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11241725545&code=900306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41) 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1.24 17:25 수정 : 2009.11.25 10:34
구한말 민영환을 흔든 ‘근대화 기적소리’
안개 낀 아마자르 역에 정차. 2009년 7월6일.
세상에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이 수없이 많다. 크게는 육로와 바닷길, 하늘길이 있으며, 이러한 큰 길에서 뻗어나간 갓길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개척으로부터 이용하기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연을 안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문명의 소통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길을 고르라면 단연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첫 물망에 오를 것이다. ‘철마’(열차)를 타고 이 길에 오를 때마다 그 경이로운 연혁과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일행은 그 길의 한복판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으로 노보시비르스크를 향해 달리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속에 점점이 박혀있는 고즈넉한 마을과 도시, 갖가지 파스텔 색깔로 아름답게 단장한 기차역, 수많은 심산계곡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과 철교…. 이 모든 것이 이 길이 간직한 어제와 오늘을 고스란히 속삭여주고 있는 성싶다. 옴스크에서 노보시비리스크까지의 600여㎞ 구간은 전 구간에서 가장 평탄한 직선 구간으로서 사색과 상념에 너비와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이 횡단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이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구내에 들어서면 ‘9288’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념탑이 눈에 띈다. 그 숫자가 바로 시발역인 모스크바 역(모스크바에는 목적지 이름을 딴 7개 역이 있음)에서 종착역인 태평양 연안의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의 거리가 무려 9288㎞나 됨을 나타내는 이정탑이다. 이 거리는 지구 둘레의 약 3분에 1에 해당하며, 서울에서 부산까지 22번 이상 오가는 거리이다. 시속 80~90㎞의 열차로 이 거리를 답파하는 데만도 꼬박 6박7일, 156시간이 걸린다. 달리는 동안 시간대는 일곱 번이나 바뀌며,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는 11시간의 시차가 생긴다. 그래서 모든 역에는 현지 시간과 표준시간인 모스크바 시간을 알리기 위해 특수 제작한 ‘철도 시계’가 걸려 있다. 이 철도는 인구가 100만명을 넘는 5개 도시(모스크바, 페름, 예카테린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 옴스크)를 비롯해 9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가며, 약 50개 역에 정차한다. 두 대륙을 잇는 이 철도는 우랄산맥 기슭에 자리한 페르보우랄스크를 경계로 아시아와 유럽의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아시아쪽 길이(7512㎞, 81%)는 유럽쪽 길이(1777㎞, 19%)에 비해 근 4.3배나 더 길다. 그래서 아시아쪽에 있는 시베리아 이름을 따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철도는 강폭이 2㎞에 달하는 아무르 강을 비롯해 볼가, 오브, 예니세이, 레나 등 16개의 강을 건너간다.
이러한 몇 가지 수치만으로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어마어마한 모습과 대역사(大役事)를 헤아리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인간 창조의 기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이 철도의 부설 아이디어로부터 시공과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25년간(1891~1916)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극복과 고투의 과정이다. 처음부터 예산 부족을 이유로 하는 재정부의 반대에 부딪힌다. 10년 넘게 공전하던 철도 부설 구상은 마침내 1891년 3월 알렉산드르 3세가 건설에 관한 칙령을 공포함으로써 현실로 옮겨지기 시작한다. 이 시작을 고했다는 공로가 인정되어 1908년 이르쿠츠크의 앙가라 강변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철거되었다가 2003년 복원되었다. 앞면에는 러시아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뒷면에는 당시 철도 건설을 적극 지지했던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의 얼굴상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철도 건설 사업을 향년 23세의 젊은 황태자 니콜라이에게 일임한다. 후일 니콜라이 2세로 즉위한 황태자는 칙령이 공포된 두 달 후에 철도 착공식을 주관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오스트리아와 그리스, 홍콩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에 상륙해 시가현(滋賀縣) 소재지인 오쓰(大津)를 관광하다가 한 경찰관의 저격을 받는다. 이른바 ‘오쓰 사건’이다. 메이지 천황의 환대 속에 한 달 남짓 보내다가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1891년 5월31일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철도 기공식 테이프를 끊는다. 세 달이나 걸려 환국한 황태자는 시베리아철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철도 건설 전반을 진두지휘한다. 그러나 철도 완공 4개월 후에 일어난 2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예카테린부르크에 유폐되었다가 끝내는 일가족과 함께 암살을 당하고마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가 된다.
비록 착공은 했지만 갈 길은 첩첩태산이다. 당초 이 긴 철도를 1년 반 만에 완공한다는 모험적인 계획을 세우고 공기 단축을 위해 전체 노선을 6개의 공구로 나눠 동시에 착수한다. 그러나 노선의 반 이상이 측량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되다보니 홍수 다발 지역에 선로가 건설되고 산사태로 노반이 파묻히며 동토가 녹아 선로가 물에 잠기는 일이 다반사다. 공기 단축을 위해 레일의 중량을 기준의 절반으로 낮춘 결과 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침목이 부식되기 일쑤다. 터널 건설을 피하다 보니 급경사나 곡선 반경이 작은 구간이 많아져 열차가 속도를 낼 수 없다. 그러다보니 개통 첫해엔 하루에 세 건꼴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인구가 희박한 시베리아에서 작업 인부를 구하는 일은 큰 난제의 하나였다. 인부 가운데 29%만이 현지인이고, 나머지는 유배 죄수들이나 중국인들이고 가끔 한인들도 끼었다. 인부들의 작업환경이나 생활환경은 극도로 열악하다. 여기에 인종차별마저 겹쳐 외국인 한 달 보수는 러시아인의 절반밖에 안 되는 45루블에 불과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의 총 길이가 9288㎞임을 알리는 이정탑. 블라디보스토크 역내.
