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gik.ac.kr/~kayakim/openlec/Gimhae/Gimhae1-4.htm
4세기에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 백제,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 속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경쟁하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습니다.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김해시)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전기가야 해체와 영향
전기 가야연맹 해체는 한반도 전체와 일본의 고대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침
4세기에 가야연맹은 중국 남조, 백제, 왜를 연결하는 국제 교역망 속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경쟁하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고구려에게 후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이 군사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였습니다. 가야연맹의 대표 세력인 임나가라(김해시)는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대항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가야사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것이 한반도 및 동북아시아의 고대사에서 파생되는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첫째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결과입니다. 가야 소국들이 모두 망한 것은 아니지만, 성주, 창녕,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의 소국들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고 낙동강 하구의 주요 세력들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둘째로는 백제가 바다를 통하여 왜와 교역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5세기 들어 영산강 유역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이를 통하여 왜와의 교역을 지속해 나갔다고 보입니다. 신라는 가야와 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에 한동안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셋째로는 가야연맹 내의 후진 지역이었던 경상 내륙 지방과 왜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야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동강 하구의 주민들이 흩어져 경상 내륙 지방과 일본 열도 등으로 이주하면서, 제철 및 철기 제조 기술, 도질토기 제조기술 등이 전수되었다고 보입니다. 혹자는 가락국의 지배 세력이 일본열도로 집단 이주한 것을 가야의 쇠퇴 원인으로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5세기에 가야의 선진 기술이 외부로 파급되어, 고령을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이 형성되는 토대를 이루고, 일본 열도에 천황제 정권의 토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에서 천손이 하늘로부터 규슈(九州)의 ‘구시후루다케(久士布流多氣)’, 즉 구지봉(龜旨峰)에 하강한다는 내용은, 김해 세력의 파급과 관련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金泰植>
<金泰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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