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297


제주 4·3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그리고 ‘가짜뉴스’

[ 기고 ]

고승우 언론사회학 박사 media@mediatoday.co.kr 승인 2020.04.03 15:44


제주 4·3은 이름이 아직 없다고 말한다. 또한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제주 4·3은 수년간 지속된 데다 보는 각도에 따라 판이한 해석이나 평가가 나오기 때문이다. 전체를 아우르는 큰 틀의 설명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군정하에서 발생했고 미군정은 미국 본국 정부의 동북아 전략의 지침을 이행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변수가 빠졌을 때 제주 4·3은 동족간의 처절한 살육 그에 따른 대량 학살 등이 부각되는 참극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제주 4·3은 그 진실이 아직 확실하게 공적으로 규명되지 않았고 그 완전한 해결의 기반이 되는 배상과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한 어둠은 아니다. 제주 4.3은 특별법이 제정되어, 4·3 영령들은 국가폭력과 이념에 희생된 것으로 자리매김 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역사의 연장이다. 제주 4·3이 주목되는 또 다른 이유다. 오늘날 제주 강정해군 기지가 미국의 중국을 겨냥한 해군전략 기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제주 4·3에서 미국이 왜 친일경찰 등을 동원해 제주도를 피바다로 만들려 했는지의 원인을 규명할 필요는 더 커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3일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 72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진정한 명예회복 등을 위한 4·3 특별법 개정을 강조하면서 “제주 4·3이라는 원점으로 돌아가 그날, 그 학살의 현장에서 무엇이 날조되고 무엇이 우리에게 굴레를 씌우고 무엇이 제주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72년간 우리를 괴롭힌 반목과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추모사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데 특히 제주 4·3의 진실을 밝힐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아직 그 실체가 명료하지 않은 미국이라는 요인을 햇빛 속으로 드러내야 한다. 거기에는 미국 중앙정부가 70 여 년 전 남한의 미군정 당국을 앞세워 제주 4·3을 어떻게 규정하고 골육상쟁을 부추겼는지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행해져야 한다. 제주 4·3의 진실, 그 핵심 원인 등은 그래야 밝혀질 수 있다. 


▲ KTV 제72주년 4·3희생자 추념식 방송 갈무리.

 

2차 대전 종전 이전 미국의 동북아 전략 


2차 대전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모택동의 공산당이 세력을 넓혀가는 동안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하기 위해 갖가지 대책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미국이 1937~1948년에 국민당 정권에 제공한 금액은 46억110만달러로 이 돈은 공산당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1945년 8월 당시, 국민당 군대의 253개 사단 중에서 39개 사단은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다. 미국은 또한 중국 방면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의 육·해·공군이 국민당 군대를 중국대륙 이곳저곳으로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미군은 국공내전에서 미군 전투병도 중국 현지에 파견했다. 1945년 8월에서 12월까지 10만명의 미군이 황하 지역에 투입되어 국민당을 지원했다. 또 국민당이 불리한 지역에는 미 해병대가 급파되어 공산당의 기를 꺾어놓기도 했다. 국민당 군대가 코너에 몰린 지역인 상해·청도·천진 등에 5만 명의 미 해병대가 급파된 것은 국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긴급조치였다. 


[ 관련기사 : 오마이뉴스) 왜 미국은 중국에서 패배한 사실을 쉬쉬할까


미국이 1945년 8월 일본에 두 발의 핵폭탄을 투하한 것은 유럽 전선의 소련군이 만주 일대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동북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질 가능성을 차단하고,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종식시켜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대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중국에서 모택동 세력이 강세를 보이자 소련군이 중국 등지에서 일본군을 패퇴시킬 경우 공산주의 세력이 막강해질 것을 우려했고 종전 후 일본을 우군으로 삼아 저지한다는 동북아 전략의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미극동사령부가 천왕의 전쟁범죄를 묻지 않고 전범 처리도 극소수에 그치게 한 것은 물론 미국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한 것은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견제할 반공 교두보로 삼으려는 목표가 숨어 있었다. 


미군은 남한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뒤 군정을 실시하면서 남한의 치안 확보를 이유로 일제경찰 출신 한국인 상당수를 경찰로 채용했지만 독립유공자 출신은 극소수였다. 통계에 따르면 미군정 기간 동안 전체 2만5000명의 경찰관 중 일제경찰 출신이 5000여명으로 전체 20% 이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단 15 명만이 경찰에 투신했던 것으로 조사됐다<파이낸셜뉴스 2018년 11월7일/연합뉴스 2018년 12월2일>. 경찰의 구조는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중용하면서 친일경찰이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제주 4·3 발생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오늘날 토착왜구 논란의 1차적 원인 제공은 미국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부분이다. 


