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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무능한 대야성주 품석
성주<城主>가 비행 일삼아 신라 지휘체계 붕괴
2011. 10. 12   00:00 입력 | 2013. 01. 05   07:16 수정

신라 : 적은 내부에 존재 서남부 40성 함락 '일등공신'은 품석
백제 : 성왕 복수 위해 진골 왕족 수급 처음부터 노려

신라 서부전선 총사령부 격이었던 대야성이 위치한 경남 합천읍 전경. 사진 중앙 낮은 산이 대야성의 옛터다. 합천군 홍보실 제공


1920년 당시 합천 모습. 중앙의 낮은 산이 대야성이 있던 곳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박성천 박사 제공

642년 가을 8월 백제군이 점령한 거창 분지의 들판에 곡식이 익어가고 있었다. 대야성 주변 40여 성을 함락시킨 백제 의자왕은 전선을 뒤로하고 지리산을 넘었다. 대규모 숙청이 있은 직후라 왕경을 오래 비울 수 없었다. 

운봉에서 남원과 전주를 거쳐 익산을 지나가는 길에 미륵사에 들러 부처에 감사의 예불을 올렸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즉위 후 첫 전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개선함으로써 숙청의 상처도 어느 정도 봉합되었으리라. 이제 대야성(大耶城)만 함락시키면 봉합 부위는 완치되고 그 후유증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었다. 

주로 고지에 위치한 신라의 요새들을 수십 개 이상 함락시킨 백제 병사들은 지쳤다. 상당한 병력 보충과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대야성을 뽑아내기 위해 후발 병력들이 가을걷이를 하고 있는 거창분지로 집결했으리라. 

덕유산이 위치한 거창군 북상면에서 발원한 황강은 굽이쳐 흘러 건계정 계곡을 넘어 거창분지의 넓은 들판을 지나 다시 험준한 산으로 들어간다. 합천군 부근에서 계곡은 깊고 넓어지다가 현 합천댐의 둑 지점에서 현격하게 좁아진다. 물길을 따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합천읍이 나온다. 분지의 규모는 거창읍 그것의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비교할 수 없었다. 합천읍에서 강을 따라 조금만 서쪽으로 가면 황강이 낙동강 본류와 합쳐진다. 강 건너에 창녕의 들판이 펼쳐져 있다. 합천읍에 위치한 대야성을 함락시키면 창녕 들판은 백제군의 작전권 안에 들어오고 광대한 대구 분지도 위협할 수 있다. 창녕에서 현풍을 거쳐 대구까지 트여 있어 백제군을 막아낼 자연장애물은 없다. 대야성에 신라 낙동강 서부지역 총사령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백제로 귀국하기 전에 장군 윤충(允忠)에게 전선의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그는 대야성과 그 주변 상황에 대해 모척(毛尺)들을 통해 훤히 알고 있었다. ‘모척’은 한 개인의 이름이라 할 수 없다. 모피 동물 사냥꾼이나 모피가공 기술자이거나 그것을 유통하는 사람들을 범칭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모척들은 신라와 백제가 경계를 이뤘던 지리산·덕유산·가야산 부근의 사람들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국경에 걸쳐 펼쳐진 산악지대에 살았던 모척들 가운데 유력한 어느 사람이 대야성 함락에 결정적으로 연루됐고, 기록에 ‘모척’이란 이름으로 남은 듯하다. 양국의 상황을 잘 아는 국적이 불분명한 변경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신라가 서로 번갈아 뺏고, 빼앗기는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은 누가 그곳을 점령하든 생업을 꾸리며 살아가야 했다. 이중 스파이의 운명을 나면서부터 짊어진 그들은 살기 위해 두 나라 모두에 보험성 정보를 제공했으리라. 그래도 주로 힘의 추가 무거워지는 쪽으로 정보가 쏠렸다. 

18년 전 남강 유역에 신라의 세력이 썰물처럼 밀려나가고 백제군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그러다 이제 황강 유역에서 백제군을 막던 신라 최후의 제방이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백제군이 노도와 같이 밀어닥쳐 신라군을 낙동강으로 밀어 넣을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대야성은 합천 분지의 작은 벌판에 나지막한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에 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남서쪽 사면의 낮은 절벽 쪽에 강이 휘감고 있어 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강은 대야성의 식수원이기도 합니다. 성문은 두 봉우리 사이의 북쪽 가장 낮은 부분에 있습니다. 성의 바깥 부분은 목책이고 내부의 봉우리 정상 부근에 내성이 있습니다. 그곳에 성주의 거처와 망루가 위치합니다. 강 건너 동쪽 맞은편에 대야성보다 높은 산이 있는데 거기에 갈마산성(碣馬山城)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야성이 보입니다.” 

