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74230
조광조는 왜 중종에게 개개고도 무사했나
[역사, 그 밖의 이야기들 11편] 동아시아에서 충신의 조건
11.05.30 16:13 l 최종 업데이트 11.05.30 16:13 l 김종성(qqqkim2000)
▲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인 조광조. 출처: 고등학교 <한국사>. ⓒ 비상교육
충신의 조건은 무엇일까? 임금이 가자고 하면 교회든 절이든 군말 않고 따라가는 사람이 충신일까?
이 점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적으로 귀감이 될 만하다. 물론 선비들이라고 해서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확신하는 문제에서만큼은 임금 앞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았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서 조선 왕실의 종교 문제를 들 수 있다. 유교를 국시로 삼았는데도 조선 왕실에서 신선교(혹은 도교)와 불교에 대한 신앙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들은 신선교나 불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임금에 맞서 수백 년간 투쟁을 벌였다.
물론 어느 종교가 옳은가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글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선비들의 소신을 다룰 뿐이다. 종교 문제와 관련된 선비들의 소신을 입증하는 두 건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선시대 '충신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가뭄이 들 때 기우제를 지낸다든가 왕족이 아플 때 하늘에 비는 역할은 신선교가 수행했다. 소격서(昭格署)라는 기구가 이런 책임을 맡았다. 그래서 이 기구는 선비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
이 점에서, 가장 과격성을 보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정권을 잡은 뒤 정부 전체를 움직여 소격서 폐지운동을 전개했다. 중종이 "이것만은 안 된다"며 버티자, 그는 승정원(비서실)까지 동원해서 사실상의 '정부 총파업'을 단행했다.
그래도 중종이 말을 안 듣자, 그는 중종 13년 9월 1일(1518.10.5)부터 승정원에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궁궐 안에서 목청껏 구호를 외쳐댔다. 결국 9월 2일 밤, 중종은 굴복하고 말았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이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처리하자'고 했지만, 조광조는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처리해 달라고 떼를 쓴 것이다.
▲ 소격서 터. 서울시 종로구 소격서동 소재. ⓒ 문화재 지리정보 서비스
조선시대의 후궁들 중 상당수는, 남편이 죽은 뒤 궁을 나와 정업원·안일원·자수궁 같은 비구니 사찰에 들어가 부처를 모시면서 여생을 마쳤다. 유교국가의 왕실에서 이처럼 불교를 신봉했으니, 선비들이 얼마나 분개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교를 신봉하는 신하들은 '후궁들의 비구니 행(行)을 금지시켜 달라'고 왕에게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이것은 조선왕조의 절반이 훨씬 넘도록 고쳐지지 않았다. 신하들이 임금을 마음을 겨우겨우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은 제18대 현종 때인 1661년이었다.
이때 왕명을 받아낸 신하들은 한성에 있는 모든 비구니 사찰을 철폐하고 관련 건물까지 싹 다 허물어 버렸다. 이때 자수궁에서 빼낸 목재가 성균관 비천당 건물에 사용되었다.
"아니되옵니다"가 미덕인줄 알았던 조선의 선비들
▲ 성균관 비천당. 서울시 종로구 명륜동 소재. ⓒ 김종성
저명한 일본학 연구자인 루스 베네닉트는 <국화와 칼> 제6장에서, 일본에서는 충효가 최상의 가치이지만 중국에서는 덕(德) 혹은 인(仁)이 충효보다 상위에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인은 군주의 명령을 최상위에 두지만, 중국인은 그것이 보편적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따져본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중국인들과 똑같았다. 아니, 중국인들보다 한 술 더 떴다. 그들이 그렇게 된 데는 유교 경전의 영향이 무엇보다 컸다. '충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유교의 가르침이 그들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유교 경전 몇 구절을 살펴보자.
<맹자> '공손추' 편에서는 "장차 큰일을 할 군주에게는, (쉽게) 부르지 않는 신하가 반드시 있다"(將大有爲之君, 必有所不召之臣)고 했다. 임금이 큰 일을 하려면, '쉽게 부를 수 없는 신하' 즉 '대하기 힘든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자신들이 그런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들은 왕의 명령이 보편적 가치관에 부합할 때만 왕에게 복종했다. 왕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그들은 조광조가 그랬던 것처럼 한밤중에라도 임금을 찾아가 괴롭히곤 했다. 그들은 임금이 대하기 편한 신하가 아닌, 임금이 대하기 곤란한 신하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니 되옵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입버릇처럼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것은 한국 사료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맹자>의 나라 중국에서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선비들의 필독서인 <서경> '여형' 편에도 '충신의 조건'에 관한 메시지가 있다. 이것은 주나라 목왕(기원전 947년 사망)이 왕실 구성원들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들 역시 신하였으므로 이 메시지는 신하 일반에 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형벌하라 하더라도 (너희는) 형벌을 집행하지 말고, (내가) 용서하라 해도 (너희는) 용서하지 말라."(雖畏勿畏, 雖休勿休) 참고로, 주나라 시대에는 외(畏)라는 글자가 '형벌'의 의미로도, 휴(休)라는 글자가 '용서'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목왕의 메시지는 군주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신하가 되라는 것이었다.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군주를 바로잡는 사람이 진정한 충신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신하가 아니라 군주 자신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만큼 한국·중국에서는 임금 앞에서 소신을 지키는 것이, 군주와 신하가 공감하는 '충신의 조건'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군주가 죽으라면 무조건 죽는 신하, 죽기 힘들면 죽은 척이라도 하는 신하는 진정한 충신이 아니었다. 군주가 옳으면 충성하고 군주가 그릇되면 비판하는 게 이상적인 충신이었다. '까라면 까는 신하'는 충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유교의 군신관계
▲ 조광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도봉서원. 서울시 도봉산 소재. ⓒ 김종성
유교는 이미 상당부분 시대에 뒤처졌지만, 군신관계에 관한 유교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통치자와 부하 관료의 관계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통치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 하에 그의 말이 옳든 그르든 무조건 맹종하는 관료. 통치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신(神)도 바꿀 수 있는 관료. 통치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개종까지는 않더라도, 다니던 교회 말고 다른 교회, 다니던 사찰 말고 다른 사찰로 갈 수 있는 관료.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 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군주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진정한 충신이 될 수 없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면, 통치자의 종교까지 바꿀 수 있는 관료.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면, 통치자를 자신이 다니는 교회나 절로 모셔올 수 있는 관료. 그런 신하가 유교 경전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충신이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통치자에게는 물론 국민에게도 진정한 충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진정한 충신이라면, 통치자의 종교를 바꾸거나 혹은 교회·사찰을 바꾸지는 않더라도 신앙의 세부적인 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통치자 앞에서 소신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사적인 자리에서 통치자가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나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진정 소신이 있는 관료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 말씀을 직접 읽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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