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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교통 길과 수레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다
2002-11-08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부국의 밑바탕이 된 신라의 길
둘째로 오래된 길, 죽령 교통로
계립령 교통로를 낸 아달라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58년 소백산 남쪽(희방사) 부근의 죽령을 통과하는 길을 개통시켰다. 원래 이 죽령길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와 살던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북을 왕래하기 위해 뚫은 오솔길이었으나 아달라왕이 다시 넓게 닦았다는 것이다. 다른 전설에는 아달라 왕의 부하장수였던 죽죽(竹竹)이 좁고 높은 고갯길을 넓게 열었다 하여 죽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가 이 죽령길을 서둘러 뚫은 것은 한강유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생활에 절대 필요한 소금을 서해로부터 얻기 위한 소금길과 한강에서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한 뱃길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컸다.
서해안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일조시간이 길며 갯벌이 발달했기 때문에 신라가 접하고있는 동해안이나 남해안보다 소금 만들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소금 산지인 서해안의 소금은 질이 좋아 한강유역은 물론 북부 고구려와 백제의 남부지방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신라는 무엇보다 죽령을 지나는 길이 필요했다. 서해의 소금을 배에 싣고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북한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내려와 충주호를 지나 단양까지 온 소금을 육로로 수입하고 교역도 활발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넓게 뚫리기 전의 죽령길은 고구려와 교역을 하기 위한 상인들의 길이었다. 서기 500년 소지왕 때부터는 고구려와 대결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했다. 신라는 545년 무렵 죽령 교통로를 거쳐 단양(적성)으로 진출했다. 진흥왕 때인 551년에는 고구려 영토였던 강원도 지역 10개 군을 쟁취한 뒤 강원도 내륙까지 깊이 진출하여 경주∼죽령∼충주∼재천∼원주∼춘천∼금화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개척했다. 이 길은 신라가 고구려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한 추풍령 교통로 개척
신라가 경주에서 서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압독국(지금의 경북 경산)을 정복한 시기인 파사왕 23년(102년) 무렵이었다. 그러나 3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역의 교통로가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죽령 쪽의 소문국(召文國. 경북 의성), 계립령 쪽의 사벌국(경북 상주), 추풍령 쪽의 감문국(甘文國. 경북 김천)등 진한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이들 지역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었다.
서기 450년 신라의 한 장군이 추풍령의 변경을 지키던 고구려 장군을 살해한 사건 때문에 양국은 점차 적대관계로 변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13대 자비왕 때인 470년부터 경주∼영천∼대구∼선산∼상주∼추풍령∼옥천 교통로를 개척하여 곳곳에 군사적 요새를 쌓아나갔다. 추풍령 교통로는 경제적인 목적보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 이들 두 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큰 길이었다.
신라는 추풍령 교통로를 개척한 뒤 계속 북쪽으로 이어나가 6세기 중엽인 진흥왕 때 비로소 추풍령∼보은∼진천∼이천∼하남∼서울을 연결하는 한강 하류 교통로를 열었다. 현재 추풍령에서 서울 한강 하류까지 신라가 개척한 교통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진천과 증평 사이 길목에는 신라가 축조한 길이 28간의 석판다리인 용교가 있고, 증평 길 양쪽에는 길을 닦기 위해 삭토한 헌적이 발견되었다. 또 진천과 괴산을 잇는 길에 있는 두타산 정상에는 이 길을 지키기 위해 만든 두타산성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추풍령 교통로는 중국을 오가는 길로서도 중요했다. 신라는 특히 중국의 선진 문물에 욕심이 커서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25대 진흥왕 때에 경주∼진천∼서해안 남양만을 잇는 교통로를 개척하기 위해 553년부터 남양만 지역을 점유하고 있는 백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6세기 말에는 경주∼상주∼보은∼청주∼진천∼직산∼남양만(담항성)의 중국행 교통로를 완전히 개척하여 서쪽 길도 확보했다.
중국사기인 <송고승전>에 보면 원효와 의상대사가 당으로 유학 가기 위해 이 길을 거쳐 남양만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 중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가 한강 유역과 북쪽으로 길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한강 하류에 있던 백제의 소국 6개를 정복한 진흥왕 14년(553)이었다. 이 무렵에 경주∼상주∼보은∼증평∼농교∼진천∼이천∼하남∼서울의 교통로가 완성되었다. 이때부터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신라는 임진강과 한탄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대치했다.
경주∼상주∼한강의 교통로를 개척한 신라는 계속하여 한강 북쪽 고구려와 연결하는 교통로를 뚫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고구려가 남침하기 위해 개척한 길과 신라가 고구려의 침투를 방어하기 위해 개척한 교통로가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이 교통로를 개척할 때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길을 뚫었던 덕분이다. 임진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울∼한강 중류∼아차산∼의정부∼법원∼적성∼동두천 서북의 감악산∼임진강으로 이어졌다.