대야성주 품석의 비행에 대한 정보도 들었다. ‘삼국사기’는 전한다. “품석이 막객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처가 색(色)이 있어(黔日之妻有色) 이를 빼앗으니 검일이 한스럽게 여겼다.” 품석은 부하의 처를 빼앗는 수준 낮은 인물이었다. 그는 전방 사단의 최고 지휘관이라 지위를 이용해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하는 호색한이었다. 색이 있는 여자라면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았다. 

처를 빼앗긴 검일이라는 부하를 ‘삼국사기’에서 품석의 ‘막객(幕客)’이라 하고 있다. 검일은 품석에게 개인적으로 고용된 현지인 참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품석이 검일을 대야주의 무관직에 임명한 것은 그의 능력보다 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관직 임명이나 진급을 미끼로 처를 요구했을 가능성도 있고, 검일을 전방에 보내놓고 강탈했을 수도 있다. 

사료상 확인되는 품석의 부하는 서천(西川), 죽죽(竹竹), 용석(龍石), 검일 4인이다. 검일 외에 3인은 상관인 품석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저게 우리 상관인가?” 당시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점령지의 여자들을 취하거나 부하들에게 사여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로 용인받았다. 

하지만 부하의 처를 갈취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굳이 말로 표현은 하지 않았을지라도 부하들은 품석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백제 장군 윤충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는 신라 왕족의 피를 받은 자들이 대야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신라 왕족의 ‘머리’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성주 품석 사이에는 자녀도 있었다. 

당시로부터 약 100년 전 신라의 어느 말 키우는 노비(飼馬奴) 하나가 옥천의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성왕의 머리를 신라 진흥왕에게 바쳐 고간(高干)이란 벼슬을 얻었고, ‘도도(都刀)’라는 그의 이름을 역사에 영원히 남겼다. 

성왕의 머리는 신라 왕경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혔고, 신라의 관리들에게 일상적으로 짓밟혔다.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설욕을 위해 2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지만 역습을 받고 참패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젊은 자식들을 잃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신라와의 싸움에서 잃은 위덕왕의 상흔은 백제왕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천근같은 멍에로 남았다. 

신라 왕족의 머리를 ‘사냥’해 개선하는 것이 백제왕과 왕실 구성원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가업이 되었다. 의자왕은 백제 왕실 구성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 신라 왕족의 ‘머리’를 머리 없이 묻힌 성왕의 무덤 앞에 놓고 술 한 잔을 올려야 했다. 그래야 혈육들을 추방한 그의 친위 쿠데타가 정당성을 확보한다. 

의자왕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윤충은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대야성의 문을 열어야 했다. 윤충은 모척에게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는 검일에게 접근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둘은 전부터 아는 사이었다. 검일과 모척이 어디에선가 접선을 했다. “아내를 빼앗긴 자네의 고통은 처절하지. 하지만 권력 편에 기댄 세상은 무심하지 않은가? 복수의 시간이 눈앞에 와 있다네.” 

모척은 화기(火氣)로 찬 검일의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현실적으로 설득력도 있었다. 당장 백제군이 몰려올 것이 확실했다. 40개의 성이 모두 무너졌는데 대야성도 위험하다. 검일은 복수도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백제의 편에 붙어야 했다. 

품석의 저속한 행동은 이미 대야주의 전체 지휘체계에 치명타를 날렸다. ‘영(令)’이 서지 않았다. 백제군이 어떻게 40개나 되는 대야성 주변의 성들을 단 1개월 만에 모두 함락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의자왕도 그의 장군들도 병사들도 아니었다. 무능한 데다 품성이 저열한 품석이 일등공신이었다. 

전부터 행실이 좋지 않았던 대야성주 품석이었다. 품석의 비행에 대해 병사들은 ‘설마’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여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만성적인 전쟁상태에서 병사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왕경에서 온 진골귀족 출신 성주 품석은 부하의 처를 강탈해 막사에서 품고 있다. 대야성 병사들의 허탈감은 커져만 갔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무엇 때문에 지옥이 될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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