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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조선과 백제의 교통 백제, 국내도로와 국제도로 활발히 개척"에서 백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백제의 교통 
2003-01-09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백제의 건국과 경제 
 
백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졸본부여 왕인 주몽의 둘째 아들인 유리가 서울 한강 상류, 지금의 강동구 부근에 위례성을 쌓고 도읍했다. 그 뒤 한강 유역에 있던 마한을 병합하여 발전한 나라다. 뒤에 고구려와 신라의 압박 때문에 공주로 천도했다가 마지막에는 부여를 수도로 바꿨다. 

백제는 전성기에 해외로 뻗어나가 해상무역으로 경제력을 키웠고, 특히 일본에 우수한 도기·조선·철기·한문 등의 백제문화를 전했다. 백제는 일본인들을 문화적으로 계몽시켜 일본 발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일찍이 서해와 남해를 건너 중국·남중국·일본과 교역을 함으로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백제는 32대 678년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660년 나당연합군에 멸망, 통일 신라에 흡수되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나 곧이어 쇠로 농기구를 만드는 수공업도 발달했다. 4세기 이후에는 해안을 중심으로 철을 기반으로 한 수공업이 발달해서 각종 어구를 쇠로 만들어 어업과 염전업이 함께 발달했다. 

백제의 수공업은 농기구를 중심으로 무기, 생활용품, 장식품 등 여러 부문으로 발전되었다. 백제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 수공업과 민간 수공업으로 나누었다 관청 수공업은 궁내 내관(內官) 소속으로서, 최고 기술자들인 장공(匠工)들을 마부(馬府), 도부(陶府), 목부(木府)로 구분해서 배치했다. 장공들은 왕족과 귀족을 위한 생활도구와 병기, 말, 수레, 배에 필요한 부속품들을 만들었다. 

관청 수공업은 내관과 외관으로 나눠 운영했다. 외관에는 사군부·사도부·사공부·사구부가 있었는데, 사공부(事工府)에서는 주로 궁궐·사찰·다리·조선·승용 수레와 달구지 제조 같은 큰 공사를 맡았다. 

백제의 도로망과 다리

백제는 한성(서울)·웅진성(공주)·사비성(부여) 등 역대 수도를 중심으로 지방을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를 활발하게 건설했다. 도로가 발달한 것은 영토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백제가 점차 영토를 넓히면서 이를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가 시행하던 지방통치법인 ‘5방성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백제는 전성기에 전국을 다섯 방성으로 나눴다. 이들을 중앙에서 군사·경제적으로 통치하자면 수도에서 각 방성의 성도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필수적이었다. 지방세력이 봉기할 때 중앙의 군사를 급파하여 제압하고, 각 방성의 농수산물을 수도로 편리하게 수레로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왕의 명령을 각 방성 수령에게 신속히 전달하는 데에도 국도가 요긴하게 쓰였다. 

중앙에서 5개 방성을 군사·경제적으로 통치 
광범위한 도로와 함께 수많은 다리도 건설해 

백제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523∼660)와 각 방성의 거리는 60리부터 360리까지 다양했다. 중방성인 고사성(고부)는 부여에서 남으로 260리 거리였고, 동방성인 득안성(은진)은 부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 거리였다. 가장 먼 남방성은 부여에서 남쪽으로 360리 거리인 변성(장성)이고, 다음으로 먼 서방성은 부여에서 서쪽으로 350리 거리인 도선성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은 북방성인 웅 진성(공주)으로서, 부여에서 60리쯤 떨어졌다. 

백제가 부여와 각 방성을 연결하는 도로는 물론 각 방성끼리 연결하는 지방도로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온다. 여러 강에 많은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도로가 발달했던 증거는 부여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이다. 부여 박물관 앞의 이 유적은 남북거리가 30m, 동서거리가 25m쯤 되는 교차도로로서, 달구지 두 대가 서로 비켜갈 수 있는 넓은 도로다. 그리고, 도로 양옆에는 돌을 깐 도랑도 부설되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제는 후기인 사비성(부여) 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다섯 방성을 22담으로 더욱 세밀히 구분하고 각 담에는 왕족을 파견하며 통치했다. 이때는 5방성시대보다 도로가 더욱 발전되어 전국을 거미줄처럼 연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 규모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수레 한 대쯤 달릴 수 있는 도로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성내의 정열된 도로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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