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t/view.do?levelId=ht_001_0050_0010_0020


나. 석탈해 신화


다음으로 신라 석씨 왕실의 시조인 석탈해 신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석탈해 신화는 박혁거세 신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석탈해 신화 역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전한다. 먼저 『삼국사기』에 전하는 석탈해 신화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 『삼국사기』 신라 본기 소재 석탈해 신화


〔사료 4-1-04〕 『삼국사기』 권 1 신라 본기 탈해왕


(가) 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 또는 토해(吐解))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때 나이 62세였다. 성은 석(昔)씨이고 왕비는 아효 부인(阿孝 夫人)이었다.


(나) 탈해는 본래 다파나 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는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에서 동북쪽 1천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앞서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이 되어 큰 알을 낳았다. 그 왕이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 여자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 속에 넣고는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의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금관국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어구에 다다랐다. 이때는 시조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 되는 해이다. 그때 바닷가에 있던 할멈이 줄로 끌어당겨서 해안에 매어 놓고 궤짝을 열어 보니 작은 아기가 하나 있어 그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신장이 아홉 자나 되고 풍채가 빼어나 환했으며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이 아이의 성씨를 모르니,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면서 그것을 따랐으므로 마땅히 작(鵲)에서 생략하여 석(昔)으로써 성을 삼고, 또 궤짝에 넣어 둔 것을 열고 나왔으므로 마땅히 탈해(脫解)라 해야 한다.”


탈해는 처음에 고기잡이를 업(業)으로 하여 그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한 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骨相)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을 하여 공명을 세워라.”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니 지리(地理)까지도 겸하여 알았다.


(다) 양산 아래 호공(瓠公)의 집을 바라보고는 길지(吉地)라고 여겨 속임수를 써서 그곳을 빼앗아 살았는데, 그 땅은 후에 월성(月城)이 되었다.


(라) 남해왕 5년에 이르러 왕이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서 딸을 시집 보냈고, 7년에는 등용하여 대보(大輔)로 삼아 나라의 일을 맡겼다.


유리왕이 죽을 즈음에 말하였다.


“선왕(先王)이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아들이나 사위를 논하지 말고 나이 많고 또한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하셨으므로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물려주어야겠다.”


(마) 탈해왕 24년(서기 80) 가을 8월에 왕이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壤井丘)에 장사 지냈다.


석탈해왕 탄강 유허비 @ 문화재청


(가)는 박혁거세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4대 왕 석탈해에 대한 첫머리의 기술이다.


(나)는 석탈해의 탄생과 신라에 등장하는 과정으로 본 신화의 중심 내용이다. 탈해는 다파나 국 소생이라고 하고 그 나라의 위치는 왜국의 동북쪽 1천 리라고 하였기에, 석탈해를 해양 세력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탈해의 어머니 여국 왕의 딸이 임신하여 7년 만에 알을 낳았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난생 신화의 모티브를 갖추고 있으며, 이 점에서 탈해의 출생이 신성성을 갖는 이유가 된다. 또한 탈해를 바다에 띄워 보낸 것으로 보아 역시 해양 세력으로서의 성격이 드러난다. 따라서 탈해가 신라에 등장하는 곳 역시 바닷가인 아진 포구((阿珍浦口)가 된다.


그런데 탈해가 처음 다다른 곳은 금관국으로서 그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탈해 신화에서는 이 부분에서 조금은 다른 내용을 전하며,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전해진다. 즉 탈해가 김수로와 둔갑술로 서로 겨루다 지게 되자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가락국기」 기사는 가야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고, 여기에서의 탈해 기사는 신라 입장에서 서술한 것으로 서로 관점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야의 수로 신화 부분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탈해가 아진 포구에 도착하여 함을 열어 보니 알이 사내아이로 변해 있어 노모가 데려가 길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노모의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다. 이 노모는 일종의 여성 사제 혹은 무당과 같은 존재로, 알영 신화에 등장하여 알영을 키운 노구와 비슷하다. 그리고 함이 처음 아진 포구에 이르렀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왔고, 그래서 성씨를 까치를 뜻하는 글자와 연관하여 석(昔)으로 하였음으로 보아, 이 까치의 존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단 함이 왔음을 알리는 것으로 보아, 박혁거세 신화의 흰 말과 같은 상징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새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라는 보편적인 상징이 탈해 신화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알지 신화의 닭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성격을 갖는 존재이다.


