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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번
(1373-1440)
조선초기의 관료. 본관은 안성.
1. 태종의 일등공신
1393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지안산군사, 즉 안산군의 지사를 지내는 중에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때 이방원을 도와 경복궁으로 병력을 출동시켰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주선으로 맨 처음에 이방원을 만났을때 자신을 돕겠냐는 이방원에게 "그런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일보다 쉬운 일이다."라면서 패기있는 대답을 하여 이방원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우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에도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제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에 진압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이런 공으로 좌명공신 1등에 봉해지고 의정부 찬성에까지 벼슬이 오르게 되었다.
2. 안하무인 권신
이방원이 왕이 되어 태종이 된 후로 이숙번은 거의 안하무인으로 권세를 누렸다. 사실 태종과 각별한 사이였으니 당연할수도 있겠지만. 이숙번이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던지 실록에 의하면 이숙번의 집이 돈의문(서대문) 안에 있었는데 한양의 큰 성문이니 당연히 사람들이 오가고 우마소리가 들리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이숙번은 씨바 시끄럽다. 돈의문 막아라라고 하며 서대문을 틀어막아버렸다. 조선왕조 역사상 많은 권신과 간신이 있었으나 정상적으로 다니는 성의 대문을 틀어막은건 이숙번이 거의 유일무이하다고 봐도 좋을 정도. 이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 즉 성문을 막아버린 집이라고 부르며 손가락질 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성에 조정에서 새로 성문을 만들어서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문으로 가는 길이 이숙번의 집 앞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자 이숙번은 친절하게도 "인덕궁 앞에 작은 동네가 있는데 거기다 길 내고 문 세우시죠?"라고 하자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인덕궁은 상왕 정종이 거처하는 궁이었다. 아무리 정종이 바지사장이라지만 상왕이자 현 국왕의 형이었다. 하지만 내 집앞이 조용할 수 있다면 상왕 집앞이 시끄러워도 상관없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니 집앞이 아니면 된다 이거냐! 본격 님비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단순히 예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집 앞에 문 놓기 싫다고 상왕 집 문 앞으로 바꿀 정도로 힘이 셌다는 것이다.
이숙번의 행패와 패악질이 한두가지가 아니고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태종은 그럴때마다 쉴드를 쳐주면서 이숙번을 보호했다.
3. 몰락
그런데 맹인 중이 사대부가의 과부와 간통한 일이 있었는데 온 조정이 '목을 치졈?' 하는데 혼자서 법에 곤장을 치랬는데 목을 왜 자름? 하고 살려주자고 했다. 자비롭다?
하지만 사안이 충격적이다 보니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서 둘다 목이 잘렸는데 삐진 이숙번은 궐에 나오지도 않고 파업을 하면서 태종의 부름조차 씹고 개겨 태종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다. 거기에 양녕대군을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사람을 억울하게 죽였으니 이런 미친 짓이 어디있음? 하고 국정을 까면서 태종을 간접적으로 까버렸고 이게 태종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때 자기 밑에 있었던 박은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은근히 불만을 표시했고 이것 역시 태종에게 보고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417년, 양녕대군이 사고를 치고 근신하던 중에 선공감의 비리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온 구종수 형제가 후일을 도모하려고 양녕대군에게 주색을 제공하면서[1] 비단도 뇌물로 바친 사건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양녕대군이 사고를 쳐서 골치가 아프던 태종에게 이 사건은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고 구종수 형제는 다시 저 머나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2]
그런데 유배된 구종수 형제는 다시 정신을 못차리고 이숙번에게 편지를 보내 세자님하께 말과 활을 보내주셈이라고 했다가 이게 이숙번의 발목을 잡아버렸다. 거기에 태종이 이숙번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소문이 돌자 대간이 이숙번 그 인간 졸라 싸가지가 없어요. 라는 소를 올렸는데 태종이 즉각 지방에 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과거 민씨 형제들과 이거이 부자의 전례를 생각한 대간은 죽이셈! 죽이셈! 하고 신나게 굿판을 벌였지만 태종은 이숙번이 천성이 거칠어 가끔 무례한 짓을 할 뿐이지 나쁜 놈은 아니다. 라면서도 함양으로 유배를 보내버리곤 죽을 때까지 찾지 않았다.
