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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 - 엔하위키미러"에서 "4. 최후"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정도전의 최후
* "정도전 - 엔하위키미러"에서 "4. 최후"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정도전의 최후
4. 최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최후는 매우 비굴한데 이방원에게 "예전에 정안군(태종 이방원)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빌자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그리 부족하냐? 어째서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라고 일축하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 뒤에 분위기가 다른 장면을 실어 놓았는데, 아들 정담이 "오늘은 정안대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거늘, 또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죽기 직전에 남긴 절명시도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양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 속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네.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이룬 공업, 송현방[16] 한 잔 술에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
또한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침실 안에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실록 기록에서는 단검을 쥐었어도 소심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고 하고 곧 이방원의 종자 소근의 호통을 듣고 단검을 버린 뒤 끌려나와 위의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지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단검'을 왜 쥐고 있었는지는 의문. 이 기록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기록들 때문에 실록 속의 비굴한 최후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비하된 감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사실 태조실록에서 왕자의 난 부분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기도 하고. 단, 정도전의 절명시 자조는 실록에 없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아들의 말에 대한 대답 "내가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는 분명 실록에 있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과는 많이 다른 장면이라서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들을 이간질시키고 해하려 했다는 종친모해죄였다.
삼봉집의 부록 <사실>의 주석에 의하면 정도전이 죽을 무렵에 "남산에 가서 돌을 깨니, 정(釘)이 남아나지 않는구나(南山往伐石釘無餘)"라는 노래가 돌았다고 한다. 여기서 '남'은 남은을 뜻하고 '정(釘)'은 '정(鄭)'과 읽는 음이 같아 정도전을 뜻한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정도전과 남은은 같은 날에 살해되었다. 말하자면 사망 플래그가 당대에도 돌았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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