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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사 -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1. 출사 전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딱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인터넷에 이순신만 쳐도 나오고 위인전에서도 많이 접했을 테니까요. 그냥 오해만 몇 개 깨자면요.

불멸의 이순신에서 "할아버지 이백록이 기묘사화 때 죽어서 역적가문이 되었다"고 했죠. 안 죽었습니다. -_-; 기묘사화 십 년 후에도 기록이 남아 있죠. 거기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은 선조 때 이미 신원된 상태였죠. 이순신이 외가에서 산 걸 근거로 들기도 하던데... 조선 전기만 해도 그런 경우는 많았습니다.

"이순신은 약골이었다." 왜란종결자부터 시작된 대표적인 오해인데요. 그 근거로 유명한 말에서 떨어졌다는 거나 화살을 쐈는데 몇 발 못 맞췄다 등이었죠. 전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에 대해서는 42발 맞춘 건 당시 기준으로 "부끄러운" 기록이라는 거죠. 글쎄요. 당시 조선시대 대한 기록은 많습니다만 평균적으로 몇 발을 맞춰야 잘 하는 거다라는 기록은 없죠. 이후에도 그렇게 평균치로 실력을 가늠한 글은 본 적 없습니다.
 
굳이 찾아보진 않겠습니다. 참고로 국궁 용어에서 50시 중 25시 이상을 맞추는 사람은 대살판이라 하고 30시 이상 맞추는 사람은 시수꾼이라고 합니다. 그 위로 넘어가는 명칭은 없더군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은 이미 40대 후반이었고 50대 초반에 고문을 당합니다. 몸이 안 좋았다는 기록은 그 후에나 나오고 임진왜란 기간 중에 볼 수 있는 건 숙취 정도였죠. 

이순신 장군은 20살 무렵 보성군수 방진의 딸과 혼인합니다. 방진은 무인 출신에 재력가였죠. 그 딸도 도적이 쳐들어오자 활로 맞섰는데 화살이 다 떨어졌고, 이 때 붓통을 던지면서 "화살 여기 많아요~"라고 하면서 그 소리로 적을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훼이크였습니다만... 영웅에 맞는 아내인 거죠.

말에서 떨어진 걸로 유명한 무과를 본 게 28세 때였고, 76년, 식년무과에 32세의 나이로 합격, 드디어 출사하게 됩니다. 전설의 시작이었습니다. 


2. 굴곡

훈련원에 있을 때 병조 정랑 서익이 자기와 친한 사람을 참군으로 올리려 하자, 담당으로 있던 그는 공평하지 못 하고 법을 고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이 때문에 서익에게 밉보이죠. 
이순신의 강직함이 마음에 들었던 병조판서 김귀영이 서녀를 첩으로 주려고 하자 거절합니다. 벼슬길에 갓 나왔으면서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들여놓겠냐는 거죠.
 
이이가 같은 덕수 이씨라고 만나고 싶어 하자 인사 당담에서 물러나시면 만나겠다고 거절합니다. 누구였더라 -_-; 지나가다가 이순신의 활통을 보고 달라고 하자 "이 하찮은 걸로 대감과 저의 명예를 욕 보일 순 없다"면서 거절합니다.
발포 만호가 되었을 때 전라감사 손식이 참소를 듣고 벌을 주려 했는데, 이 때 만나서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묻고 탄복하면서 그 후 잘 대해줬다고 합니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오동나무를 베려 하자 관청의 물건이라면서 거절합니다. 후임 수사 이용이 와서 결원이 세 명인 걸 핑계로 죄주려 하다 주변의 만류로 막혔고, 전라도의 수사, 감사들이 관리들의 성적을 매길 때 맨 밑에 두려 하자 조헌이 강력히 반대해서 그만둡니다. 그리고 맨 위에 나온 서익이 하필 점검차 와서 핑계를 대고 파직시키죠.

보시다시피 상관과 사이가 좋으래야 좋을 수 없습니다. 이 때부터 지금 봐도 강직하다 못 해 "제발 내 상관만 되지 마라 ㅠㅠ"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행동을 보여주죠. 군대 갔다 오신 분들, 이런 상관 두고 싶나요....

83년, 이용이 남병사가 되어 이순신을 군관으로 삼습니다. 싫어하긴 했지만 결국 능력을 인정한 거죠. 이후 함경도로 갔다가 아버지의 상을 겪고 3년상이 끝난 후 86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됩니다. 이 때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죠.


3. 전라좌수사가 되기까지
 
북병사 이일의 장계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87년 10월 10일)

하지만 선조의 반응은 이랬죠.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10월 16일)

녹둔도의 패전이 이순신 최고의 트라우마라고 널리 알린 불멸의 이순신과는 달리 이 때 이미 선조의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이후 88년 시전부락 공략 작전으로 백의종군에서 벗어납니다. 이 때는 몰랐죠. 불과 몇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89년, 불차채용이 시작됩니다. 이 때 이순신은 이산해와 정언신에게 추천받았지만 기용되진 않았죠.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을 다시 보자면서 편 들어줍니다. 이 두 사람이 언급되었다는 것 자체가 녹둔도 전투가 트라우마는커녕 기회가 된 전투라는 걸 의미합니다.