태종이 자신의 최측근인 이숙번을 유배보낸 것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에서였다는 분석이 많다. 또 중전 민씨의 남동생들을 모조리 죽인 태종이라 최측근까지도 내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패악질이 더이상 두고못볼 정도였든지 게다가 역시 패악이 심했지만 늙은 하륜과는 달리 이숙번은 40대의 창창한 나이였고 태종이 죽은 이후 세자를 가지고 놀 소지가 있었기에 그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태종은 죽기전 세종대왕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선 안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죽었다고 한다. 세종은 아버지의 말씀을 충실하게 받들어서 이숙번의 유배를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4. 말년
다만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세종 20년), 이숙번이 태종의 최측근이라 태종의 예전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자료 수집차 잠시 유배를 풀어서 한양으로 올라오게 했다고 한다. 이숙번은 그때도 전혀 예전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유배에서 풀려난 사람인 것처럼 안하무인으로 굴었다고 한다. 은근히 이숙번은 세종이 자신을 다시 등용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지만 꿈은 높아도 현실이 시궁창인 법이라(…) 세종은 용비어천가 자료수집이 끝나자 함양 유배조치를 풀어 수도 근처인 경기도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조치해줬으나 끝끝내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더니 고작 2년후 병으로 사망했다(세종 22년).[3]
5. 평가
사실 이숙번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조선 최초의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능력도 없지는 않았던 인물이었으나 스스로 태종의 최측근이라고 자부하면서 오만 방자하게 굴었던 것이 결국 남은 일평생 유배지에서 살다가 죽는 원인이 되었다. 같은 태종의 최측근이자 모사였던 하륜이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고 고위 관료로 살아남은 것을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인생무상이라 할 만하다.
태종의 후계자인 세종대왕은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반역'이나 '불충'을 꾀한 적은 없지만 태종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사실 세종의 치세에서 이숙번 같은 타입의 신하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 다음은 세종이 이숙번을 평가한 말이다.[4]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선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지,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러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한(漢)나라 양혼(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선유(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2월 7일
6. 현대 매체에서의 이숙번
용의 눈물에선 선동혁 씨가, 대왕 세종에선 김주영 씨가 배역을 맡았다.[5]
용의 눈물에서는 임혁이 분한 하륜과 함께 태종의 양팔 중 하나에 걸맞는 인물로 등장하며 지모가 뛰어난 책사의 이미지는 물론 무장으로서의 이미지도 두드러진다. 글자 그대로 '책사' 그 자체인 하륜에 비하면 이숙번은 다혈질에 오만불손한 면모도 지니고 있지만 하륜 못지 않게 날카로운 통찰력과 치밀함에 무용까지 겸비한 인물로 묘사된다. 무장으로서는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데 그 실력이 절품이라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때 눈부신 무용을 보여준다. 또한 태종에게 충성하기는 하지만 '맹목적'인 충성만은 아니라는 것 역시 특이점.
조사의의 난 당시 아버지에 칼을 들 것을 주저하는 태종에게 "전하께선 용상을 버리실 작정이시옵니까? 그 조사의란 자에게 옥좌를 넘겨주실 것이옵니까?[6] 정치에 인정을 둘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전하이시옵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사옵니다. 무인년에 전하께선 정씨의 나라를 막기 위해 정도전을 죽이셨사옵니다. 이제 조씨의 나라를 막기 위해 전하께서 다시 나서셔야 하옵니다"라며 일갈하는 용자 포스도 보여준다.[7] 또한 숙청될 때 태종과 함께 마지막 술을 마시고 깨끗하게 떠나는 장면도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극중에서 꽤 매력적인 캐릭터이며 해당 배우인 선동혁 역시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덧붙여 이 사극에서 이숙번의 부인 정씨 역으로 송윤아가 출연했다.
