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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1] 이순신, 내부의 적과 싸우다
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돼야 했던 운명, 조선 사회의 부정부패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길 택해
[2004.10.14 제529호]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이순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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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귀환 /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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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됐다.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왔는데 인상(人商·인신매매상)도 있다. 그들은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것이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 전라도는 처참한 지옥이 되었나
이순신 장군의 영정.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대가로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그는 민족을 구함으로써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었다.
1597년 6월 일본 구주 안양사의 주지 게이넨은 우스키성의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일일기>(日日記)라는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본 조선인의 참상은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를 보거나 경험했을 이 승려조차 ‘난생처음 보게 된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수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한치도 밟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안전했던 전라도 지역이 이처럼 1597년 이후 처참한 지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등 악독한 지배층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선조의 독단 때문이다. 선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을 투옥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세운 뒤 조선 수군이 1597년 7월16일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 패전 뒤 채 20일도 안 돼 전라도는 게이넨의 일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살육과 방화, 고문, 인신매매, 구타 등등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뿐인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조선 수군의 패배 한달 뒤부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다이묘(大名·영주)들에게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 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는 군령을 내린 것이 1597년 8월이다.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돌파하지 못한 곡창지대이자 전략 요충인 전라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고 일본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은 조선군은 물론 남녀노소, 승려, 노비, 초동에 이르기까지 비전투원의 코까지 무더기로 베어냈던 것이다.
나아가 게이넨의 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 리에 걸쳐서 넘치고 있었으며, 그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이 될 정도다.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 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결정적으로 줄어들었을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일본이 포기했거나 적어도 굉장히 주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량대첩을 그린 현대화. 그는 이 마지막 전투에서 ‘단 한명의 왜적도 놓아주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놀래키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 일대에서 일본 수군을 연파해 일본의 조선 점령과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순신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본군의 침략을 거의 유일하게 대비한 조선군 지휘관이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결국 일본의 야심적인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파탄시킨 민족의 구원자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처지로 내쫓겨 있었다. 일본은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함경도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군에게 전라도를 돌아 황해를 북진하는 수군의 보급선이 연결된다면 조선 점령을 매듭짓고 중국까지 치고 들어간다는 수륙병진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전략은 바로 이순신의 분전으로 뿌리부터 파탄되고 있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전쟁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에 놀라 아예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데서도 그대로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일본군에게 승리하지 못할 때 오직 승전에 승전을 거듭해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올랐던 그를 당시 조선 왕조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뒤 ‘무등병’으로 내몰아놓고 있었다. 백의종군 첫날 순신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종의 집에서 자야 했다. 이게 그의 첫 백의종군도 아니다. 42살 때인 1585년 북방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전직된 그는 반드시 필요한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직속상관이 묵살하는 바람에 결국 여진족 침략병들을 아주 적은 병력으로 맞아 싸워야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도 용전분투해 나름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는데도 오히려 문책을 두려워한 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됐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순신은 그런 조국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 등과 선조가 합작해서 그에게 씌운 죄목은 네 가지다.
(1)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3)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4)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없이 방자한 죄
공인으로서 엄격한 도덕성과 청렴결백한 생활을 고집했던 순신은 당시 부정부패로 물든 조선 사회와 타협하지 않아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네 가지 죄목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순신이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결과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따라서 지면의 한계를 무릅쓰고 그 하나하나의 진실을 파헤쳐 들어가본다.
첫째 죄목은 순신이 부하 장령들의 공적 보고를 믿고 그대로 위로 상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가 공적에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오른 그다. 순신은 나중에 조명연합수군의 승리를 위해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모든 공적을 돌릴 테니 대신 지휘권을 달라’고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부하의 공훈을 세워주어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선조, 이순신 사형까지 염두에 둬
일본군의 조총. 이 조총은 당시 조선군이 쓰던 중국식 화승총에 비해 월등히 화력이 뛰어났다.
두 번째 죄목은 일본의 반간계(反奸計)에 놀아난 조정이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첩자 요시라를 경상우병사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바다를 건너올 테니 조선 수군이 체포하라”고 충동질한 것을 순신은 의심해 실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반간계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이 기획한 것으로 조선 조정은 그대로 걸려든 것이다.
세 번째 죄목은 원균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1592년 최초 해전인 옥포 해전에 대한 논공행상은 당시 옥포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부대의 지휘관인 원균이 구원부대의 지휘관인 순신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원균은 일본군의 침입이 있자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왜군에게 빼앗기면 활용당한다는 이유로) 단지 1척(나중에 그의 부하들이 5척을 더 가지고 합류)의 배를 가지고 합류했다. 이에 비해 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4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가지고 참전하고 있다. 게다가 원균은 일본군이 수백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할 당시 전혀 공격조차 시도하지 않은 바 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는 것이 먹혀들어가고 있다.
네 번째 죄목은 세자 광해군이 군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제2정부 격인 ‘분조’(分朝)를 전주에 설치하고 순신을 전주로 오라고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여수에 있는 수군의 최고 지휘관을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는 세자가 수백 킬로나 먼 내륙에까지 와서 보고하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채 압송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다.
선조는 처음 순신을 파직하고 투옥시키며 아예 사형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순신이 어떤 자인지 모르겠어! 명나라의 관원들이 그들의 조정을 속이지 못하는 짓거리가 없는데, 그 못된 버릇을 우리나라 사람이 닮아가고 있어.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영을 불태웠다고 허위 보고를 했으니, 영의정!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제부터 이순신이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일본군 제2군 대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온다 한들 그 죄를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결국 순신은 우의정 정탁 등의 간절한 구명운동으로 석방된다. 민족의 구원자가 어리석은 암군의 명령 하나로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파직돼 죄인이 돼 백의종군길에 나선 아들을 보러 멀리 여수에서 아산으로 오던 순신의 노모는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숨지기도 했다. 죄인의 누명을 쓴 채 어머니마저 잃은 순신은 ‘간과 쓸개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삶 속에서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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