미군정은 1947년 3·1 기념식 후 제주도민 수만 명이 모인 집회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한 불상사가 발생해 전체 도민이 총파업으로써 항의했을 때, 발포에 대한 사과가 아니라 경찰과 극우단체의 제주도민에 대한 체포와 테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도록 조치했다. 미군정은 그 다음해 발생한 제주 4·3에 대해 친일경찰이 ‘공산주의 세력의 준동’이라고 보고하자 이를 받아들여 대대적인 탄압을 펴도록 했다. 미군정은 이어 제주 일부지역에서 5·10선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4월5일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했다. 동시에 제주도 도령을 공표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  


미군정은 제주 4·3 발생 초기부터 초토화 작전을 폈다. 이를 위해 미군 정찰기가 제주도 상공을 수시로 정찰했으며, 함대가 제주도를 봉쇄했고 통신부대의 촬영은 미국의 편의에 따라 편집했다<MBC 교양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회 ‘제주 4·3 사건’ 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미군정이 종식된 뒤 미국은  1948년 8월 24일에 체결된 한미군사협정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보유했고, 제주 4·3 진압작전을 위해 미군의 무기와 정찰기 등을 지원했다.  


미국은 제주 4·3이 발생 이후 제주에 소련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가짜뉴스 등을 근거로 제주 4·3 학살의 당위성을 부여했고,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알고도 우려를 표하기 보다는 공산주의자 제거를 명분으로 진압을 격려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헤드라인제주. 2018년 10월4일>. 허호준 한겨레신문 부국장은 2018년 10월4일 열린 ‘제주 4·3, 진실과 정의-지속가능한 정의를 향해’ 제주4·3 제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제주 4·3의 전개와 미국의 역할’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일으킨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 발발의 직접 원인은 경찰과 극우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항거와 5월10일 치러진 제헌국회선거, 이른바 ‘5·10선거‘의 반대였다. 미군정은 5·10선거의 성공적인 실시를 한반도 점령기간에 수행하게 될 핵심사안으로 인식하고, 제주도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고 설명했다.


허 부국장은 제주 4·3의 전개과정에서 소련 연계설로 등장하는 것이 소련 잠수한 ‘출현설’로 “잠수함이 제주도 연안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나올때 마다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면서 “이러한 정보보고나 언론보도는 모두 가짜로 판명됐고, 이런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이자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간주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며 이 ‘가짜뉴스’가 당시 미 당국 관계자들에게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여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제주 4·3 책임론은 70주년이 된 2018년에야 공식 제기되었다. 제주 4·3 희생자유족회,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70주년범국민위원회 회원들은 2018년 10월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맞은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촉구하는 10만인 서명 성명서를 공개한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포괄적인 책임은 친일파 재등용과 국내 정치세력의 폭력적 재편, 단독정부 수립 강행 등 미국의 점령체제와 점령정책 자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47년 3·1절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인한 인명살상 △이에 항의하는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연행 등 대탄압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이후 평화적 해결의 길을 거부하고 무력충돌의 격화와 대규모 희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강경진압정책 선택 △5·10 단독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 선거 무산 이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파견된 브라운 대령의 강경진압 작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군에 대한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 군사고문단이 1948년 가을 이후의 무차별 대량학살을 제어하기는커녕 초토화 작전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학살을 부추긴 사실 등 5가지를 제주4·3에 대해 미국이 법률적, 정치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으로 제시했다.


또한, 그해 4월3일 민중당은 논평을 통해 “4·3은 미군정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민족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제주도민의 항쟁이었다. 또한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양민학살 범죄였다. 미국은 7년7개월에 걸쳐 이승만 정권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을 동원해 (제주도) 주민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의 양민을 참혹하게 학살했다”고 지적하면서 “분단을 획책하며 무고한 양민을 3만여 명이나 학살했던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명백히 밝혀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밝혔다. 


제주 4·3이 발생 후 수십 년이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제주 강정마을이 해군기지 후보지로 확정되었다. 이후 강정마을회 등 평화운동 진영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완공된 제주 해군기지에 2017년 외국 함정으로는 처음으로 입항한 것은 공교롭게도 미 해군 이지스구축함 스테뎀함(USS Stethem)이었다<연합뉴스 2017년 3월28일>. 이를 바라보는 일부 제주도민들은 미 해군의 차세대 이지스구축함인 ‘줌월트(DDG-1000)’나 항공모함의 기항으로 이어져 제주도가 미국 해군의 중국 전초 기지로 전락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 규명되기도 전에 제주도가 강대국들은 패권다툼에 희생될지 모른다는 가능성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냐 하는 걱정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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