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39813


40년 후 광주 할머니와의 약속 지킨 미국 청년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②] 폴 코트라이트 회고록 <5.18 푸른 눈의 목격자>

20.05.13 11:27 l 최종 업데이트 20.05.13 11:27 l 소중한(extremes88)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인 2020년, <오마이뉴스>는 '평화봉사단'에 주목했다. 항쟁의 복판에 있었던 '증인'들의 이야기를 연속 보도한다.[편집자말]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계엄군이 광주를 다시 점령한 5월 27일, 전남도청 인근의 시위대가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증인'이란 위치는 모순에 둘러싸여 있다. 증인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다. 의도를 갖고 증인이 되는 사람은 없다. '우연'이 동반된다. 증인은 '되는' 것이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증인은 수동적이다.


그렇게 증인이 된 이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은 것을 증언할지 아니면 침묵할지. 그게 증인이 맞닥뜨리는 '필연'이다. 증언이든 침묵이든 그것은 '하는' 것이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증인은 능동적이다.


따라서 증인이란 자리는 결코 쉬운 위치가 아니다. 의도치 않게 선 그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극단(증언하든, 침묵하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침묵하는 삶도, 증언하는 삶도 증인을 괴롭히긴 마찬가지다. 특히 누군가를 위해 증언하는 삶은 더욱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


▲  폴 코트라이트가 쓴 <5.18 푸른 눈의 증인> 국문판과 영문판 . 두 책은 5.18 40주년을 맞아 동시 출간됐다. ⓒ 한림출판사

 

<5.18 푸른 눈의 증인>(한림출판사)이란 책은 40년 전 의도치 않게 증인이 된 인물의 회고록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은 5.18민주화운동이라 부르는 그 사건을 목격한 외국인이 이 책의 저자다. 5.18 40주년을 맞아 국문·영문판이 동시 출간됐다(영문판 제목은 < Witnessing Gwangju >).


저자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1979~1981년 전남 나주의 호혜원(한센병 정착촌)에서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활동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로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돼 교육, 의료, 농수산기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전남도청 인근에 마련된 임시 분향소에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회고록 속의 코트라이트는 증인이 져야 할 무게를 잘 아는 듯했다. 증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부조리를 폭로하는 영웅'이 아닌 '혼란 속에 방황하는 목격자'였다. 이런저런 꿈을 품은 평범한 20대 청년은 의도치 않게 역사의 격랑을 마주한 증인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야 올 수 있는 작은 나라에서 말이다.

 

"계엄령 철회와 전두환 퇴진 요구 현수막이 걸린 시위대 버스에 탄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이 돌아다닌다면, (중략)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를 생각하니 아찔했다."

 

저자는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마저 아주 상세히 묘사했다. 이 때문에 증인으로서의 코트라이트를 더욱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엔 과장이나 비약이 없다. 실제로 코트라이트는 철저히 자신이 남긴 기록에 의존해 이 회고록을 썼다. 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기 위해, 출간 전 한국을 찾아 답사에 나서기도 했다.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시민들이 매장 전 나란히 놓여 있는 관을 내려다보고 있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5.18과 직접 연관되진 않아도, 아래와 같은 세부적인 내용은 그가 쓴 책 전체의 신뢰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기록이 기억과 융화됐을 때 갖는 힘이다.

 

"(5월 15일) 나는 빈 (라면) 그릇과 젓가락을 아주머니에게 건네며 물었다. '얼마죠?' '200원이에요.' (중략) 52번 버스를 탔는데, 기사가 차도로 들어가려고 핸들을 틀었기 때문에 불안한 자세로 통로 중간으로 들어섰다."


"(5월 23일) 우리는 이불을 개어서 벽 옆에 정돈했다. 아주머니는 아침상을 벌써 준비해놓았다. (중략) 쌀밥, 김치, 김, 콩나물 등이 놓여 있었다. (중략) 국그릇에서는 찬 아침 공기 때문에 미역국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중략) 김치는 '물김치'였는데, 투명하면서 매운 국물에 약간의 채소를 섞은 김치이다."


"(5월 21일)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싶었고, 다른 관점에서 이 일을 보고 싶었다. 과연 내가 본 것, 들은 것이 전부일까? 내가 놓친 것들은 없을까? 나는 (가수) 다이어 스트레이트의 카세트테이프를 뒤집었다."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체육관을 가득 메운 문상객과 관이 항쟁의 격렬함과 잔혹함을 분명히 보여 준다. 관 앞에 선 채 문상하고 있는 세 학생의 모습이 애처롭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그의 13일

 

저자는 날짜 순서대로 자신이 겪은 13일 동안의 일을 서술하고 있다. 5월 14일부터 5월 26일까지, 그러니까 항쟁이 시작된 날(5월 18일)의 나흘 전부터, 항쟁이 끝나는 날(5월 27일)의 전날까지가 이 책에 기록돼 있다.


