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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 - 엔하위키미러"에서 수군편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위 주소로 가면 아래 내용과 다른데 수정되었나 봅니다. 저도 좀 살펴보는중.
명량해전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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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 및 일본 수군 편제
5.1 조선수군 편제
괄호는 실록과 난중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수들이고 이응표와 류형은 격류에서 설정한 것이다.
기함
수군통제사 이순신 - 대장선(1척)
중위
경상우도 미조함첨사 김응함 - 중군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영등포만호 조계종 - 척후장(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안골포만호 우수(1척) (난중일기)
경상우도 거제현령 안위(1척) (실록, 난중일기)
경상우도 평산포대장 정응두(1척) (실록)
좌위
전라우수사 김억추(1척) (난중일기)
전라우도 가리포첨사 이응표(1척) (해전 직후 전라우수사로 포상 받음)
전라우도 해남현감 류형(1척) (난중일기 및 행장 등에서 추정)
우위
전라좌도 조방장 배흥립(1척) (실록)
전라좌도 회령포만호 민정붕(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발포만호 소계남(1척) (난중일기)
전라좌도 녹도만호 송여종(1척) (실록)
총합 영관급 지휘관 포함, 수군 총괄 약 2400명 가량
5.2 일본 수군 편제
조선측 편제가 난중일기 및 조선의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것고 마찬가지로, 일본측 편제는 '조선역진법표'를 통해 어느정도 추론 가능하다. 일본측의 체계적인 기록이 부재했을 것이란 인식과는 다르게 일본 좌군의 명확한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도도 다카도라(2800)
가토 요시아키(2400)
와키자카 야스하루(1200)
구루지마 미치후사(600)
칸헤이에몬 미치나가(200)
또한 '타카야마공 실록'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담보한 상황에서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물살이 빠른 곳에 이딴 소형 보트들을 보내니깐 졌지..[18]
전투에 참가한 함선 수는 징비록, 정조시대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 초판본에 각각 200척, 333척, 133척으로 각각 다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판본에는 '적선 133척이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어 우선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일본측 함선의 수효에 대하여
일본측 전체 함선을 133척으로 보고 이걸 세키부네로 보면 저 <진법표>의 왜군 총 숫자가 7000~8000명 정도이므로 교차검증 또한 완벽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소위 그 교차검증의 근거가 되는 <조선역진법표>에는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군의 숫자가 직접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좌군'의 수군 숫자가 나와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게다가 이 <진법표>는 하치스카 이에마사 같은 육군 다이묘들의 함대도 계산한 것이 아니라 편제상 수군인 다이묘들만 따진 것이기 때문에 병력 상한선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며, 이 진법표에 나온 가토 요시야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같은 다이묘들이 모두 참전했다는 문서적 기록도 없으므로 병력 하한선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만약 이런 식으로 해전 참가 병력을 계산한다면 한산도해전의 참가 병력은 단지 와키자카군 1500명만이 된다.
즉 저 병력이 죄다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거나, 일부만 참전했다거나, 아니면 하치스카 함대와 같은 육군 함대가 참전했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지 않는 이상, '교차검증 또한 된다'라고 말하는 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일단 기록상으로 저기 참전한 건 도도 다카도라, 구루지마 미치후사밖에 없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같은 무장은 이후 모리가문 문서에서 이름 확인이 가능하지만 이들이 직접적으로 참전했다고 단언하기는 무리이다. 마찬가지로 개연성은 있다 할지언정, 하치스카 이에마사 함대의 참전도 단언할 수가 없다.
편집하기 이전 문서에는 일본측 규모가 7200~8000명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위키의 주장과 똑같다. 즉 <진법표>에 나온 좌군의 수군숫자만 가지고 전체 참전병력을 계산하려 한 오류이다. 문서상으로 확인되는 참전 다이묘가 단 두 명이고, 나머지 다이묘들은 참전했는지 안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신있게 전체 병력수를 잡을 수 있는가? 게다가 저 <진법표>의 수군 숫자가 과연 수부, 격군과 같은 비전투병력을 포함했는지도 알 수 없다. 만일 비전투병력을 포함하지 않았을 경우, 수부의 수가 통상 전투병과 동급 또는 그 이상이라는 걸 고려하면 저 <진법표>의 일본군만으로도 무려 14000명 이상의 군세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진법표의 구루지마군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선봉대로 나선 구루지마군의 숫자가 고작 600명이다. 만약 저 숫자가 수부를 포함한 숫자라면 구루지마군은 고작 세키부네 10척에 불과하다. 선봉이라 봐주기에도 극히 초라한 숫자다.
결론
즉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맞닥뜨린 전체 함선의 수는 알수 없으며, 전체 병력은 더더욱 알 수 없다. 다만 초기에 교전한 숫자가 133척이라는 것은 난중일기 초판본에 나오므로 거의 확실하다 할 수 있다. 일부는 강항이 마주한 5,600척의 배는 대다수는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함선이 아닌 수송용 변재선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게다가 모든 수송선을 변재선이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700척 모두가 전투선은 아니었을 것이다.
초기에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의 체급은 해협의 넓이때문인지 세키부네 이하로 보이며(고산공실록), 일본측에서 아타케부네 등의 대형 함선의 참전 기록은 없다. 다만 나중에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을 보아 어립선이 직접적으로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외에 일본 수군의 후속작전계획을 고려해 육군 영주 일부의 군이 참가했을 가능성을 논하는 이들도 많고, 수군으로 참전한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의 참전 개연성은 있지만 참전했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며, 육군인 시마즈 요시히로의 참전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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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물론 세키부네가 소형 보트라고 할 정도로 작아빠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당포 해전의 장계에서는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대세키부네도 확인되고 있다.
[19] 격류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전투가 끝나기 직전에 함대를 이끌고 와 무력 시위를 벌인 것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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