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370

태종의 오른팔 이숙번의 몰락
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67
[377호] 2013년 11월 14일 (목) 10:59:05 김성철  nhsd@hanmail.net  

       이숙번, 24년간의 끝없는 유배생활 - 남해타임즈  http://tadream.tistory.com/11307  
   

▲ 남해유배문학관 관장  

약관의 나이로 1393년(태조2) 3월 조선시대 최초로 실시된 식년문과에 합격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숙번(李叔蕃). 문과로 등용되었지만 장수기질을 타고나 1398년 이방원과 함께 정도전 등을 제거했으며, 1400년(중종 2) 이방원을 견제하던 이방간을 제거함으로써 이방원을 왕위에 올린 핵심 인물이었다.

조선 초기 문무를 겸비한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로 태종 왕권강화를 위해 선봉에 섰던 이숙번이 몰락한 것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가져다 준 오만방자함 때문이었다. 태종은 1415년 5월 17일 이숙번은 안성부원군으로, 하륜은 진산부원군으로 삼으면서 공신을 보전하기 위해 직책을 맡기지 않았다. 1416년 4월, 마흔넷의 이숙번은 집에서만 은거하기에는 답답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왕의 신임을 다시 물었다.

왕은 이숙번에게 갑사 서른을 맡겨 호종을 허락했다.

방약무인한 이숙번에게 내린 신임은 그를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태종은 이 일로 이숙번이 치를 고난을 알고 있으면서도 호종을 윤허했다. 격랑의 시절을 함께 한 동지, 자신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공신이었지만 이제는 정리할 때가 된 것을 알고 있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처리한다는 세상사의 순리를 알지 못한 이숙번은 영원한 권력욕에 빠져 일생일대의 패착을 두고 말았다.

대간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태종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중신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박은이 나섰다. 성품이 대쪽 같아 병조, 호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냈지만 비바람을 가릴 집 한 채만 가질 정도로 청빈했던 박은은 더 이상 이숙번의 횡포를 볼 수 없어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버리시오소서. 버려야 나라가 굳건해지옵니다. 창업초기에는 이숙번 같은 인재가 필요하지만 종사의 터전이 잡힌 지금은 물러나 있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전하를 위한 일이요, 종사를 위한 일이옵니다. 아울러 이숙번의 여생을 편하게 하는 일이옵니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위해서는 30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첫 10년은 후유증을 다스리고, 다음 10년은 기틀을 다져야 하며, 마지막 10년은 다음 시대를 여는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성군의 소임은 이 시대를 위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지금은 다음 시대를 준비하여야 하는 때입니다. 창업 공신들에 연연하시면 아니되옵니다" 태종은 박은의 충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성군과의 정리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해 보릿고개는 유난히도 험했다. 죽으면서 넘어야 하는 보릿고개에 가뭄까지 겹쳐 가을걷이마저 불안한 상태였다. 이때 박은이 파격적으로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숙번은 자신을 탄핵한 박은의 소식을 듣고 경악하고 말았다.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다는 속담처럼 이숙번은 왕명을 어기고 말았다. 좌대언 서선이 칼을 꽂았다.

"지난 5월 25일 왕명을 받고 이숙번에게 박은이 우의정이 되었다 하니, `박은은 내 밑에 있었는데 명이 통하는 자`라 하며 기뻐하지 않았사옵니다. 그 마음은 필시 `어찌 나를 버리고 박은을 천거했냐`고 원망하는 것이었니다. 그리고 기생과 첩의 집에 드나들면서도 병을 칭하여 입궐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숙번은 여러 번 칭병하여 입시하지 않았다. 이는 마땅히 불경죄로 다스려야 하지만 나름대로의 연유가 있을 것이다. 예조우참의 정효문에게 이르노니 다만 병 중이 아니었다면 물러나 있을 곳을 자원하라."자원방치. 유배형 중 가장 가벼운 형벌이기는 하지만 이숙번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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