그는 한센인과 함께 터미널에 갔다가 처음 군인의 폭력을 목격했고, 편지를 부치러 간 우체국에선 코앞에 떨어진 최루탄과 마주했다. 이후 넘어진 버스에 새겨진 총알구멍과 핏자국에 충격을 받았고, 외신기자들과 함께 간 병원에서 시신들을 목격했다. 또한 전화가 끊겨 외부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고, 탱크와 군인의 총구에 막혀 돌고 돌아 산을 넘어서야 광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  나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사진은 나주에서 근무하던 폴 코트라이트의 모습. ⓒ 폴 코트라이트 제공

 

이렇듯 켜켜이 쌓인 경험은 그를 점점 증인의 위치에 놓이도록 만들었다. 특히 그는 5월 20일 충장로에서 어느 할머니와 만난 일을 떠올리며 "내 의사와 관계없이 나는 이미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라고 썼다.

 

"할머니를 부축해 가까운 가게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원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내 팔을 꽉 잡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우리는 여기를 알릴 방법이 없어. 자네는 봤지? 자네가 본 것을 다른 나라 사람에게 꼭 알려주게.' (중략) 그 순간부터 나는 '증인'이 되어야 했고, 그 할머니는 피할 수 없는 큰 과제를 내게 주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주었던 과제를 하지 못했고 40년이 지난 이제야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이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란다."

 

책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최용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은 대표적으로 "5월 21일 나주의 남평에 있는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의미 있는 장면으로 꼽았다.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시민군이 사용하던 무기는 회수돼 전남도청 건물에 보관됐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군중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하다는 측과 군인들의 보복이 우려되기 때문에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측으로 확연하게 갈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까지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어느 편에 서 있든, 그들의 몸짓과 말은 자신들이 성취한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중략) 그때, 어느 노인이 앞으로 나와 무기 더미에서 총을 하나 잡더니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무기를 반납하면 그놈들은 이 무기를 이용해서 우리를 죽일 겁니다. 이 무기들을 전부 부숴버립시다." (중략) 정의를 위한 파괴 작업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지막 소총이 망가뜨려지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는 당시의 사건이 폭동이 아닌 항쟁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은 무장을 평화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례처럼 무기를 부숴버렸든, 광주 지역에서처럼 총을 들었든 시위 참가자들은 저마다 무장에 대한 관점이 명확했다. 실제로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물러난 5월 21일 이후,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해 필요한 경우에만 반출했다.


"내가 목격한 것은..."

 

▲  폴 코트라이트의 회고록 <5.18 푸른 눈의 증인>에 실린 로빈 모이어의 사진. 가족의 관을 가져가기 위해 시신 보관소를 찾은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로빈 모이어(한림출판사 제공)

 

이 책에 실린 사진 또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항쟁 곳곳의 컬러 사진이 책에 담겨 있는데 이는 당시 <타임> 사진기자 자격으로 광주에 와 있었던 로빈 모이어(Robin Moyer)가 찍은 것이다.


코트라이트가 모이어의 취재를 도우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다. 실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한국어를 할 수 있었던 코트라이트는 모이어를 여러 현장으로 안내했고 간단한 통역을 맡기도 했다. 모이어가 당시 찍었던 사진은 코트라이트의 회고록을 통해 최초 공개되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코트라이트는 4월 중에 <오마이뉴스>와 만날 예정이었다. 그는 인터뷰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5.18을 증언하는 것에 의무감을 갖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인터뷰 일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이메일 통해 그는 이같이 전해왔다.


"5.18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내가 보고 듣고 목격한 모든 것은 '5.18이 전두환 군부 세력의 학살에 대응한 민중들의 봉기였다'는 견해를 뒷받침해 줄 것이다. 회고록을 쓴 이유 중 하나는 5.18 당시 광주의 특징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서로를 지지했고, 공동의 선을 위해 희생했다. 또 광주시민들이 우리를 보호했다. 이는 인정되고 기념돼야 한다. 당신은 한국인으로서 (5.18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5.18 40주년 특집 - 이방인의 증언]

①-1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①-2 계엄군 곤봉에 맞은 미국인 http://omn.kr/1nj2u

 

▲  나주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했던 폴 코트라이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의 참상을 목격했다. ⓒ 폴 코트라이트 제공

 

덧붙이는 글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