탈해는 신장이 9척이나 되고 풍채가 뛰어난 신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외모에서 그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탈해는 고기잡이를 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학문과 지리를 공부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신성성보다는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노력에 의해 성취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탈해 신화가 신화적 면모와 더불어 사실적 기술이 두드러지는 측면이 있는데, 고기잡이로 노모를 봉양한다는 인간적인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나)는 탈해가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빼앗은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탈해 신화의 내용이 자세하다. 이는 동해 바닷가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는 탈해가 사로국, 즉 경주 시내로 진출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는 탈해가 남해왕의 부마가 되고 대보가 되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내용이다. 이 역시 『삼국유사』의 내용이 보다 자세하니 뒤에서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유리왕이 죽으면서 자신이 먼저 왕위를 올랐고 이제 탈해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내용은 『삼국사기』 유리왕 조 기사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료 4-1-05〕 『삼국사기』 권 1 신라 본기 유리왕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 부인이고 왕비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 보자.”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부터 전해져 오는 것이 이와 같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마)는 탈해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이다. 아래에서 볼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이어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탈해 신화에 대하여 살펴보자.



▣ 『삼국유사』 소재 석탈해 신화


〔사료 4-1-06〕 『삼국유사』 권 1 기이 제4대 탈해왕(脫解王)


탈해 잇금[脫解齒叱今]【(토해 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河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당시 포구의 해변에 한 할멈이 있었으니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의 고기잡이[海尺]의 어멈(母)이었다.


배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에 바위가 없는데 어찌 해서 까치가 모여서 울고 있는가?” 하고 배를 끌어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로 모여 들고 배 안에 상자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자이고 넓이는 13자였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고 이것이 흉한 일인지 길한 일인지를 몰라 하늘을 향해 맹세하였다. 잠시 후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고, 또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하였다.


칠일 동안 잘 대접하였더니, 이에 (사내아이가) 말하였다.


“나는 본시 용성국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일찍이 이십팔 용왕이 있는데, 모두 다 사람의 태(胎)에서 태어나 5, 6세 때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치고 정성(正性)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8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지만 선택하는 일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자식 구하기를 기도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니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넣고 더불어 일곱 가지 보물과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후, 바다에 띄워 놓고 축언하여 이르기를, ‘인연이 있는 곳에 닿는 대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나) 말을 끝내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가 돌집을 지어 칠일 동안 머물렀다. 성 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마치 초승달[三日月] 모양으로 된 봉우리가 하나 보이는데 지세가 오래 머물 만한 땅이었다. 이내 내려와 그곳을 찾으니 바로 호공 (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지략을 써서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 놓고 (다음 날) 새벽 아침에 문 앞에 가서 “이 집은 조상 때부터 우리 집입니다.”라고 말했다. 호공이 “그렇지 않다.” 하여 서로 다투었으나 시비를 가리지 못하였다. 이에 관가에 고하자 관가에서 묻기를 “그 집이 너의 집임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하자 (동자가)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얼마 전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 집을 다른 사람이 빼앗아 살고 있으니 청컨대 땅을 파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말대로 따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이에 그 집을 취하여 살게 하였다.


(다) 이때 남해왕은 그 어린이, 즉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를 그에게 시집 보내었는데 이가 바로 아니 부인(阿尼夫人)이다. 하루는 탈해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하였다. 백의는 물을 떠 오다가 중도에서 자기가 먼저 마시고 올리려 하였다. 그런데 물그릇 한쪽에 입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이로 인하여 그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하여 “이후로는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이후에야 (입에서) 떨어졌다. 이후로 백의는 탈해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속에 우물 하나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우물이다


(라) 노례왕(弩禮王)이 세상을 떠나자 광호제(光虎帝) 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 6월에 왕위에 올랐다. 옛날에 자기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빼앗은 까닭에 성을 석(昔)씨로 하였다. 혹은 까치 덕분에 상자를 열 수 있었기 때문에 새 조(鳥)를 떼고 성을 석(昔)씨로 삼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궤를 열어서 알을 깨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脫解)라 했다고 한다.


(마) 재위 23년 만인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세상을 떠났다. 소천구(䟽川丘) 속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후 신(神)이 명령하기를 “내 뼈를 조심스럽게 묻어라.” 했다. 그 유골의 둘레는 3척 2촌이고 몸 뼈의 길이는 9척 7촌이나 되었다. 치아[齒]는 서로 붙어 마치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 사이는 모두 이어져 있었다. 이는 소위 천하에 당할 자 없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이것을)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 안에 안치하자 신이 다시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하라.” 하였다. 그런 까닭에 영을 내려 그 곳에 모시게 하였다. 【(혹은 한편 돌아가신 이후 제27세 문호왕(文虎王) 대인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바로 탈해다. 소천구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 신(東岳神)이라 부른다.)】


