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irror.enha.kr/wiki/%EB%AA%85%EB%9F%89%20%ED%95%B4%EC%A0%84
* "1. 배경"부분만 가져왔고 제목은 적당한 게 안 보여 내용에 맞게 제가 임의로 달았습니다.

칠천량 이후 명량해전 전 이순신 수군 재건
1. 배경 
1.1. 칠천량 이후

18일 정미, 맑다.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길 "16일 새벽에 수군이 대패했습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와 뭇 장수들이 다수 살해당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통곡을 이기지 못했다. 잠시 있으니 도원수가 와서 이르길 "사태가 이에 다다랐으니, 어찌할 수가 없소이다."라 하였는데, 대화가 사시(巳時)에 이르러도 대책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뢰어 내가 해안으로 가서 보고 듣고서 정하겠다고 하니 도원수가 기뻐하였다. 내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다다르니, 수령이 새로 부임하여 나아와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18일.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궤멸되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지만, 정작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휘하에 전함 한 척 없는 이름만 제독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절망하거나 좌절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서가 내려오기도 전에 행동을 개시했다. 수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며 머무르고 있던 초계를 박차고 나와 각지를 돌아다니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군량과 무기들을 입수했다. 다행히 칠천량 해전 이후 곧바로 밀려들 것만 같았던 일본 수군이 남해안 약탈 등에 신경쓰다가 8월에는 해상 작전에서 철수한 때문에 시간도 어느 정도 생긴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셈이었으니, 이때 이순신의 행적은 난중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

7월 19일
단성에서 숙박.

7월 20일
진주 굴동에서 이희만의 집에 숙박.

7월 21일
곤양을 지나 노량에 도착, 거제현령 안위 등 패잔병을 수습. 거제현 소속 배 위에서 숙박.

7월 22일
경상수사 배설이 합류. 곤양에서 숙박.

7월 23일
진주 굴동으로 돌아와 이희만의 집에 숙박. 배흥립이 합류.

7월 24일
이홍훈의 집에 숙박. 배경남이 합류.

7월 27일
손경례의 집에 숙박.

이후로도 한동안 진주 굴동에 머무르고 있던 이순신은 8월 3일 아침에 비로소 자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교서를 받든다. 조정에서 22일에야 칠천량 패전의 소식을 접하고 내린 교서가 비로소 도착한 것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단지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전라·충청 삼도통제사로, 권준을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는 짤막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는 삼도통제사 복직교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왕은 이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방패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재앙을 거두지 않으사 흉악한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삼도의 대군이 한 번 싸움에서 다하고 말았도다. 이후로 바다 가까운 성읍은 누가 지키겠는가? 이미 한산을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겠는가? ……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짊어지도록 한 것은 역시 과인의 모책이 미덥지 못함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무슨 말을 하리오. 무슨 말을 하리오. …… 그대는 충의로운 마음을 굳건히 하여 우리의 나라 건지길 바라는 소망에 부합하라. 고로 이 교지를 내리니 그대는 헤아려 알라.
─ 『이충무공전서』, 「상중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는 이를 두고 이순신이 '이것이 죄인에게 임금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라면서 자신이 듣는 귀를 의심하고,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아예 '임금이 신하한테 싹싹 비는' 상황으로까지 비견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실현된 국가에서 왕이 신하한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국가 차원에서도 나라의 존망이 목전에 달린 급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없어봐야 아쉬운 줄 알지? 이제 '수군 없는' 수군절도사 겸 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8월 3일
새벽에 복직교서가 도착. 권관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에서 이홍훈의 집을 출발하여 종일 움직인 끝에 구례에 도착.

8월 4일
곡성에서 숙박.

8월 5일
옥과에 도착.

8월 6일
옥과에서 숙박. 송대립 등이 일본군을 정탐.

8월 7일
순천으로 가던 중 패잔병으로부터 말 3필과 약간의 활과 화살을 탈취(!). 곡성 강정에서 숙박.

