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47438


봉오동 전투에는 홍범도도 있지만, 이들도 있었다

[서평] '홍범도 일지'와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통해 본 봉오동 전투

20.06.07 11:13 l 최종 업데이트 20.06.07 11:13 l 김경준(kia0917)


6월 7일은 '봉오동 전투 승전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1920년 6월 7일, 우리 독립군은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장쾌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10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코로나19를 맞아 또 한 번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두가 불가능이라 여겼던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교훈을 통해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요?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볼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여기 소개합니다.[기자말]


봉오동 전투하면 역시 홍범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포수 출신으로 날랜 사격 솜씨 때문에 '날으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했던 홍범도.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진면목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는 점에만 있지 않다.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비범한 덕장(德將)의 면모를 보여준다. 평민 출신 지휘관으로 계급의식이나 특권의식이 없던 그는 부하들을 격의 없이 대했다. 그래서 부하들로부터 '홍대장'이라 불리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그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쫓겨났을 때도, 그는 지역사회에서 고려인들의 신망을 받았다. 오죽하면 그의 생전에 이미 그를 기리는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을까.


"너무 추네, 너무 추어... (추켜세우네)"


1942년,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에서 연극 <홍범도>가 상연됐을 때, 연극을 보고 난 직후의 홍범도는 이렇게 말하며 민망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연극을 아무리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백중 총재간이야 뵈여주지 못하지!"


홍범도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긴 '홍범도 일지'


그러나 홍범도 이름 석 자는 알아도 정작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구체적인 행적을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홍범도가 직접 쓴 기록과 구술을 옮긴 것으로 알려진 '홍범도 일지'는 영웅 홍범도, 인간 홍범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귀한 사료다. 그동안 학계에서만 연구 자료로 활용되던 '홍범도 일지'는 2014년 독립운동사 연구의 권위자인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에 의해 <홍범도 장군>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2019년 반양장본으로 재출간).


▲  홍범도 일지를 소개한 <홍범도 장군> ⓒ 한울


일반적으로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운동 주체가 손수 작성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지만, 동시에 기억의 왜곡에 따른 의도치 않은 서술의 왜곡이 발생하거나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게 쓰여질 우려가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홍범도 일지'는 통상적인 회고록이나 자서전의 범주에서 벗어난 기록"이라며 "자신이 겪었던 사실들을 가식 없이 덤덤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사료로서 손색이 없다"고 강조한다.


홍범도는 승리의 기록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날 수도 있는 패배의 기록들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홍범도는 무기 구입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보낸 부하들이 자금을 횡령·탕진하거나 도리어 매수되는 바람에 무기가 없어 도망쳐야만 했던 사실을 고백한다.

 

"약철이 없어 일병과 쌈도 못하고 일본이 온다면 도망하여 매본 꿩이 숨듯이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다가 할 수 없서 외국 중국땅 탕해로 10월 9일에 암녹강을 건너 올 때에 신파 기름구피 일병 군대와 접전하다가 그날 밤으로 건너와 암녹강을 하직하고 너의 수궁이 수천리 장강인데 내가 무사히 건너 왓다 부디 잘 있거라 다시 볼 날이 있으리라고 눈물로 하직하고..." - <홍범도 장군>, p.117


적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친 것이니, 훗날 치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홍범도는 결코 숨기지 않았다. 이 무덤덤한 고백에서 홍범도라는 한 인간의 소탈하고 진솔함이 느껴진다.


'홍범도 일지' 그 가치에 주목해주기를

 

▲  홍범도 일지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현재 '홍범도 일지'는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여러 필사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대표적으로 '김세일 필사본', '이함덕 필사본', '이인섭 필사본'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홍범도 일지'를 처음으로 베껴 쓴 필사본으로 알려진 이함덕 필사본을 저본으로 다른 필사본들을 참고하며 '홍범도 일지'의 주해와 탈초를 시도했다.


저자는 "'홍범도 일지'가 20세기 전반기의 언어로 쓰였다는 점 외에도 평안도·함경도 사투리를 비롯하여 육진방언, 조선식 러시아어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용어들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며 해석상의 어려움을 고백한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난해한 용어나 문장들이 등장하지만, 그 낯선 문장이나 말투에서 실제 홍범도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것 같아 뭉클한 마음이 든다. 그 문장들을 읽다보면 세월의 간극을 넘어 홍범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듯한 착각마저도 든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홍범도 일지'가 그 독보적인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집필했다"며 책을 출판한 까닭을 밝힌다. 홍범도 연구자로서 '홍범도 일지'가 여전히 학계나 대중들 사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현상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고백이다.


