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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이순신 병법(1):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하라
가용함대 통합 운영…‘전투력 집중’의 모범
2012. 02. 20   00:00 입력 | 2013. 01. 05   07:42 수정

필자가 처음 이순신을 접했을 때 그는 큰 산과도 같았다. 50여 척의 함선으로 학익진을 펼쳐 수적으로 우세한 70척의 일본 함선과 싸워 승리한 한산해전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척을 갖고 300여 척 또는 500여 척의 일본 함선과 싸워 이겼다는 명량해전 이야기를 접할 때는 이순신은 해전에 관한한 거의 신(神)의 경지에 오른 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해서 이순신은 나에게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싸워 이긴 분으로 각인됐으며 그 뒤에 접한 이순신 이야기의 대부분도 이와 같은 이야기 구조로 구성돼 있었다. 한마디로 이순신은 일당백으로 악의 무리를 물리치는 영웅전이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그려져 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거제도 옥포대첩기념공원 내에 있는 옥포대첩기념탑과 주변의 조각상들.필자제공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조선 수군은 네 차례의 출동에서 총 16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펼쳤다. 

제1차 출동에서 동원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의 함선 세력은 91척이었는데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30여 척이었고, 두 번째 합포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5척이었으며, 세 번째 적진포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13척이었다. 이른바 제1차 출동 중에 치른 세 번의 해전, 이른바 옥포해전·합포해전·적진포해전에서 각각 91대30, 91대5, 91대13의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조선 수군이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이 아니라 반대로 엄청나게 우세한 상황에서의 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출동은 제1차 출동과 마찬가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함께했는데 함선 세력은 판옥선·거북선 등의 전투함만 26척이었다. 첫 번째 사천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13척이었으며 두 번째 당포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21척이었다. 26대13, 26대21의 전투였다. 사천해전·당포해전 역시 열세의 상황이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당포해전의 경우 처음으로 조선과 일본의 함선 척수가 비슷한 26대21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해전의 결과를 보면 조선 함선은 단 1척도 격파되지 않은 반면 일본 함선은 21척 모두 격파됐다. 전투력의 질적 측면에서도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 비해 훨씬 우위에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 해전이다. 세 번째 해전인 당항포해전에 앞서서는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우수군 함선 25척이 합세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조선 수군의 함선 세력은 총 51척이 됐다. 당항포해전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26척이었으니 51대26의 싸움이었던 셈이다. 네 번째 해전인 율포해전에서 만난 일본 함선은 7척으로 이 또한 51대7이라는 절대 우위의 상황에서의 해전이었다. 요약하면 제2차 출동 중 벌어진 네 차례의 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각각 26대13, 26대21, 51대26, 51대7의 전투를 벌인 것이다. 수적 측면에서 절대 우세였음을 알 수 있으며 전투력의 질적인 측면까지를 고려한다면 일본 수군에 대한 조선 수군의 우세 상황은 그 격차가 훨씬 커진다.

제3차 출동에서 있었던 한산대첩은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한산도해전에 동원된 조선 함선은 3척의 거북선을 포함해 전투함이 58척이었으며 이에 맞선 일본 함선은 73척이었다. 처음으로 수적 측면에서 열세의 상황이었지만 질적 전투력 측면에서는 결코 열세가 아니었다. 한산도해전 결과 조선 수군의 함선은 단 1척도 격파되지 않았던 반면 일본의 함선은 73척 가운데 59척이 격파 또는 나포됐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 준다. 3차 출동 두 번째 해전인 안골포해전은 명실상부한 해전이 아니었다. 한산도해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골포의 일본 수군 장수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야키 등이 포구 깊숙이 함선을 정박시켜 놓고 나와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조선 수군은 안골포 포구에 정박해 있는 42척의 일본 함선에 대해 교대로 포구를 출입하면서 공격을 가해 20여 척을 격파했다. 비록 힘든 전투였지만 안골포해전 또한 58대42의 수적 우세 상황에서 벌어진 해전이었다. 

임진년 마지막 출동인 제4차 출동에서는 부산포해전을 포함해 일곱 번의 크고 작은 해전이 있었다. 제4차 출동에 동원된 조선 함선은 지원선을 포함 총 170여 척이었다. 전라좌·우수군, 경상우수군으로 구성된 통합 함대는 부산포 쪽으로 나아가면서 장림포에서 6척, 화준 구미에서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절영도에서 2척, 초량목에서 4척을 만나 모조리 격파했다. 170대6, 170대5, 170대8 등 10여 척 미만의 일본 함선과의 전투였으니 그야말로 절대 우세한 상황에서의 토끼몰이식 해전이었다. 그리고는 부산포에 이르러 정박해 있는 470여 척의 일본 함선을 공격해 100여 척을 격파했다. 부산포해전의 경우 비록 170대470으로 수적 열세였지만 조선 수군의 위용에 겁을 먹은 일본 함대가 바다로 나오지 않고 포구에 정박된 함선에서 또는 육지에서 대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전의 주도권은 조선 수군이 쥐고 있었다. 

이순신은 언제나 가용한 모든 함대를 통합해 운용했다. 제1차 출동 때는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 함대, 그리고 제2차 출동 중반 이후부터는 전라우수영 함대가 가세하면서 전라좌·우수영과 경상우수영의 통합 함대가 구성됐다. 

갑오년(1594년) 초에 이르러서는 충청수영의 함대가 가세해 명실공히 전라·경상·충청의 삼도 수군 통합 함대가 만들어졌다. 실제로 부산포에서부터 거제도까지 포진해 있는 일본의 함선은 700~1000여 척에 달했다. 반면 조선의 함선은 임진년 부산포해전까지도 순수 전투함은 80여 척에 불과했다. 만약 넓은 바다로 나가서 일대 결전(決戰)을 벌인다면 조선 수군의 질적 전투력이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체 함선의 척수에서는 수적 열세였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전이 벌어지는 국면에서는 언제나 조선 수군이 수적으로도 우세한 상황이었다. 

조선 수군은 통합된 반면 일본 수군은 분산된 상태에서 해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통합된 세력으로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해 완전한 승리를 일궈낸 이순신의 해전 사례는 ‘전투력 집중’의 모범이요 귀감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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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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