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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야성 함락
城 내놓고 목숨 구걸 `비겁' 성주<신라 품석>의 최후 포로돼 굴욕의 자결 `비참'
2011. 10. 26   00:00 입력 | 2013. 01. 05   07:18 수정

아침에 해가 뜨자 대야성의 불에 탄 건물들이 눈에 드러났다. 잿더미를 보고 대야성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백제군과 싸워야 하는데 식량이 모두 재로 변했다. 황강의 물만 떠 마시고 버틸 수는 없었다. 항전의 의지가 꺾였다. 백제군이 한 번만 더 몰려오면 대야성은 무너질 것이다. 그 순간이 눈앞에 온 것을 직감한 사람들 모두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야성의 신라 지휘부 내부에서 항전과 강화를 놓고 말이 오고 갔다. 참모 죽죽은 항복을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생명을 연장해 보려는 성주 품석이 이번에도 딱 잘랐다. 항복을 하고 목숨을 구하는 것이 순리라고 그는 여겼다. 품석다운 생각이었다. 

황강과 합천 읍내를 배경으로 한 대야성지의 모습. 오른쪽 낮은 산 황강에 접한 지점에 연호사와 함벽루가 위치하고 있다. 연호사는 642년 와우선사가 대야성 싸움에서 숨진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과 장렬하게 전사한 장병 2000여의 영가를 위로하기 위해 지은 사찰로 전해진다.  합천군 홍보실 제공 

보좌관 아찬(阿干) 서천(西川)을 보내 백제 장군 윤충에게 조건부 항복을 제의하게 했다. 서천이 대야성 북문의 성루에 올라갔다. 그리고 다가온 백제 전령에게 항복 조건과 관련해 할 말이 있으니 장군 윤충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고소산성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던 윤충이 전갈을 받았다. 그는 부하들 일부를 대동하고 성을 내려와 황강을 건넜다. 그리고 대야성의 북문으로 다가갔다. 서천이 화살의 사정거리 약간 밖에 말을 타고 서 있는 윤충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삼국사기’는 서천과 윤충이 주고 받은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원컨대 성을 들어 항복하겠다.” 윤충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대와 더불어 우호를 함께하겠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해를 두고 맹세하겠다!” 윤충의 목적은 품석과 고타소랑의 ‘머리’에 있었다. 그들이 항복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온다고 하니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군대를 대야성 앞에서 물렸다. 

품석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서천을 시켜 성문을 열라고 했다. 그러자 죽죽이 말렸다. 성을 비우고 나가면 사람들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윤충이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죽죽은 윤충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전한다. “백제는 자주 번복을 잘하는 나라이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으로 적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쥐처럼 엎드려 삶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품석은 생각했다. “이놈이 백제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같이 죽자고 하고 있네. 난 못 죽어!” 죽죽의 결사항전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신 품석은 쥐처럼 꾀를 내 병사들을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백제군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안전을 확인한 후 처자와 함께 나가겠다는 심산이었다. 품석은 부하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자기 일신의 보신에만 집착했고, 누구를 희생시키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성문이 열렸다. 기죽은 병사들이 품석의 명령에 떠밀려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은 흩어져 각자의 갈 길을 갔다. 그런데 멀리서 백제군이 갑자기 나타나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무장해제한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백제군은 대야성의 신라인들을 살려두지 않으려고 했다. 백제군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자 항복협상을 주도하던 품석의 지휘권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절망의 순간에 사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성문이 닫히고 죽죽이 대야성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결사항전의 길만 남았다. 죽죽은 남은 병사들을 재조직해 성의 요소요소에 배치했고, 현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당시의 형세로서는 대야성 사람들이 온전하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죽느냐는 것만 남았다. 군인답게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적에게 포박돼 욕 속에서 참수당하느냐 문제였다. 

백제군의 파상적인 공격 속에서 병사들의 힘이 소진돼 갔다. 화살도 돌도 다 떨어졌고, 백제군이 어느 한 지점을 돌파했다. 적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 성주 품석은 처자를 데리고 지휘소에 올라가 숨었다.

대야성 내부의 곳곳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죽음의 냄새가 성안에 가득했다. 밀려오는 백제군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던 군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었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죽죽은 동료 용석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명예롭게 죽었고, 창검을 든 백제군은 계속 밀려왔다. 성안에 있던 남녀 1000명 정도가 성의 구석에 몰려 백제군의 포박을 받았다. 그 가운데는 품석과 그의 처자가 있었다. 

승리한 장군 윤충은 파발을 띄워 승전 소식을 사비의 도성에 있는 의자왕에게 알렸다. 그리고 서신에는 포로처리문제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으리라. 무엇보다 품석과 그 처자를 어떻게 할 것인지 명령 하달을 정중히 요구했다.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라 의자왕에게 확인이 필요했다. 

그동안에도 품석은 자신의 생존에 집착하면서 좋은 소식이 오길 기다렸다. 포로가 되어 백제에 끌려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고, 장인 김춘추가 어떻게 해서든지 백제에 대가를 주고 빼낼 것이다. 그는 비겁하고 철저하게 비굴하기도 한 인간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품석 아버지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의 집안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다. 

사비에서 답신이 왔다. 포로가 된 자들을 줄줄이 묶어서 백제 본토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단 대야성주와 신라왕족의 피가 흐르는 자들은 ‘몸’은 거기에 두고 ‘머리’만 가져오라고 했다. 신라왕족을 포로로 잡아 백제 백성들에게 보이면 도의상 죽이기 힘들어진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에게는 어린아이들까지 딸려 있지 않은가. 전투가 벌어져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 현장에서 처리해야 덜 잔인하게 여겨진다.

포박된 1000명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신성한 피를 가진 가족의 처형이 집행되려 하고 있었다. 품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백제가 노린 것은 자신과 가족의 머리였고, 죽음만이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사실을. 그의 앞에 군량창고에 불을 지른 부하 검일이 서 있었다. 그는 방화 후 혼란을 틈타 백제 진영으로 도망쳤고, 백제군에게 대야성의 허점을 모두 알렸다. 대야성에 대한 최후 공격에도 앞장섰다. 

검일이 만인 앞에서 품석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자결을 강요했다. 무능한 상관의 비행 그리고 분노한 부하의 배신이 가져온 비극의 한 장면이었다. 품석이 처와 자식을 먼저 죽이고 목을 찔러 자결했다. 즉시 한 가족의 몸에서 머리가 분리됐고, 소금에 절여졌다. 그리고 정갈한 나무상자에 담겨 지리산을 넘어 사비도성으로 배달됐다. 

코끝을 쥐고 머리들을 확인한 의자왕이 성왕의 영전에 그것을 바쳤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하지만 머리들은 영겁의 형벌을 받았다. 사비 감옥의 바닥에 그것을 묻어 죄수들이 밟고 지나가게 했다. 신라왕실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어김없이 드러냈다. 이로써 의자왕은 88년 전 과거를 설욕했고, 이제 막 확립된 자신의 독재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백제의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사회도 의자왕의 성취를 경이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백제) 왕도에 전달하고,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州縣)에 나누어 살게 했다. 그리고 군사를 (대야성에) 남겨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해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대야성 함락소식이 신라 왕경에 전해지자 백성들은 망국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느꼈다.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늙은 여왕은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였고, 자식과 손자가 그렇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바닥에 접질리듯 주저앉았다. 눈을 똑바로 떠 허공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죽어서 안식을 찾지 못하고 감옥의 바닥에 갇힌 자식과 손자의 원혼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했다.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그러던 차에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유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영교 중원대 박물관장 >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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