위에서 보다시피 『삼국유사』의 탈해 신화는 『삼국사기』의 그것과 내용상 제법 차이가 있다. 아마도 전거 자료가 달랐기 때문일 텐데, 고려 시대까지 탈해 신화와 관련하여 여러 계통의 자료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앞서 탈해 신화를 검토하면서 중요한 점은 이미 살펴보았기에, 여기서는 양 기록의 차이점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가)에서는 먼저 탈해의 배가 금관국을 거쳐 아진포에 닿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금관국에서의 상황이 『삼국사기』와는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중요한 점은 아진포에 도착한 후 궤에서 나와 자신의 출신을 밝히는 대목이다. 일단 매우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어서 신화로서의 신이한 내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본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 아닌가 한다. 특히 탈해가 자신의 출신지인 용성국과 자신의 출생 과정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그런데 탈해의 출생은 용성국 왕 함달파와 적녀국 왕녀의 결혼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천강(天降)의 모티브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함달파를 불교의 음악 신인 건달파(乾達婆)와 연관 지어 보면 일종의 신(神)적인 성격도 없지는 않겠지만, 자식이 없어 기도하여 7년 만에 자식을 낳았다는 내용에서 인간적인 측면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큰 알을 낳았다는 내용은 난생(卵生) 신화적 요소이다. 즉 천강 요소는 없고 단지 난생 요소만 갖고 있다는 점에서 혁거세 신화나 김알지 신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나)에서는 탈해 신화가 신화적인 내용보다는 인간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탈해가 기지를 발휘하여 거짓 꾀를 내어 호공의 집을 취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탈해의 재주가 뛰어나고 영리한 인물임을 보여 주지만, 한편으로는 신이한 탄생을 통한 절대적 신이성은 오히려 사라지게 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탈해가 호공의 집에 숯과 숫돌을 숨기고 대장장이 집안이라 자처한 데에서 구체적인 역사상으로 유추해 보면, 탈해 세력이 철기 문화와 깊이 연관된 집단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철기 문화에 대한 기술을 갖추고 철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음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탈해에게 결국 꾀로 집을 빼앗긴 ‘호공’이라는 인물 역시, 박혁거세 때부터 등장하는 신라 초기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는 호공이 왜인으로서 신라에 건너와서 혁거세 대에는 마한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탈해왕 2년에는 대보를 역임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김알지 신화에는 탈해왕 대에 시림에서 처음으로 알지의 탄강을 목격하고 왕에게 아뢰는 인물로 나타난다. 자기 집을 빼앗김으로써 탈해와 갈등 관계를 이룰 것으로 보이는 호공이, 장차 석씨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는 김씨 왕실의 시조인 김알지를 발견하였다는 대목이나, 그런 그가 탈해왕 대에 최고 관직인 대보를 지냈다는 것이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다)는 탈해가 남해왕의 부마가 된 사실과, 동악(東岳)에 올라 신이한 능력을 발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동악은 신라의 동쪽에 있는 신령한 산으로서 곧 토함산을 가리킨다. 그런데 (나)에서는 탈해가 두 종을 거느리고 토함산에 올라 호공의 집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같은 산을 토함산과 동악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탈해 신화 기록 중 (나)와 (다)가 서로 다른 전거 자료에 의거하여 작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만 해도 탈해 신화가 여러 형태로 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라)는 탈해가 노례왕(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과 ‘석탈해’로 성과 이름을 지은 연유를 밝히고 있다. 다만 석(昔)이라는 성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를 들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옛날 내 집이라는 이유로 호공의 집을 빼앗은 것이 이유라는 설명은 ‘석(昔)’이라는 한자어의 뜻에 따른 것이고, 까치(鵲)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명은 한자의 파자(破字)법에 의한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곧 ‘석씨’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후대에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마)는 탈해왕의 죽음과 관련된 신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주석으로 붙은 내용은 동악 신으로서 탈해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설화이다. 혁거세 신화에서 신이한 혁거세의 죽음이나 능묘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위 탈해 신화의 (다)와 (마)는 탈해와 동악(토함산)의 연관성을 보여 주는 내용으로, 아마도 토함산 일대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와 관련하여 전승된 설화가 아닐까 추정된다.


전(傳) 탈해왕릉

경주시 북서쪽 표엄(瓢嚴) 근처에 있는 원형의 흙무덤으로 현재는 아무런 시설이 없다. 『삼국사기』에는 탈해왕을 성의 북쪽 양정구(壤井丘)에 장사 지냈다고 했는데, 그 위치가 비슷하다. 그러나 무덤 양식으로 보아 신라 초기의 탈해왕릉으로 보기는 어렵다.  출처: 문화재청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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