8월 8일
순천에 들어가 달아나려는 수령들을 잡고 방치된 군기를 처리. 순천에서 숙박.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 조양창에 도착, 이 과정에서 순천부사 우치적이 합류. 김안도의 집에 숙박.

8월 11일 
임란 초부터 보좌해왔던 송희립이 최대성과 함께 합류.

8월 13일
패전 직후 가족을 데리고 달아났던 경상우후 이몽구가 합류, 본영의 군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곤장을 침.

8월 14일
장계 일곱 통을 송부. 보성에 도착, 열선루에서 숙박.

8월 15일
교지가 도착. 보성의 군기를 처리.

8월 16일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보내 피난했던 관리들을 데려옴, 궁장인 지이와 태귀상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과 김붕만 등도 합류.

8월 18일
회령포에서 배설이 끌고 도망쳤던 전선 10척을 입수하여 그나마 수군의 구색을 갖춤.|}}
그러나 여기에서 그나마 구색을 갖추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선조실록에 이때의 군함 수가 나오는데...

근래 또 배신(陪臣)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보낸 장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하였습니다. 신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 『선조실록』 권94, 30년 11월 정유(10일) 5번째 기사

모두 합쳐도 전선이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였고, 이는 명량해전 당시에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133척에 이르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대단히 안습한 숫자였다. 이순신이 거느린 수군이나 조정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수백 척의 배가 들이닥칠 거라는 공포가 만연해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당시의 조선 수군은 상황이 안습을 넘어서 처절한 수준이었다.

이런 가운데 조정 일각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 없애고 육군이랑 합치져?라는 의견이 나왔고 선조 또한 이런 의견에 동의하여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까지 했다. 이 일은 선조실록과 난중일기에는 나오지 않고 행록에만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토록 전력비가 기울어져 있으니 조정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사실상 조선의 길을 버리는 엄청나게 멍청한 짓이다. 조선은 일부러 도로를 정비하지 않고 강을 길로 삼아서 물자와 인원을 유통시켰고, 실제로도 행주 대첩에서 적절한 순간에 한강을 통한 보급이 들어와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수군 폐지령은 13척의 배를 보존하고 수군의 전력을 육군에 편입시켜서 육군의 전력이라도 향상시키고자 의도한것도 아니었다. 병력이란 적절한 집중과 지휘체제가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인데, 선조의 대변인 노릇을 열심히 한 윤두수는 칠천량 해전 직후에 있던 어전회의에서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각지의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는 정신나간 주장을 했는데, 이건 까놓고 말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하기 싫으니 단일한 지휘관을 임관시키기를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왜군의 병력에 각개격파 당하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임진년부터 5·6년 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그러나 이순신은 위와 같이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다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명언으로 장계를 올리며 동요하는 여론을 잠재웠다. 이순신은 힘들더라도 제해권을 되찾아야만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힘든 게 아니라 불가능한 수준인데? 이순신의 이런 뚝심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게 되었다. 


1.2. 울돌목으로

사흘 동안 회령포에 머무르면서 가까스로 수군과 전선을 수습한 이순신은 8월 20일에 그보다 조금 더 큰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 수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포가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순신이 보기에 경상우수사 배설은 교서에 절하길 거부하는 등 공공연히 조정과 전쟁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며(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지만PTSD 라는 주장도 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는 사람됨이 미덥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자신도 21일부터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워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음날이 되자 다시 어란진으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린 이들을 처형해서 통상대감의 E파워군율이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27일 을유, 맑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수사는 어찌 피하려고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7일.

이처럼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가득한 가운데 8월 28일,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28일 병술, 맑다.
적선 8척이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왔다. 뭇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는 피하여 물러나고자 하였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몰아내도록 명하였다. 적선이 퇴각하자 추격하여 갈두(葛頭)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 이순신, 『정유일기』 7월 28일.

