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사 137로 잘못 쓰인 걸 138로 바로 잡음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
고구려사 명장면 138
임기환 2021. 12. 9. 15:33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신라로 투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임진강을 당군 남하의 최후 저지선으로 설정하고, 평양 이남 고구려 영역을 영유하려는 애초의 목표를 포기함으로써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신라의 전략 변화가 배경이 되었다.
이렇듯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국 신라와 당 사이 전쟁에서 종속적인 변수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당전쟁의 결과가 결국 보덕국 고구려유민들의 존재 방식까지 규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구려 부흥운동을 좌절케 한 나당전쟁에서 673년 이후 전쟁의 전개와 마무리까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의 연합에 균열을 가져온 전투가 바로 672년 8월 석문(石門)전투다. 이 전투에서 대패한 신라는 이후 주장성(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요충지에 다수 성곽을 축조하면서 방어망 구축에 전력을 다하였다. <신라본기> 문무왕 13년(673년)조에 보이는 아래 축성 기사는 당시 신라인들이 얼마나 큰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8월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9월에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물론 이런 산성 축조들이 곧 닥칠지도 모를 당군의 침공으로 신라인들이 공포심에 빠졌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에 대비한다는 장기 전략과 함께, 어쩌면 풀어졌을 경각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의하면, 문무왕이 석문전투의 패배 소식을 듣고 김유신에게 대책을 묻자, "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으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 요소를 지키게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위의 산성 축조는 김유신의 제안에 따른 산성 방어망의 정비라고 할 수 있겠다. 김유신은 여전히 신라 정부의 중추였다. 그의 판단과 말 한마디는 곧바로 정책으로 실현되곤 했다.
석문전투 패배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신라군은 673년 8월에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임진강과 한강 하류에서 당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겨울철 당군의 공세에 임진강 이북의 근거지를 모두 잃어버린 고구려 부흥군을 받아들여 신라군은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때까지 당군의 주요 목표는 고구려 부흥군에 대한 공세였다. 물론 그 배후에 신라군이 있음을 진작에 알아차렸고, 석문전투에서는 아예 신라군과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으니, 당으로서도 이제는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할 때였다.
674년 정월 당 고종은 신라가 백제 영역을 차지하고, 또 고구려 부흥군을 후원한다는 점을 이유로 삼아 문무왕의 책봉 관작을 철회했다. 대신에 당시 당 장안에 있던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도록 했다. 아울러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으로 삼고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장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하여 신라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유인궤 등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을 전개한 때는 이듬해 675년 2월이었다. 즉 674년 1년 동안 기록상으로는 당군의 군사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당군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기록상 알기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1년 동안 당의 공세는 소강상태였고, 다행스럽게 신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4년(674)조 다음 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8월에는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는 영묘사 앞 길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六陣)병법을 관람하였다.
8월, 9월에 수도에서 벌인 연이은 군대 사열은 곧 서라벌 사람들에게 신라군의 자신만만한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문무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주도하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효과도 의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무렵 9월에 문무왕은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封)하였는데, 이 역시 고구려 부흥군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신라군 단독으로 당과의 전쟁을 치르겠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실 나당전쟁을 시작하고 이끌어간 중심은 문무왕과 김유신이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당제국의 거대한 힘을 직접 목도한 신라 장군과 귀족 중에는 당과의 전쟁이 무모한 선택이고 잘못된 결정이라고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개중에는 당과 내통하기도 했다. 예컨대 674년 7월 1일 김유신이 사망하자, 곧바로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나당전쟁을 시작할 때부터 끊이지 않았다. 669년에는 한성 도독 박도유가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되었고, 670년 12월에는 한성주 총관 수세(藪世)가 당군과 내통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특히 당군과 대결하는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한성주의 군사령관들이 연이어 배반하는 행적은 곧 당과의 전쟁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문무왕과 김유신 입장에서는 당과의 전쟁을 선택한 이상 이런 내부 불만과 불안해하는 민심을 잘 다독거리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673년 임진강전투에서부터 675년 매초성전투까지 신라 측 사료는 신라군의 승리로, 당측 자료는 당군의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673년 호로하(瓠濾河·임진강)전투에 대해서 '구당서' 고종본기에서는 "윤5월 정묘일(13)에 연산도 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에서 고려 반역 도당을 쳐부수니 고려 평양의 남은 무리가 신라로 달아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9월에 당 군사와 말갈(靺鞨)·거란(契丹)의 군사가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호로(瓠瀘)와 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서 죽은 당 군사는 셀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와 당이 서로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호로하전투에서 양측은 서로 적잖은 희생을 치렀던 모양이다. 물론 당측 기사는 윤5월 전투에 상대방을 고구려 부흥군으로 기록하고 있고, 신라 측 기사는 9월에 신라군의 당군 전투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호로하 유역에서 두 번의 전투가 벌어진 경우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자신의 승리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연천 전곡리 전경 : 전곡리 일대는 매초성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비정된다. /사진=문화재청
675년 매초성(買肖城)전투의 경우는 더 좋은 사례다. 양측 기록을 비교해보자.
상원 2년 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 무리를 쳐부수고, 말갈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남쪽 지역을 침략하니, 목을 베고 또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매초성(買肖城)에 주둔시키니, 세 번 싸워서 신라가 모두 패배하였다. ('신당서' 신라전)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가을 9월 29일에 이근행이 군사 20만명을 이끌고 매초성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격퇴시켰는데, 전마(戰馬) 3만380필을 얻었고 남겨놓은 병기도 비슷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이해의 전투는 674년 정월에 계림도대총관으로 임명된 당 유인궤가 1년여 뒤 2월에 임진강의 칠중성(七重城)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측 기록에서는 칠중성전투 이후 말갈군을 바닷길로 보내어 신라 경내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매초성전투다. 당측 기록에서는 이근행이 매초성에서 세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음에 반하여, 신라본기에는 20만명의 말갈군을 물리치고 전마와 병장기 다수를 전리품으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상반된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서 자세하게 검토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매초성전투에 대한 신라 측 기록에서 말갈군 20만명은 아무래도 의문이 많다는 견해가 다수다. 사실 한반도 내에서 한쪽 병력이 20만이나 되는 전투가 벌어질 지리 공간은 별로 없다. 특히 매초성 전투지가 임진강 전곡 일대로 비정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 말갈군의 전사자 기록이 없이 전리품만 기록한 점도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당측의 기록처럼 당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당측 기록에서는 이 매초성전투를 마지막으로 나당전쟁 기사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초성전투에서 당군의 승리가 확실하다면 전쟁을 여기서 종료시킬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보면, 이 전투의 실제 상황은 당군의 군사행동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는 어떤 상황이었음을 시사한다고 판단된다. 즉 양측 기록처럼 서로의 승리를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상대방에서 커다란 타격을 주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신라본기에서는 매초성전투 이외에도 천성(泉城)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당군과 말갈군과의 전투 기록을 남기고 있고, 최종적으로는 이듬해 기벌포전투로 나당전쟁 관련 기사를 마무리 짓고 있다. 이 일련의 전투 기록은 다음회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
나당전쟁과 관련하여 신라본기의 기사가 풍부하다는 점은 그만큼 신라인들이 나당전쟁 과정에서 가졌던 절실함을 반영하는 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신라본기의 기록들에는 당시 "전쟁의 승리"를 절박하게 기원하는 신라인들 심성의 흔적들이 배어 있다고 보인다. 역사 기록을 당대인의 심성으로 들여다볼 때 좀 더 생생하게 읽히는 좋은 사례가 바로 나당전쟁이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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