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의 지나친 방어 ‘역효과 불렀다’
국정조사가 맥없이 마무리된 가운데 여론은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쪽으로 기운다. 새누리당에 매번 당한 민주당 처지에선 의외의 반전이다. 새누리당의 지나친 방어가 역효과를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
천관율 기자  |  yul@sisain.co.kr [311호] 승인 2013.09.02  08:32:38
국정조사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로 들어선 8월20일, <중앙일보> 계열 종편채널 JTBC가 주목할 만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JTBC 보도를 보면, 지난해 대선에서 국가정보원이 선거 개입을 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50.1%가 ‘그렇다’고 답했다. ‘없었다’ 27.1%, ‘잘 모르겠다’ 22.8%였다.

또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에서 축소·은폐 시도가 있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도 ‘있었다’ 55.7%, ‘없었다’ 23.2%로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 21.1%였다. 전국 성인 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조사한 결과다.

야권에서 쓰는 말 중에 ‘마의 30%’라는 말이 있다. 정국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도 결국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주는 고정 지지층 30%를 야권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JTBC 조사를 보면, 국정원 선거 개입과 경찰의 축소·은폐라는 두 핵심 이슈에서 모두 이 ‘마의 30%’가 무너졌다. 여론은 선거 개입과 축소·은폐 둘 다를 대체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결과는 묘하다. 국정조사를 지켜본 여론주도층 사이에서는 민주당 무능론이 널리 퍼져 있다. ‘새누리당은 나쁘고 민주당은 무능하다’는 정서다. 그런데도 여론은 국정조사 결과가 대체로 ‘야권의 승리’라는 판정을 내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8월21일 국정원 국정조사가 야당 의원들만 참석한 채 열렸다.
8월21일 국정원 국정조사가 야당 의원들만 참석한 채 열렸다. ⓒ시사IN 조남진

민주당이 ‘결정적 한 방’을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국정조사 기간 내내 새누리당의 각종 ‘버티기’ 전략에 거의 매번 당했다는 평도 근거가 제법 있다. 민주당 내부 전열도 일사불란한 것은 아니었다. 국정조사 이전까지 이 이슈는 민주당에서 ‘친노 이슈’ 취급을 당했다. 당 지도부는 크게 내켜하지 않는 기류가 있었다. 국정조사 위원단과 당 지도부가 정보와 전략 공유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징후도 곳곳에 있었다. ‘좌초’ 가능성이 높은 구도였다.

어디에서 ‘반전’이 있었던 걸까. 민주당의 한 중립 성향 수도권 의원은 “반전이 없었던 것이 반전이었다”라고 답했다. 무슨 뜻일까. “사실 국조에서 우리가 계속 저쪽에 말렸지. 김현·진선미 내주고 시작하고, 국정원 국조 비공개 받아주고, ‘여름휴가’ 운운하는 수모당하고, 김무성·권영세 결국 못 불렀고, 걸핏하면 회의장 뛰쳐나가도 속수무책이었고…. 한 장면씩만 보면 계속 당한 게 맞다.” 민주당 무능론. 여기까지가 정치 고관심층의 일반론이다. 

“그런데 여론은 여의도 선수들처럼 장면마다 채점해서 합산하는 게 아니더라. 전체 인상을 보고 ‘아, 어느 쪽이 뒤가 구린가 보다’ 이걸로 판단한다. 그러니까 모든 장면마다 새누리당이 수비를 ‘너무’ 잘한 거야. 그러면 여론은, 저렇게 필사적으로 수비하는 쪽이 뭔가 있나 보다 하게 된다.” 이 의원은 특히 결정적이었던 장면으로 원세훈·김용판 두 핵심 증인의 선서 거부를 들었다. “그 장면도 우리가 당한 장면이지. 제대로 추궁도 못했으니. 그런데 여론은 그 대목에서 결정적으로 누가 뒤가 구린 쪽인지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아, 선서도 못하는 걸 보니 뭐가 있는 게 맞나 보다’ 이거지.”

민주당 강경 기류, 10월 재·보선 의식

새누리당이 민주당과의 ‘전투’에서 판판이 이기는 동안, 여론전이라는 큰 ‘전쟁’에서는, “저리 필사적인 것을 보니 뭔가 있나 보다”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는 분석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당의 국정조사는 ‘새누리당에 말리고 벽에 막히는 모습’을 최대한 자주, 지속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여론을 움직인 셈이다.