대왕 세종의 경우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공신 버프+왕의 신임[8]을 받아 안하무인의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용의 눈물에서 지략가적인 이미지도 두드러졌던 것에 비하면 여기서는 다혈질적인 면모만 부각되었다. 이후 세자인 양녕대군과 너무 가깝게 지낸 나머지 세자의 소원인 요동 정벌을 위해 병력까지 제공[9]하다가 태종에게 숙청당한다. 이때 태종과 마지막으로 술자리를 한 후 쫒겨나는 장면이 나름대로 명장면이다. 용의 눈물에서 따온 것 같기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해석하기를 탐욕스럽기는 이숙번에 밀리지 않았던 하륜은 끝까지 남고 이숙번만 쫓겨난 이유는 '하륜이야 이미 늙어서 다음 왕이 즉위할 때 쯤이면 이미 죽어있을 테니 걱정 없는데, 이숙번은 아직 젊기 때문에 세자를 갖고 놀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 이야기는 앞서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의 입을 빌려 이미 등장했던 해석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선 뮤지컬 배우 조순창이 배역을 연기 했다. 드라마 거의 끝인 45화 부터 등장하며, 배우 인터뷰에 의하면 작중 이지란으로 등장하는 선동혁에게 이숙번 연기에 대해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6월 15일 방송분에서 배우개그가 나왔다. 이지란과 이숙번이 만나는 장면에서 용의 눈물에서 이숙번을 연기했던 선동혁이 ' 숙번, 숙번이? 많이 듣던 이름인데?'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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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구종수 형제는 세자궁의 담을 넘어서(!) 들어가서 양녕대군에게 주색향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참 대단한 형제 납셨네요 그죠?
[2] 사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사건일 수도 있지만, 태종이 이렇게 격노했던건 세자에게 뇌물을 주고 후일을 도모하려고 했던 그 발상 탓이 더 컸다. 안 그래도 양위 소동을 일으켜서 중전 민씨의 집안을 박살냈던 태종인데...
[3] 죽기 전까지 함양 유배지로 돌려보내야 된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세종은 "이숙번이 쟤가 좀 아파서 그럼."하면서 쉴드를 좀 쳐주긴 했다.
[4] 그런데 세종은 하륜에 대해서는 이숙번에 비해 평가를 매우 짜게 주었다. 솔직히 오만방자한건 이숙번이 더 심했는데
[5] 여담이지만 훗날 정도전(드라마)에서 선동혁은 이지란을, 김주영은 조민수를 연기하게 된다.
[6] 옆에 있던 민무구가 이숙번의 이 말을 듣고 놀라 그 무슨 불경한 말이냐고 깜놀했다.
[7] 이 대사를 들은 태종의 대답도 폭풍간지다. "숙번이 네놈은 참으로 무서운 놈이로구나,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으로 과인을 밀어넣는구먼... 그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지... 어차피 나라는 사람은 피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래 칼을 들 것이야... 이 지사 잘 기억해두게, 역사는 이 시대를 가리켜 오로지 옥좌만을 탐해서 아비에게까지 칼을 든 폭군은 이방원이었어도 그의 옆에는 항상 무뢰한인 이숙번이 있었다고 기록할 것일세." 이 말에 이숙번은 웃으면서 난세엔 악역을 맡을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8] 태종과도 격식을 놓은 채 태연히 대화한다. 이때의 모습은 왕과 신하라기 보다는 거의 형님/아우 사이.
[9] 여담으로 이 행동에 제대로 열받은 황희(김갑수)는 이숙번의 멱살을 잡고 폭언을 한다(...). "군사 수천을 네 마음대로 움직여? 그게 병판이란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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