게다가 주먹구구식 계획 때문에 실제 건설비용은 계획치를 크게 웃돌았다. 5월까지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동토에서의 건설비는 치솟을 수밖에 없다. 당초 3억2500만루블(약 1억7000만달러)로 잡은 건설비가 약 10억루블로 3배 이상 늘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99년부터 3년간 무서운 페스트와 콜레라가 번져 인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건설 기간 사고와 질병에 죽어간 사람은 무려 1만명에 달한다. 하바로프스크의 영웅광장 한 귀퉁이에는 연도별로 희생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다. 여기에 더해 1900년 중국 전역을 휩쓴 의화단 봉기에 영합한 중국 인부들은 이미 건설한 선로 700㎞를 마구 파괴한다. 비용은 엄청나게 치솟는 반면에 수요는 예측치에 턱없이 못 미친다. 그래서 기공한 지 10년이 되었는데도 공사는 겨우 절반밖에 진척되지 않아 결국 완공까지는 2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숱한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개통된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지난 90여년 동안 러시아의 개발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소통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열차의 기적 소리는 ‘잠자는 미인’ 시베리아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러시아는 16세기의 동방 진출을 계기로 시베리아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교통의 불편과 주변국들의 간섭 등으로 인해 실제적 통치권은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머나먼 낯선 땅 시베리아를 러시아 제국에 실제적으로 통합시킬 수가 있게 되었다. 러시아는 재빠르게 시베리아의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총독 등 현지 행정관들을 파견한다. 풍부한 자원 개발이 가속화되고 농업과 상업이 붐을 이루며 이주민도 크게 늘어난다. 건설공사가 시작된 1891년 무렵 500만명이던 시베리아 인구가 20년이 좀 지난 1914년에는 2배 이상으로 급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사관이나 무역대표부 등 외국 주재기관이 신설되고 외국 금융과 투자 활동이 활성화됨으로써 세계를 향한 시베리아의 문은 열리기 시작한다.
오늘날 며칠씩 이 철도를 질주하는 열차를 타도 별로 피곤하지 않고 쾌적함을 느끼는 것은 철도의 현대화, 특히 장대(長大) 레일화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전 구간에 걸쳐 철도의 복선화가 1937년에 끝난 데 이어 2002년까지는 전철화가 이루어졌으며 광섬유 케이블 설치작업도 마무리되었다. 길이가 25m인 레일 여덟 개까지 이어서 하나의 레일로 만드는 이른바 ‘장대 레일화’가 전 노선의 45%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증기 동력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리던 그런 옛날의 열차가 아니라, 장대 레일 위로 전기 동력에 의해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현대판 열차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수송량도 끊임없이 늘어난다.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의 개념에서 보면, 일행이 몸담고 있는 이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초원로 상의 ‘철의 실크로드’이다. 이 길은 일찍부터 우리와 러시아나 유럽을 연결해주는, 소통시켜주는 가교이다. 한반도의 종단철도(TKR)는 크게 경원선과 경의선(만주횡단철도를 통해)의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이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러나 오늘은 저주로운 분단의 철책에 가로막혀 그 이어짐과 오감은 뚝 멎고 말았다. 다시 그 열림을 애타게 바라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길을 오간 사람들의 족적을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작업인부로서 철도 건설에 참여한 동포 한인들의 피맺힌 자국이 어디엔가 찍혀있을 것이며, 20세기 초반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이 길을 오갔을 터이고, 더러는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의 전 구간을 답파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다행히 민영환(閔泳煥, 1861~1905년)이 남긴 <해천추범(海天秋帆)>(한말)이란 책이 있어 그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민영환은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다. 윤치호 등 일행 네 명과 함께 떠난 사절단은 중국과 일본, 캐나다와 미국을 경유해 영국과 아일랜드,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등 10개 나라를 지나는 먼 길을 에돌아 출발 6개월 21일, 총 204일 만에 목적지 러시아에 도착한다. 귀국할 때는 착공한 지 5년밖에 안 되는 초기의 철도 부설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때로는 갓 시동한 기차를 타고 이 길의 연로(沿路)를 따른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세계 일주자이자 최초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이용자이다. 이 대장정의 기록을 담은 기행문이 바로 그의 <해천추범>이다. ‘해천추범’이란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라는 뜻으로서, 이런 뜻을 책 제목으로 택한 데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부심했던 그의 사색과 고민이 배어있다.
하바로프스크 역 외경.
민영환은 8월20일 마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떠나 10월10일 기차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장장 50일 간의 긴 여행이다. 일기체로 쓴 그의 기행문에는 총 83구간 사이의 거리와 지명을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 노정은 마차를 타고 강은 배로 건너며 단 세 구간만 기차로 지난다. 그들의 여행은 한마디로 고행이다. ‘길은 험하고 질척거려 차가 매우 흔들리니 사람은 피곤하고 말은 기운이 빠졌다.’ 수십 일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니 그 괴로움과 번민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기차라고 잡아탔는데 바퀴가 훼손되어 ‘나아감이 매우 느려서’ 주야에 겨우 314리(약 126㎞)를 달렸다. 이러한 고행을 그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령(皇靈, 황제의 영험)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은전을 오매불망한다. 대행황후(大行皇后, 명성황후)의 기신(忌辰, 망자의 생전 생일) 새벽에는 선방(船房)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향을 피우며 공복(公服)을 입고 동녘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나서는 서로 마주보며 감회의 눈물을 흘린다. 극동지역에서 만난 교포 유민들에게는 고국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현지 러시아 관찰사를 찾아가서는 그들을 보호해달라는 청을 드린다. 애국애족의 충정이다. 이것이 초원로의 대동맥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누비는 우리들에게 주는 <해천추범>의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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