감악산에 있던 칠중성은 고구려의 남침을 방어하는 데에 중요한 성일 뿐만 아니라 평양∼서울간 교통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이 칠중성 앞의 임진강은 강폭이 좁고 여울이 얕아 건너다니기 쉬워 신라의 대 북쪽 진출 교통로가 되었다. 고구려로서도 중요한 대남 교통로로 초기부터 이용하던 자연적 길을 조금씩 정비해서 쓰던 교통로였다. 고구려가 선덕왕 때 2회, 무열왕 때 4회 등 여러 번 집중적으로 이 칠중성을 공격했던 기록을 보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 잘 알 수 있다.
고구려로 가기 위한 한강 상류 교통로의 개척
신라는 한강 하류와 중류를 잇는 교통로를 6세기 후반까지 완성한 뒤, 완만한 계곡과 구릉지 같은 자연조건과 고구려의 교통로를 활용하여 서울∼의정부∼포천∼한탄강∼철원∼원산∼함흥 길을 개척했다. 이 길도 삼국통일 전에는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한 군사용으로, 중요 지점에 많은 성을 쌓아 보호했다. 포천의 반월산성, 성동리산성, 고모리산성(노고산), 철원의 아차산 등이 그것이다. 서울서 함흥에 가려면 이들 산성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었다. 나중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길을 동북관도로 지정하여 함흥 가는 길로 자주 이용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신라가 6세기말까지 개척한 교통로는 한반도의 동북부와 중부 일대를 쟁취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왕도인 경주와 정복한 각지방 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도로망은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행정의 대동맥으로 쓰여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굳힘으로써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특히 중요 교통로는 국가가 관도(官道)로 지정하고, 5세기부터 이를 이용한 우역(郵驛)제도와 관도 관리기구까지 시행하면서 삼국통일을 위한 대비를 해나갔다.
신라의 우역과 관도 제도
우역의 설치와 운영
우역이란 임금이 상주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왕도와 지방행정 중심지 사이를 잇는 통신과 교통수단을 뜻한다. 임금의 명령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나라에 바치는 조공물 등을 도보나 가마를 이용하여 운반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우역제도는 중국에서 시작하여 고조선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기원전 12세기인 중국 주나라 초기에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는 중앙집권제도가 실시된 뒤 나라의 문서를 지방에 전달하고 조공을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 국도(國道)를 닦고 이 길을 오가는 관리들에게 숙박, 식사, 말, 수레, 배 등을 제공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 무렵 중국과 인접하여 문물교역이 활발했던 고조선 말기에 이 제도가 도입되었고, 고조선이 멸망한 뒤 고구려가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 우역제도가 도입된 것은 소지왕 9년인 487년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에 보면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요 교통로에 역 이름 다섯 개가 나온다. 신라의 우역제도는 소지왕 이전부터 실시했지만 소지왕 시대에 이를 더욱 확대하여 역과 관도의 정비를 담당하는 관청과 관리관인 유사(有司)까지 두었다. 신라가 우역제도를 발달시킨 목적은 관도를 통하여 군사와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 길을 이용할 수 있는 신분이 따로 정해져 있었는데, 나라의 명령이나 조공을 전달하는 전담 관리, 군인, 지배층 계급들이었다.
신라 관도의 규모
관도는 신라 수도인 경주와 지방 행정지역을 연결하는 국가 관리의 교통로다. 이 길은 군사나 군수품의 이동, 국가의 우역제도 시행, 경제 교류와 교역을 위해 필요한 수레를 이용할 목적으로 나라가 정비하거나 건설한 도로다. 기록상으로는 아달라왕 시대인 150년대에 개척된 죽령로와 계립령로를 관도의 효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역제도를 시행하고 국민들에게 수레의 이용을 권장한 소지왕 9년(487)이 본격적으로 관도를 정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관도의 규모나 구조, 노선의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충분히 발견되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경주와 대구 지역에서 발견된 소규모 도로유적을 살펴서 당시 도시 안팎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도로유적 가운데 황룡사 남쪽 외곽의 동서도로는 가장 오래된 관도다. 이 길은 상·하층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단단히 다져서 마무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상층에서 70cm 아래에 있는 도로지반을 10cm쯤 되는 자갈과 황갈색 점토를 혼합하여 다져 올린 위에 다시 30cm두께로 흙갈색 점토를 포설하고 상층도로 표면은 황갈색 사질토를 5cm 두께로 덮었다. 하층도로 양쪽에는 돌을 쌓아 만든 배수구까지 있어 매우 발달된 토목기술을 엿볼 수 있다. 황룡사 동쪽 외곽에 있는 동서로도 남쪽 외곽 동서로처럼 상·하층 구조에다 직경 5cm쯤 되는 자갈과 점토로 다져진 두께 5m짜리 도로다. 이 도로는 남쪽 도로보다 늦은 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 남쪽 동서로도 상·하층 구조로 축조되었다. 퇴적층 위에 10cm쯤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잔자갈과 갈색 점토를 혼합하며 10cm를 덮고 다진 다음 상층 노면을 황갈색 사질토와 잔자갈이 섞인 모래로 단단히 다져 마무리했다.
