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xNBy5M
<3>조선에도 신예 함선 건조사업이 있었다
2012. 01. 16 00:00 입력 | 2013. 01. 05 07:35 수정
1592년 7월 한산해전에 참여한 삼도 수군의 함선은 58척이었는데, 이 가운데 거북선이 3척이고 판옥선이 55척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의 척수는 1592년 3척, 1595년 5척을 보유해 운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그 이후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몇척이 더 건조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을 판옥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각선도본(各船圖本)의 판옥선도. [필자제공]
판옥선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가. 판옥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조선은 맹선(猛船)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맹선은 대맹선·중맹선·소맹선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80명·60명·30명이 승선하는 규모의 함선이었다. 그런데 중종대에 이르러 점차 속력이 빠른 소맹선 중심으로 함선이 운용되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 참찬관으로 있던 서후(徐厚)가 임금께 조강에서 건의한 내용이다. “남방(南方)의 전함(戰艦)은 옛날부터 둬 오는 것인데, 지금은 대맹선을 쓸데없다 하여 다 버리고 소선(小船)만 쓰고 있습니다. 소선이 다른 배를 쫓기에는 빠르지만 육박해 싸우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또 전사(戰士)를 많이 태우지 못하고 적군이 기어오르기도 쉽습니다. 만일 한 적(賊)이 칼을 빼어 들고 돌입하면 용맹한 병사라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함(大艦)은 높고 가팔라서 기어오르기는 어렵게 됐고 내려다보며 제어하기에는 편리합니다.” 한마디로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려면 큰 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건의의 주된 내용이다. 이 기록은 1521년(중종 16년) 5월의 ‘중종실록’에 실려 있으니 임진왜란 발발 71년 전의 일이다.
유사한 내용의 건의가 임진왜란 발발 48년 전인 1544년(중종 39년) 9월의 ‘중종실록’에 다시 보인다. 이번엔 86세의 명신(名臣) 판중추부사 송흠(宋欽)의 상소 내용이다. “듣건대 그(중국) 배는 단단하기가 여느 것과 달라서 사면에 다 널빤지로 집을 만들고 또 가운데가 넓어 100여 인을 포용할 만하며 그 밖의 기계도 정비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가는 데마다 대적할 자가 없고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것과 달라서 연변(沿邊)의 요해지에 전함을 갖춘 것이 별로 없고, 공사(公私)의 배가 많이 있기는 하나 거의 다 좁고 사면이 다 허술해 가려 막은 것이 없으며 또 화포는 오래되고 화약의 힘은 효력이 없으므로 저 중국 사람의 화포에 비하면 참으로 아이들 장난입니다…. 기계 가운데서도 전함은 더욱이 중요한데, 탈 만한 전함이 없다면 양장(良將) 정졸(精卒)이 있더라도 어떻게 적을 막겠습니까? 배를 만들 때에는 반드시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모두 당인(唐人: 중국인)의 배와 같이 해야 합니다(중략)……. 우리나라 변장은 적선 하나를 만나도 낭패해 감히 대항하지 못하니, 만일 왜적이 자기 나라 배를 몽땅 거느리고 길을 나눠 침략해 온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려면 중국의 배처럼 널빤지로 장벽을 두른 큰 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송흠의 주장이다.
이런 계속적인 논의를 거쳐 드디어 1555년(명종 10년) 9월 판옥선 시제품이 만들어졌으니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의 일이다. 이후 10여 년 동안 대대적으로 건조돼 대개 임진왜란 발발 27년 전까지 조선의 주력함선은 맹선에서 판옥선으로 교체가 완료됐다.
그렇다면 판옥선은 어떤 배인가. 판옥선의 기본 건조 개념은 첫째, 일본에 비해 큰 대함(大艦)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중국의 배처럼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적군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함선이 필요하게 된 데는 특히 왜구의 해전 전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 수군은 왜구가 출현하게 되면 총통과 활을 쏘면서 공격하게 되는데, 왜구가 쏜살같이 접근해 배에 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면 칼싸움에 능한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왜구와의 해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사방을 널빤지로 둘러싼 큰 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큰 배가 만들어진다면 왜구는 마치 성 아래에서 성 위를 기어올라가야 하는 것 같은 국면이 추가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펼쳐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된다. 실제로 판옥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집 모양의 상장(上粧) 구조물을 설치해 그 사이로 노를 내밀어 저을 수 있게 돼 있다.
이런 계속적인 논의를 거쳐 드디어 1555년(명종 10년) 9월 판옥선 시제품이 만들어졌으니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의 일이다. 이후 10여 년 동안 대대적으로 건조돼 대개 임진왜란 발발 27년 전까지 조선의 주력함선은 맹선에서 판옥선으로 교체가 완료됐다.
그렇다면 판옥선은 어떤 배인가. 판옥선의 기본 건조 개념은 첫째, 일본에 비해 큰 대함(大艦)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중국의 배처럼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적군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함선이 필요하게 된 데는 특히 왜구의 해전 전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 수군은 왜구가 출현하게 되면 총통과 활을 쏘면서 공격하게 되는데, 왜구가 쏜살같이 접근해 배에 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면 칼싸움에 능한 그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왜구와의 해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사방을 널빤지로 둘러싼 큰 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큰 배가 만들어진다면 왜구는 마치 성 아래에서 성 위를 기어올라가야 하는 것 같은 국면이 추가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을 펼쳐보기도 전에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된다. 실제로 판옥선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판옥선은 선체 위에 하체의 너비보다 넓은 집 모양의 상장(上粧) 구조물을 설치해 그 사이로 노를 내밀어 저을 수 있게 돼 있다.
판옥선의 함선으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격군을 각각 1, 2층의 갑판에 분리해 각자의 기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했다. 둘째, 함선 자체가 크고 전투원들이 2층 갑판에 배치돼 있어 적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다. 셋째, 널빤지로 사방을 두른 2층의 상장 구조물이 성벽과 같은 역할을 해 적군이 쉽게 뛰어오를 수가 없었다. 넷째, 노를 젓는 격군이 상장 구조물 안쪽에 있어 조총이나 활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됐다. 이런 구조적 장점이 있는 판옥선은 임진왜란·정유재란 해전에서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산해전에 참여한 조선의 함선은 58척이었고, 일본의 함선은 73척이었는데, 전투 결과 일본 함선은 59척이 격파됐는 데 반해 조선 함선은 단 1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한산해전에서 일본 수군의 전사자는 대략 90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조선 수군의 전사자는 5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13척으로 133척과 대적했던 명량해전에서도 일본 함선은 31척이 격파됐지만 조선 함선은 단 1척도 격파되지 않았다. 전사자는 일본 수군은 최소 2500명 이상이었던 반면 조선 수군은 30명 미만이었다. 대량살육전 위주의 당시의 전쟁 양상을 고려해 보았을 때 세계해전 사상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리요,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조선의 신예 함선 건조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판옥선이 있었다. 판옥선은 그야말로 ‘왜구대비용 맞춤형 함선’이었던 것이다. 1592년 7월 한산해전에 참여한 삼도 수군의 함선은 58척이었는데, 이 가운데 거북선이 3척이고 판옥선이 55척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거북선의 척수는 1592년 3척, 1595년 5척을 보유해 운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그 이후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몇 척이 더 건조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을 판옥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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