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20422/45717443/1

28일은 이순신 탄신 467주년… 우리가 알고 있는 ‘충무공 상식’은 모두 진실일까
기사입력 2012-04-23 03:00:00 기사수정 2012-04-23 17:37:11

졸병으로 백의종군? 권율장군 진영서 자문역할
이순신연구소 내일 학술대회



충무공 탄신 467주년인 28일을 앞두고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 대해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서울 광화문광장 지하의 기념관인 ‘충무공 이야기’에 전시된 55% 크기의 거북선 모형. 연합뉴스‘이순신이 흰옷을 입고 병사 행렬 사이에서 터벅터벅 걷는다. 병사들의 막사에서 생활할 때 대다수 병사는 극진히 예우하지만 일부는 같은 병사라며 멸시한다.’

졸병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은 드라마 등에서 이렇게 묘사돼 왔다. 하지만 역사적 문헌은 이순신 장군이 졸병으로 백의종군한 적은 없다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우리의 상식과 역사적 진실 사이에는 이처럼 괴리가 적지 않다. 충남 아산의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소장 임원빈)가 충무공 탄신 467주년(28일)을 앞두고 24일 아산시 충무교육원에서 학술대회를 열어 ‘이순신 정론(正論) 찾기’에 나선다. 폄훼가 아니라 ‘성웅 이순신’에 대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자별로 고증 내용을 나눠 맡았다. 해군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는 ‘백의종군 면사첩(免死帖) 해전횟수’를,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는 ‘출신배경, 명량해전 철쇄설’을, 임원빈 소장은 ‘명량해전 승리 원인과 그 이후의 전황’을, 해군사관학교 정진술 해군사 해양사편찬위원은 ‘거북선 철갑선설’을, 연기교육청 홍순승 장학관은 ‘자살·은둔설’에 대해 발표한다.

① 졸병으로 백의종군한 게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백의종군을 명령받았다. 삼도수군통제사이던 1597년(당시 52세) 조정신료의 모함으로 백의종군 형벌을 명령받았지만 도원수 권율의 진영에서 똑같은 통제사 예우를 받으며 지휘부 전쟁자문을 하고 한산도 수군 지휘관들에게서 수군 상황을 보고 받았다. 또 그에 앞서 조산보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이던 1587년 녹둔도 전투에서 패해 백의종군 형을 받은 뒤에도 만호(중령 또는 대령)급인 우화열장(右火烈將)이라는 지휘관 자격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다. 과거 급제자 이상에게만 적용되는 백의종군은 조선 문종 때 처음 문헌에 등장해 조선왕조실록에 60건의 사례가 나온다. 다만 백의종군 형을 받더라도 대부분은 직전 계급의 예우를 받았다.

② 거북선은 철갑을 두르지 않았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은 임란 때의 일본 문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가 안골포 해전을 묘사하면서 ‘조선의 큰 함선 3척이 맹선(盲船)이며 핵심 부분이 철로 장식돼 있었다’고 기록한 데 따른 것이다. 1929년 편찬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순신의 장계를 비롯한 우리 측 사료에는 거북선 등에 판자를 깔고 송곳과 칼을 꽂았다고만 돼 있다. ‘이충무공전서’의 거북선도(圖)에도 판자만 깔려 있다. 일본군이 패배를 변명하기 위해 철갑선으로 과장한 것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는 분석도 있다.

③ ‘23전 23승’도 부정확한 통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한 ‘23전 23승’ 역시 근거가 불분명하다. 제장명 교수는 “2008년 드라마 제작진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 ‘대략적으로 셈을 해본 것’이라고 답했다”며 말했다. 그는 “연구 결과 이순신이 참여한 해전(조선 육군 및 명나라 수군 및 육군과의 합동 전투 포함)은 45회인데 이 중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휘한 36회 전투에서 모두 승리해 ‘36전 36승’이 맞다”고 밝혔다. 

④ 명량해전엔 철쇄 없었고 일본군도 전멸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바다에 철쇄를 설치해 일본 해군을 격파했다는 얘기는 당대의 1차 사료인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없는 내용이다. 18세기 중반 이중환의 택리지에 처음 기록된 것으로 미뤄 민간의 설화가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임 소장은 상상 이상으로 강한 판옥선과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한 병법을 명량해전 승리의 핵심 이유로 꼽았다. 일본군이 이 해전에서 전함 500여 척이 대파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31척만 파괴되고 나머지 170∼270척의 주력 부대는 그대로 남았다.

⑤ 면사첩은 일본 부역자 회유문서

면사첩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공의 대가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죽음만은 면해 주겠다’며 보내준 표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면사첩은 적(敵)에게 붙었던 사람이라도 돌아와 자수하면 죽음에서 면제한다는 일종의 포고문이다. 적에게 어쩔 수 없이 협조한 백성을 구제하는 데 쓰라며 명나라가 이순신 장군에게 준 문서이지 선조가 준 특별사면 문서가 아니다.

⑥ 어렵고 가난한 환경은 소설적 배경

이순신 장군은 본가, 외가, 처가가 모두 어느 정도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오대조 이변은 20여 년간 판서를 지냈다. 어머니 변씨도 현감의 딸이고 부인 방씨도 군수의 무남독녀였다. 이순신 장군의 형제들은 한성의 동학에서 유성룡과 동문수학할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투구를 벗고 스스로 적탄에 맞아 자살했다거나 죽음을 가장하고 16년 더 살았다는 설도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이민웅 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나친 성웅화가 이뤄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아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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