이후 고속승진이 시작됩니다.

그는 선전관을 거쳐 정읍현감에 임명됩니다. 이 때 죽은 두 형의 자식들까지 데리고 왔다 해서 "남솔"로 처벌받을 뻔 합니다. 부임할 때 가족을 너무 많이 데리고 오지 못 하게 했었거든요. 하지만 죄를 받을지언정 버릴 수 없다면서 거부합니다. 

정여립 사건으로 자기를 추천한 정언신이 체포되었을 때도 그와 나눈 편지를 없애지 않고 담당관이 술이나 마시고 놀자 "일국의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이렇게 노냐"고 하면서 꾸짖습니다. 당시 상황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행동입니다.

이후 고서리 첨사로 임명되었다가 대간들이 반대로 취소, 만포첨사로 갔다가 다시 취소됩니다. 너무 높은 직위를 준다는 거였죠. 이에 선조는 파격적인 작전을 짭니다.

진도군수 -> 가리포 첨사 ->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거죠. 이 때 해당 지역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승진하는 식으로 했고, 역시 대간들이 반대했지만 강력하게 밀어붙입니다. 

그 때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건 원균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잘리고 유극량이 임명되지만, 그 역시 무뢰배들과 놀았다는 이유로 잘립니다. 하필 원균이 다음으로 간 게 경상우수사였다는 걸 빼면 -_-; 유극량은 억울했을 겁니다. 이후 그는 임진강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아무튼... 전쟁 1년 전에 일어난 이 엄청난 인사 이동은 결국 나라를 구하는 계책이 됩니다.


4. 개전
아예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네요. 난중일기나 임진장초(장계를 모은 거) 같이 이순신 장군 관련 기본 사료들이 많으니 들어가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사이트명이 좀 긴 거 빼면요.

4월 12일, 전쟁의 전 날. 그는 당일의 일을 담담하게 적었습니다. 
맑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배의 지자ㆍ현자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공(남한)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나가 활 열 순을 쏘았다. 관청으로 올라갈 때 노대석을 보았다.

전쟁 직전에 거북선이 완성된 것이죠. 드라마와는 달리 침몰 따위 안 했습니다. 

4월 13일, 공무를 본 뒤 활 열 다섯 순을 쏘았다고 합니다. 14일에도 열 순을 쏘았다고 하는군요. 여기서 순은 다섯 발입니다.

그리고 15일. 급보가 날아옵니다. 

맑다. 나라 제사날(성종 공혜왕후 한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써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영남우수사(원균)의 통첩에, “왜선 90여 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영도)에 정박했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또 수사(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왔다.“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래서 즉시 장계를 올리고, 겸하여 순찰사(이광)ㆍ병마사(최원) ㆍ우수사(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영남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역시 같은 내용이다.

16일에는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원균의 공문이 왔고, 분통해 하며 다른 지휘관들에게 공문을 보냅니다. 17일에는 김성일에게서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키고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 공문이 옵니다. 수군은 둘로 갈라 번을 서는데 이 때 원래 번을 서던 병력과 교대하기 위해 온 병력이 집결합니다. 둘 다 부른 건지 이 때가 교대일인지는 모르겠군요.

20일. 김수에게서 적을 막을 수 없어서 전라수군을 지원해 달라고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는 공문을 받습니다. 이게 당시 시스템이었습니다. 수군은 애초에 합동작전을 하는 게 없었고,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를 구원할 때는 조정의 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도 이 관료제는 지켜야 했죠. 그런데 이상한 사람들은 겁 먹고 일부러 안 갔다고 까죠. 

26일 일기를 보면 좌부승지 민준이 조정은 멀리 있어서 지휘할 수 없으니 판단에 맡긴다는 서장을 보냈고 이에 이순신은 혼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 이광과 이일, 김수, 원균 등에게 그 곳의 사정과 수군이 모이는 날짜와 장소를 알려달라고 통보합니다. 한편 휘하 진포에 철저히 정비하여 명령을 기다리라고 하죠. 27일에는 휘하 전 병력에게 집결을 명합니다. 이 때 보성, 녹도 등이 3일이나 걸려서 제 때 오지 못 할까 걱정하지만, 29일에 도착하는 병력이라도 모아서 가기로 하죠. 

29일, 원균의 답문이 옵니다. 적선 500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등에 정박하고 각 고을을 다 점령했다는 거였죠. 그는 10척을 쳐부쉈지만 버틸 수가 없어서 후퇴했고, 경상우수영도 함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 달라고 하죠.
한편 정찰 나간 순천 수군이 돌아와서 남해현의 관청이 모두 비었고 현령은 도망간 것 같다고 보고합니다. 어이가 없었겠죠. 이 때 모인 병력의 편제를 짜고 30척밖에 안 돼서 이억기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이 날의 일기는 왜적에 대한 분노와 도망간 장수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분의 일이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되고 못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라."

29일자 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5월 4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우수사 이억기에게 뒤를 따라 오라고 전하고 남해군의 미조항으로 출항합니다. 이 때 남해도 주변의 4개 포구가 모두 비어 있었는데,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5일에는 마침내 당포에 도착했지만 만나기로 한 원균은 없었죠. 그는 6일이 돼서야 나타납니다.

이렇게 전설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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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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