에 구원이 없이 날로 위험하다. 지금이 바로 진실로 뜻 있는 병사와 의로운 사람이 절조를 다 바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다. 너희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병사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백제군의 본격적인 포위 공격이 시작됐다. 발사되는 거대한 돌덩어리와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2개 성이 함락되고 마지막 1개 성이 남았다. 그들의 병력도 점점 소모돼 가고 있었다. 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병사들은 더욱 투혼에 불탔다. 항복을 해 구차하게 살아 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백제군의 흐름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려 하고 있었다. 신라 병사들도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성의 지휘소에서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던 눌최도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눌최에게는 어릴 적부터 데리고 다닌 노비가 한 명 있었다. 힘이 장사고 활을 아주 잘 쏘았다. 백제군이 지휘소로 떼로 밀려오고 있는데 그는 눌최 앞에서 빠르게 활을 쏘았다. 화살은 백발백중 빗나가는 바가 없었다. 밀려오던 적들이 두려움에 갑자기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어느 도끼를 든 백제 병사가 눌최의 뒤로 달려갔다. 눌최의 어깨에 도끼의 날이 꽂혔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눌최는 쓰러졌고 노비가 혼자 남아 혈투를 벌였다. 노비는 살아남기 위해 싸웠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주인의 시신을 적에게 넘겨 주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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