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34073.html

통일신라 경주는 ‘메가시티’?
등록 : 2014.04.22 19:26 수정 : 2014.04.22 21:06 

지난해 5월 8세기 신라 도시 유적이 발견된 경주 외곽의 건천읍 모량리 일대 전경. 경주 왕경의 구역 행정단위 ‘방’(坊)의 전형적 얼개를 보여주는 격자 모양의 도로와 우물, 적심 건물터가 확인됐다. 8세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대 이후 경주의 인구 팽창으로 외곽 신도시가 만들어지고 오늘날 대도시처럼 왕경의 영역이 크게 뻗어나갔을 가능성이 커졌다.
 
도심서 10㎞ 떨어진 모량리서 격자형 도로·건물터 등 나와
‘삼국유사’의 왕경 포함 추정. 말방리 포함땐 도시 지름 30㎞
“위성도시일뿐 왕경 아냐” 반론도
 
신라 고도 경주에 가기 위해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면, 경주 시내에 이르기 전 큰 무덤떼를 지나치게 된다. 5~6세기 신라 6부 세력 중 하나인 모량부의 귀족 무덤들로 추정하는 금척리 고분군이다.
 
지난해 5월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이 무덤떼 근처의 건천읍 모량리·방내리 일대에서 발굴 도중 뜻밖의 수확을 올렸다. 경주 도심에서 서북쪽 10여㎞ 떨어진 들머리 길목인 동해남부선 철로 연결 예정터 일대를 파보았더니 정연하게 구획된 도로와 네모난 주거지, 우물, 초석 아래에 기초석을 다져 넣은 적심 건물 터가 나왔다. 너비 8~5m의 남북-동서축을 잇는 도로도 10군데나 발견됐다. 하진호 경주사무소장을 비롯한 팀원들은 흥분했다. 격자형 도로로 둘러싸인 이 도시 유적은 8세기 것으로, 경주 도심 왕경 유적의 도로·주거지 등과 얼개가 거의 같았다. 신라인의 경주 도시계획이 외곽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나온 것이다.



이 사실에 쾌재를 부른 학자는 경주 역사를 연구해온 박방룡 부산박물관 관장이었다. 그는 알고 지내던 한 수집가가 몇년 전 경주 북쪽 흥해읍 근처 신라 성터에서 주워 국립경주박물관에 기탁한 기와 한쪽을 떠올렸다. 주목한 건 기와에 새겨진 ‘태수방’(太樹坊) 지명이었다. 태수방은 큰 숲이란 뜻이다. 신라시대 숲이 무성해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불렸고, 땔감 조달이 쉬워 기와가마가 번창했던 모량리 일대로 추정된다. 그는 발굴 내용과 태수방명 기와를 분석한 끝에 최근 연구서 <신라도성>(학연문화사)을 펴내 경주가 거대도시 규모인 1360방(坊)으로 구획됐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사실로 실증됐다고 단정했다. 모량리 유적은 8~9세기 신라 하대에 경주 팽창에 따라 닦은 신도시로서, 당시 경주 왕경의 행정단위인 1360방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1 진한조를 보면, “신라 전성기 경주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 고위층 주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호를 가구로 치면, 5인 가구 기준 70만~80만, 심지어 100만 이상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 방은 고대 도시 구역의 기본 단위다. 모량리 유적과 1980~90년대 경주 도심 황룡사 왕경 유적 발굴 성과까지 포함하면, 1방의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160~120m로 추산된다. 발굴단은 모량리 일대에만 최소 200개 이상 방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른 방의 개수를 현재 경주 안팎의 땅 크기에 맞춰보면, 경주 도심은 900여방, 외곽의 모량리 방까지 합쳐 1360방에 얼추 들어맞게 된다. 방이 경주 남쪽의 불국사 근처 말방리까지 뻗어 있었다는 설(전덕재 단국대 교수)까지 넣으면, 고대 경주는 동서 30㎞, 남북 20㎞에 달하는 광역 대도시였다는 추정 또한 가능해진다. 지금 서울 한강 이남 지역의 면적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다.
 
신라 전성기 경주 도시 규모와 인구 수치는 일제강점기부터 후지시마와 윤무병을 비롯한 많은 한·일 학자들이 고민했던 부분이다. 모량리 유적 발굴로 1360방 설은 유력한 기반을 얻게 됐다. 하진호 소장은 “8~9세기 경주가 분지를 넘어 훨씬 광역화한 ‘메가시티’였음을 실증하는 증거”라고 했다. 불국사 쪽까지 신라 왕경이 연장됐다는 설을 펴온 전 교수도 박 관장의 확장설에 힘을 실었다. “모량리가 신라 때 경주 외곽의 군 주둔지이자 통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집중돼 방리제 도시계획이 집행됐으며, 그 뒤 8~9세기 확장된 왕경에 포함됐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강봉원 경주대 교수는 “모량리 유적과 경주 시내를 잇는 사이 길목에서는 왕경 유적이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위성도시로 볼 수 있어도 왕경에 넣기는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그간 학계에서는 주위가 산지로 둘러싸인 경주 분지의 도심과 주변의 좁은 공간 때문에 100만 가까운 인구가 살기는 어렵다며 <삼국유사> 기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쪽이었다. 그러나 모량리 발굴과 박 관장의 사료 분석으로 실물 증거가 일부 확보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은 좀더 설득력을 갖게 됐다. 21세기 경주 개발로 드러난 옛 경주의 개발 흔적들이 앞으로 신라 왕경에 얽힌 어떤 비사들을 풀어놓을지 주목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영남문화재연구원, 박방룡 관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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