“이제 와서 보면, 저쪽이 너무 다 이기려고 했어. 법조인들만 잔뜩 모아놓더니, 이게 정말로 상대를 깨면 되는 재판인 줄 알았나 봐.” 법조인 출신 정치인 중에는, 정치가 ‘상대를 꺾는 일’이 아니라 ‘관중을 감동시키는 일’이라는 포인트를 놓쳐서 큰 판을 그르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새누리당 국조특위 위원 9명 중 법조인 출신이 5명이다. 민주당은 신기남 위원장을 제외하면 7명 중 2명이 법조인 출신이다. 8월19일 국정조사 중 법리해석상의 논쟁이 붙자 새누리당 권성동 간사는 “국민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권성동의 법 해석을 믿을까요, 박영선 의원의 해석을 믿을까요?”라고 야유해 ‘법조인 유전자’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신주류 핵심으로 꼽히는 새누리당의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또 다른 포인트를 짚었다. “원래 단임 대통령이 최강일 때가 임기 첫해라는 건데, 요 몇 차례 정권을 보면 이 임기 첫해가 이상하게 취약하다. 단임제 대선이라는 거대한 전쟁을 치른 에너지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아서 대선의 ‘여진’이 계속 남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때 대선자금 수사, 이명박 대통령 때 촛불집회, 그리고 지금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가 다 그렇다. 이러면 대통령은 통합의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친정체제를 강화해 ‘돌파’하고픈 유혹을 느낀다. MB가 ‘올드보이’들을 전진 배치한 것이 촛불 이후고, 박 대통령이 원로 측근 그룹인 김기춘 비서실장 카드를 뽑은 것도 비슷하다.” 국정조사 정국이 일종의 ‘대선 연장전’을 불러왔다는 가설이다.

국정조사가 진행되면서 대선 당시의 첨예한 전선 일부가 되살아났고, 이는 임기 첫해 대통령의 통치 동력에 많든 적든 상처를 낸다. 야권이 움직일 공간이 때 이르게 열리게 된다.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파트너의 ‘격’을 올리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국정조사로 대선 전선 일부가 부활하면서 민주당은 이른바 ‘안철수 변수’에 대한 걱정도 좀 덜었다는 표정이다. ‘대선 연장전’ 구도에서는 제3 세력이 낄 공간이 극히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국정원 국정조사에 대한 민주당 내부의 평가가 나쁘지만은 않다. 국정조사와 연계해 시작했던 장외 투쟁도 당분간 이어갈 동력을 확보했다는 내부 평가다. 8월22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는 장외 투쟁의 수위를 높이자는 강경 발언이 주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날 의총에서는 김한길 대표도 “장외 투쟁의 강도를 높이겠다”라고 말했다. 예산안 결산 거부와 같은 원내에서의 강경책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는 있지만 우선순위가 높지는 않다. 다만 장기적으로 청와대의 양보가 없을 경우 일종의 ‘원내 태업’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많다는 분위기다.

말뿐 아니라 실제 기류가 강경해졌다는 징후도 곳곳에 보인다. 지도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한 민주당 전략통은 “김한길 대표가 10월 재·보선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김 대표도 본인이 당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10월 재·보선 결과가 나쁘면 또다시 조기 전당대회론이 올라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국면에서 아무 성과도 없이 장외 투쟁을 접는다? 우리 지지층이 전부 이완되고 10월에 투표 안 해버린다.” 검찰과 법원의 생리를 잘 아는 한 법조계 출신 민주당 의원은, 지속적으로 여론 압박 강도를 높여야만 법원도 10월 재·보선 대상에 걸린 지역의 재판을 빠르게 진행할 것이라 조언했다고 한다. 

김한길 지도부가 근본적으로 당내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청와대와 여당의 어지간한 양보로는 김 대표도 당 내부를 설득하기가 어렵다. 반면 청와대로서도 유감 표명과 같은 제스처가 정권 정통성 문제와 직결되므로 쉽게 양보할 수 없다. 청와대와 야당 사이에 낀 새누리당은 정치력이 실종되다시피 했다. 꼬인 정국을 풀어줄 주체가 잘 손에 잡히지 않는 국면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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