28일에 어란진에 나타난 일본군은 고작 8척의 수색대에 불과했지만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조선 수군은 그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줄 따름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29일에 다시 벽파진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진을 치고 결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9월 2일에는 마침내 고위 지휘관인 경상우수사 배설이 도주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순신은 이 일을 단지 '배설이 달아났다'고만 담담하게 적고 있다.[4]

이렇게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재건해가며 싸울 준비를 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전라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해를 거쳐 한양을 공격하자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자신감으로, 이번 기회에 이순신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이기자는 생각이었다. 일본군의 장수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객관적으로 봐도 12척으로 300여 척 이상을 갖춘 함대를 막아낸다는 것은, 항우가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한 일 당연하지, 항우 전문은 해전이 아니니까 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당사자인 조선 수군과 조정에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일본 수군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란진으로 들어와 벽파진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 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이를 조롱하듯 처음 13척의 배만을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한 번도 격침된 적이 없지만 수전에서 이토록 일본군이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거의 최초임을 감안하면 일본군은 한 척의 대장선을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5] 참고로 배설이 도주한 이후의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9월 3일 신묘, 비오다.

9월 4일 임진,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5일 계사, 북풍이 세게 불다.

9월 6일 갑오, 바람은 잠시 잠잠하나 파도가 가라앉지 않다.

9월 7일 을미, 바람이 비로소 그쳤다.
탐망군관 임준형이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진에 들어왔다고 보고. 미리 경계하고 있다가 신시(申時)에 적선 13척이 접근하자 구축, 이후로도 야습을 경계하다가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 같아 다시 엄명을 내리고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

9월 8일 병신, 맑다.
적선이 오지 않다.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

9월 9일 정유, 맑다.
적선 두 척이 아군을 정탐.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추격하나 놓침.

9월 10일 무술, 맑다.
적선들이 멀리 달아남.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오다.

9월 12일 경자, 비가 내리다.

9월 13일 신축, 맑다. 북풍이 세게 불다.|}}
이런 상황으로, 맑은 날엔 계속해서 일본 수군이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어지는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란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게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오익창의 사호집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이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의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한번만 더 모랄빵나면 니 대갈통은 없는 줄 알아라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5일[6]

이날 밤에는 이순신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기는 방법과 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주석

[4] 배설은 결국 1599년에 선산에서 잡혀 효수되었다. 다만 배설은 난중일기를 보면 항명했다는 뉘앙스라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존재했던 것처럼 되어 있으며, 이순신이 평소 배설을 준수하게 평가했고 도망간 뒤 난중일기에 '배설이 도망갔다'고 짤막한 한 줄로 끝낸 점을 들어서 이해할 만한 어떤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를 감안해서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명량해전에 앞서 조선 조정에 대한 반감과 같은 품계의 지휘관이 두 명 있음으로서 생길 수 있는 지휘권 분열에 대한 우려 때문에 몰래 도주하는걸로 말을 맞추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온다.
 
[5]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은 일본 수군의 기함인 아타케부네(안택선)과 비슷한 크기였는데, 일본 수군에서는 아타케부네를 해상의 성(海上之城)이라고 부를 정도로 안택선이 거대한 전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주 전투함인 세키부네는 아타케부네의 반 정도 크기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고속정 13척이 대형 구축함 13척에게 시비를 건 셈.(...) 다만 일본군이 판옥선을 이토록 유리한 상황에서 공략해본 적이 없음은 감안할 만 하다. 여기에 칠천량의 전훈이 있으니 13척이 꼭 오만이라 단언할 수는 없는 셈.
 
[6] 이순신이 병법에서 인용한 말은 모두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지만, 오자에 나오는 경구과 이순신의 인용문은 차이가 있다. 오자병법의 원문은 치병(治兵)편의 '죽고자 하면 살고,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必死則生 幸生則死)'와 여사(勵士)편의 '한 사람이 목숨을 걸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人投命 足懼千夫)'이다.



임진왜란 해전 글목록  http://tadream.tistory.com/6103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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