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9941
이방원의 유언 조작... 정도전 두번 죽였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세 번째 이야기
11.11.03 14:07 l 최종 업데이트 11.11.03 14:29 l 김종성(qqqkim2000)
▲ <뿌리깊은 나무>의 태종 이방원 ⓒ sbs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화면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이 거명되는 인물이 있다. 삼봉 정도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얼굴 없는 제3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조선 건국공간에서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추구하다가 왕권 중심주의자 이방원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정도전. 그가 죽기 직전에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게 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조선의 시조는 이성계다. 하지만, 그는 형식적 시조에 불과했다. 태조 원년 7월 17일(1392.8.5) 조선을 세운 실질적 시조는 다름 아닌 정도전이었다. 건국을 향한 아이디어나 추동력은 기본적으로 정도전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도 그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었다.
건국의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예컨대, 경복궁 앞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는 도로의 구조, 경복궁이니 안국동이니 가회동이니 하는 사대문 안의 지명들도 기본적으로 그의 두개골에서 나왔다. 건국현장에서 정도전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정도전이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툭 하면 강조한 말이 있다. <태조실록>에 실린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그는 "유방(한나라 시조)이 장량(유방의 책사)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이성계가 정도전을 쓴 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쓴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성계가 자신의 머리를 빌린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의 군사력을 빌렸다는 의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이성계는 웃어 넘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계의 그릇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7년 8월 26일(1398.10.6)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조선은 실질적으로 정도전의 나라였다. 그날까지의 6년간은 이씨 조선이 아니라 정씨 조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 1398년 10월 6일 마지막 숨을 쉬기 직전에 정도전이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뿌리 깊은 나무>에서처럼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고 말했을까? 그날 밤 이경(二更, 밤 9~11시)에 벌어진 정도전 최후의 현장으로 가보자.
▲ 경복궁 흥례문. 정도전은 <시경>을 근거로 경복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 김종성
10월 6일 밤, 이방원의 쿠데타 단행...정도전의 최후는
10월 6일 밤, 이방원은 이숙번의 군대를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했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태조 7년 8월 26일자 <태조실록>에서는 "광화문에서부터 남산까지 철기(鐵騎, 철갑을 입은 기병)가 꽉 찼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이 상황을 묘사했다.
그 시각,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마루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광장 동쪽에는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다. 그곳이 바로 송현마루였다.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의 첩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정자에서 정도전은 남은을 비롯한 측근들과 더불어 10월 밤의 정취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집 대문 밖에는 두서너 필의 말이 있었고, 대문 근처의 노복들은 잠들어 있었다. 대문 안을 들여다 보니, 정도전과 남은 등이 등불을 밝힌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방원과 이숙번은 병력 10명으로 그 집을 포위했다.
이방원 측은 공격 개시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케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런 뒤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측근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했다. 옆집은 전 판서인 민부의 집이었다. 민부가 먼저 말했다.
"배가 볼록한 자가 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건국 이후, 정도전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것저것 써야 할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과체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활습관도 복부비만에 한몫 했을 것이다.
▲ 광화문 광장의 동쪽에 있는 한국일보 터(오른쪽). 이곳에서 정도전이 살해되었다. 왼쪽에 있는 건축물은 동십자각. ⓒ 네이버 지도 거리뷰
'배가 볼록한 자'라는 말에 이방원은 정도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수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목이 베였다.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이때 정도전이 남긴 그 한마디가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이방원 측의 기록과 정도전 측의 기록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 기록된 <태조실록>에 따르면, 침실에 숨어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수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한다.
수하들이 칼을 버리라고 꾸짖자, 정도전은 칼을 문 밖으로 던지고는 이방원에게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태조실록>에서는 그가 "바라옵건대, 한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으시니, 바라옵건대 이번에도 살려주소서"라고 했다고 한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다'는 것은 건국 직전에 정몽주가 정도전을 암살하려 했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함으로써 정도전이 극적으로 회생한 일을 가리킨다. 정도전이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이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이를 반박하는 자료가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 한 수가 그것이다. 제목은 자조(自嘲)다. '나를 비웃다'란 뜻의 시다.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맘으로 공을 세워(操存省察兩加功)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不負聖賢黃卷中)
삼심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三十年來勤苦業)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松亭一醉竟成空)
이방원은 왜 정도전 유언을 조작했나
▲ <삼봉집>에 실린 ‘자조.’ ⓒ 정도전
이 시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에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 수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나타난 또 다른 이미지는, 최후까지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는 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관조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정도전이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갈구했다고 했지만, '자조'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의 정도전은 한 잔 술과 함께 물거품이 된 57년 인생을 관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이해관계에 얽매인 행동이다. '자조' 속의 정도전은 그런 이해관계마저도 초월해서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를 비웃는 달관의 여유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 측이 정도전을 폄하하는 데 급급했다는 점, 이방원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시가 정도전의 문집에 존재한다는 점 등을 볼 때, 우리는 정도전의 마지막 유언이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자조'였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정도전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를 관조할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놓친 정도전은, 최후의 순간에는 사대부 중심이니 왕권 중심이니 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마저도 다 털어내고 자신의 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스스로를 비웃는 철학자적 여유를 보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최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꽤 멋있는 최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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