대구지역에서 발굴된 도로는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관도 가운데 가장 길고 큰 도로로서, 길이 38m에 폭이 2m나 된다. 도로 하부에는 암갈색 점토를 깔고 그 위에 깬 돌과 자갈을 깔아 표면을 단단히 다졌다. 도로 유적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닌 흔적이 두 줄로 나 있는 것을 보면 신라의 관도는 주로 수레가 오가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수레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배수구까지 설치하여 단단히 쌓아 올린 것을 보면 토목기술과 포장기술이 매우 발달했던 듯싶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의 도로유적들은 도시 안의 도로뿐이어서 도시와 지방을 연결하는 관도도 기술적으로 잘 건설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수준이 떨어질 거라고 추정할 뿐이다. 수없이 많은 노선들을 도시 도로처럼 축조하자면 경제적 부담이 크고 엄청난 인력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교통로를 수레나 군사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넓히고 보수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경주에서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다리도 많이 놓았을 텐데, 이를 뒷받침하는 다리 유적은 지금까지 하나만 발견되었다. 추풍령 교통로의 진천과 증평 사이에 놓인 28간 짜리 석판다리인 ‘용교’가 그곳이다. 기록을 보면 많은 다리가 있었던 듯하다. <삼국유사> 흥법(興法)편 아도기라기에는 경주의 서천(西川)에 놓았다는 ‘금교’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기이(紀異)편 도화녀 비형랑기에도 경주의 서쪽 황천에 놓았다는 ‘귀교(큰다리)’ 이야기가 있어 관도에 많은 다리를 건설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건설하거나 정비한 관도는 병부(兵府)가 관리했으나 눌지왕 이후에는 승부(乘府)라는 전담 부서를 두어 관도의 개보수·건설·확장공사는 물론 우역을 위한 숙식시설과 말의 대여를 맡겼고, 유사(有司)라는 최고 책임자까지 두었다.
수레의 보급에 앞장섰던 신라왕
유물이나 여러 기록을 보면 신라는 수레를 많이 이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수레 유물은 실물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고분에서 토기로 만든 수레가 발견되었다. 신라 제13대 미추왕(262∼284) 능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는 수레모양 토기가 있다. 이 토기는 높이가 12.5cm에 바퀴 지름이 12.3cm의 두 바퀴 수레인데,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적재함이 달려 있다. 또 경주 25호 고분에서 출토된 차형(車型) 토기는 매우 발달한 신라 중기의 수레 모양을 나타낸다. 바퀴 살이 16개인 것을 보면 신라의 귀족이나 장수들이 탔던 전차(戰車) 가운데 하나였던 듯하다.
그밖에 수레가 조각된 기와도 출토되었다. 이 기와에는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좌우에 늘어뜨린 바퀴 달린 연(輦)이 조각되어 있다. 연은 왕이 타는 호화로운 가마로서 신라시대 왕들은 궁궐 안이나 도시 내를 행차할 때 바퀴 달린 연을 탔다.
문헌상의 기록도 많다. <삼국사기>에는 제18대 실성이사금 15년(416)에 동해에서 큰 물고기를 잡았는데, 크기가 수레에 가득 찼다고 했다. 기록상으로 처음 수레를 언급한 것인데, 이때 잡은 고기를 ‘한 마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래나 큰 상어인 듯싶다. 고기가 너무 커서 사람이 손으로 운반하지 못해 수레에 싣고 간 모양이다.
신라가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권장했던 것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명백히 나타난다. 제19대 눌지왕은 재위 22년째인 438년에 귀족은 물론 백성들에게 국가적으로 우차법(牛車法)을 만들어 수레 이용을 가르쳤다고 했다.
제22대 지증왕은 재위 6년 무렵인 505년부터 백성들에게 수레 이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면서 귀족과 백성들의 수레 이용을 규정한 구체적인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기도 했다. 수레를 승용과 짐수레로 나누고 승용 수레는 왕족인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귀족까지만 탈 수 있도록 법으로 정했다. 또 수레의 치장이나 말의 치장도 계급에 따라 다르게 했다. 왕족인 진골이 타는 수레는 가장 좋은 목재를 쓰고 화려한 치장을 했고, 그 밑으로 내려갈수록 간소하게 단장했다.
중앙선이 통과하는 죽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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