저자의 말처럼 '홍범도 일지'는 여전히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번역되지 못한 부분들도 있고, 홍범도가 쓴 원본을 찾지 못했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맞아 보다 많은 이들이 '홍범도 일지'를 읽어봤으면 하는 까닭이다.

 

"나는 지금 늙엇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지금 파시쓰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으니들! 모도 무긔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 - <홍범도 장군>, p.145


봉오동 전투의 또 다른 주역 '최씨 삼형제'

 

▲  봉오동 전투의 숨은 주역 최씨 삼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 필로소픽


봉오동 전투 당시 홍범도 부대와 함께 연합부대를 구성했던 또 다른 축, 최진동‧최운산‧최치흥 삼형제에 관한 책도 최근 출간됐다. 삼형제 중 둘째였던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가 집안의 증언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최씨 집안의 독립운동사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다.  


'봉오동 독립전쟁 100주년, 숨겨진 어느 장군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책은 봉오동 전투 승전의 숨겨진 주역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저자는 봉오동 전투라는 기존의 용어에 대해서도 이론을 제기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맞아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대규모 전투였기 때문에 '봉오동 독립전쟁'이라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군! 일제강점기 독립군이라고 하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무기도 식량도 없이 헐벗고 굶주린 구한말 의병 같은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저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과 애국심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대규모 일제 정규군을 대파한 우리 독립군의 승리를, 변변한 무기도 하나 없는 게릴라들이 이뤄낸 눈물겨운 기적이라고 믿었습니다." -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p.10


작년에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 역시 우리 독립군이 헐벗고 굶주린 상황에서 일본군을 맞아 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처럼 묘사됐다.


하지만 저자는 영화가 사실을 크게 왜곡했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독립군은 급조된 게릴라가 아니라 수천의 독립군이 연대·대대·중대 그리고 후방부대와 보급부대, 의무대까지 갖춘 정예부대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독립군이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던 배경에, 간도 지역 거부(巨富)였던 할아버지 최운산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최운산은 자신의 소유지에 콩기름공장 및 국수공장, 주류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콩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기업을 설립해 경영하였다. 시대적 소명으로, 그리고 뛰어난 경영 능력으로 당시 간도 제일의 거부가 되었다. 최운산은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만주 지역 독립군부대의 군자금을 대부분 자비로 감당하였다." -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p.92

 

한편으로 저자는 봉오동 전투의 총사령관이 홍범도로 알려져 왔던 사실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즉, 통합 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은 최진동이었으며, 홍범도는 휘하 지휘관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홍범도가 전투 중에 제대로 응전하지 않고 퇴각한 사실에 대해 상관이었던 최진동이 문책했다는 사실을 담은 일본 측 문서도 근거로 제시한다. 이외에도 청산리 전투 후 김좌진 부대가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진 흑백 사진 역시 "시기상으로나 정황상으로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한다.

 

▲  청산리 전투 종료 후 김좌진 부대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사진 ⓒ 독립기념관


이처럼 책을 읽다 보면 기존의 정설에 반하는 주장들이 많아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저자 역시 집안의 증언이나 개인적인 기록에 의거해 쓰여진 책이기에 학계의 검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의도는 분명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 관심과 의문을 갖고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손녀의 편지


이 책은 최운산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최운산 후손들의 삶을 기록한 가족사이기도 하다. 남은 가족들이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최운산의 명예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화들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1961년 저자의 아버지가 최운산의 서훈을 위해 총무처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담당자가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격분하여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저자는 그로 인해 서훈이 계속 거부됐다고 말한다. 결국 최운산의 부인이자 저자의 할머니인 김성녀가 진정서를 내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최운산은 1977년에야 비로소 독립유공자로 서훈된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지금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4년 전, 가족들과 함께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를 세운 저자는 역사학자들과 함께 봉오동 현장을 답사하고 당시 독립군이 파놓은 참호를 따라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풀어낸다. 당시 독립군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이나 맷돌, 참호의 흔적들도 생생한 사진으로 담아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승전의 역사인 봉오동 독립전쟁이 벌어졌던 곳, 그 북간도의 봉오동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우리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 부대 대한군무도독부와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한 곳이다. 할아버지 3형제가 수천 명의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쳐 독립전쟁을 치러낸 근거지가 바로 '봉오동'이다." - p.194


책은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전하는 편지로 끝맺는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면 역시 내 손주답게 살았구나! 하고 미소 짓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1. <홍범도 장군>, 반병률, 한울아카데미, 2019.

2.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최성주, 필로소픽, 2020.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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