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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의문을 얘기해보고 끝내고자 합니다. 왠지 해전을 다루는 얘기들을 보면 조선 수군이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 이겼다고 하죠. 불멸의 이순신에서도(글 쓰면서 보는데 재밌긴 하네요. 휴... 뭐 일단 김명민씨 연기는 짱입니다) 병력이 10분의 1에 불과한데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지에서 경상도는 다 먹힌 상황에서 바다에서만 이겼다 이런 느낌만 나구요.
전라좌수영의 병력이 모두 참전했을 경우 오천, 우수영 역시 그 정도의 병력을 끌고 왔다면 일만이 됩니다. 판옥선마다 125명씩 탔다고 가정하고 계산할 경우 병력은 6750, 기타 협선과 사후선에 탔을 병력까지 계산한다면 조선 수군의 규모는 한산도 대첩 당시 일본 수군의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죠. 천이천 단위로 적보다 적거나 오히려 많을 수는 있지만요.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산도 대첩에서는 그냥 일개 부대가 꺾인 거고 조선의 대군이 조그만 와키자카의 함대를 집단으로 다굴한 거라고 폄하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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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해전사 - 4. 한산섬 달 밝은 밤에 (3차출동)
2011/04/16 10:37:41 눈시BB
3차출동
몇 일 동안 일본 수군의 느낌을 체험해 봤습니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 되는데 민증이 없으니 카드를 못 만들고 현금이 없어서 민증을 못 만들었죠. 통장에 돈이 있으면 뭐 해요 내가 쓸 수가 없는데 ㅠ 야구고 뭐고 요새 묵혀 뒀던 레드 얼럿 3가 손에 잡히네요. _-)a 좀만 천천히... 아닙니다.
1. 피할 수 없는 결전
7월에서 특기할 점이 적이 전라도로 공격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금산이 점령되면서 교두보가 생겼고 이후 웅치, 이치 전투에서 맞서 싸우지만 웅치는 뚫려서 전주가 위험하기도 했죠. 이런 가운데 조선 수군은 다시 출격 준비를 합니다. 때는 7월 4일, 이억기와 합류 후 6일에 노량에 도착해서 원균과 합류합니다. 이 때 전라도의 병력이 47척, 원균의 7척이 합류하면서 54척이 됩니다. 전라좌수군 40척, 우수군 27척 해서 70척이 넘었다는 말이 있던데 출처를 모르겠네요. 이충무공전서인가. 아직 그렇게 대규모로 전력 증강하기는 힘들텐데요.
진주 창신도와 당포에서 각기 1박씩 한 후 8일 적이 어디 있는지 정찰을 시작했죠. 영등포에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73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전처럼 각기 흩어져 있던 적들이 아니었죠.
이에 이순신은 적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 이유는 이거였죠.
[그런데. 위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 전선은 서로 부딪치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가 곤란할 뿐만 아니라, 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하게되면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로 끌어내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거제와 고성사이에 있는 한산도는 사방에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적이 비록 육지로 오르더라도 틀림없이 굶어 죽게 될 것이므로 먼저 판옥선 5,6척을 시켜서 선봉으로 나온 적선을 뒤쫒아서 엄격할 기세를 보이게 한 즉, 여러 배의 적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 나왔습니다.]
이 거짓 후퇴의 역할을 맡은 장수는 광양현감 어영담이었습니다. 경남 함안에 살아서 해로를 잘 알았던 그는 후에도 조방장으로 함대를 이끌어 견내량 북쪽으로 진출했었죠. 역사에 심심하면 나오는 유인 작전이지만, 사실 이보다 힘든 것도 많지 않을 겁니다. 너무 빨리 도망치면 적이 추격하지 못 할 것이고, 너무 늦게 가면... 죽죠 -_-; 거기다 왜선은 기본적으로 판옥선보다 빠르다는 게 통설이죠. 그 때 바람이 어땠는지는 모르겠군요. (왜선의 돛은 순풍에 좋고 조선 수군의 돛은 역풍에 유리합니다)
유인에 걸려서 몰려 든 73척의 대함대, 이에 맞선 조선 수군의 진형은 학익진이었습니다.
2. 한산도 대첩
뭔가 이순신이 창작한 신묘한 진법이라는 말이 많은 학익진입니다만... 딱히 새로운 전법은 아닙니다. 조선실록에도 학익진을 비롯해서 어린, 언월 등 각종 진법이 나오며 일본에서도 학익진은 다수로 소수의 적을 물리치는 진형으로 자주 쓰였습니다. 애초에 적을 포위하는 건 병법에서는 상식 수준이죠.
문제는 이걸 해전에서 응용하기는 힘들다는 거죠. 거기다 이건 적이 오는 때를 노려서 진형을 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적이 눈치 채지 못 하게 말이죠. 거기에 아군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넓게 진을 형성한다는 것은 곧 곳곳이 얇아진다는 걸 의미하죠. 어느 한 곳이 뚫릴 경우 그 곳을 구원하려다가 진 자체가 무너집니다. 전라좌수군만의 작전이 아닌 우수군과의 연합이며 진법을 연습할 시간도 없다시피 했습니다. 당연히 경상도 해안에서 연습할 시간도 없었겠죠. 이런 상황에서 학익진이 형성된 겁니다.
조선 수군만의 이점도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선회 면에서 유리했습니다. 마치 육전에서 하듯 바로 반전해서 적을 공격할 수 있었죠. 한산도 주변의 섬들에 숨겨 아군을 적게 보이게 할 수 있었을 거구요. 가장 중요한 점은 조선 수군 전체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준 것이겠죠. 전투 중 김완은 적선에 올라타 일본 장수와 일기토-_-;를 벌이고 이겼다고 합니다. 이 때 김완의 벤 목이 16급, 이외 권준, 어영담이 벤 수급이 10개를 넘어갑니다. 전과에 대한 기록도 "적 선을 온전히 사로잡아"라는 내용이 많죠. 이전 전투에서는 배를 버리고 도망간 경우가 많았던 점도 있겠지만, 적선을 큰 손상 없이 나포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조선 수군의 기세가 어땠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쫓아라! 수급이 도망간다!" 이런 수준이었겠죠. -_-; 그런 상황에서도 장계에서 "목을 벤 것보다 적선을 잡은 걸 1등으로 하기로 했다"는 걸 계속 강조하는 게 보입니다. 대승에서도 중요한 걸 놓지지 않은 거죠. 장계 중 "방답첨사 이순신은 적선 하나를 깨뜨리고도 목 베는 일에는 힘쓰지 않았고 또 2척을 쫓아가서 깨뜨렸다"고 돼 있습니다. 이 때 이순신이 벤 목이 4급이었습니다. 아마 1등으로 등록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목을 많이 벤 장수들은 그 동안 한 척만 잡았었거든요. 배 위에서 벌어지는 피가 쏟아지는 학살, 근데 그게 조선군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뭔가 어색하죠?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전, 이른 아침에 시작했는데 전투가 끝난 후 황혼이 짙어 어두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죠. 적을 잡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부산으로 가야 했죠.
3. 안골포 해전
9일에 안골포에 왜선 40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역풍 때문에 하루를 더 기다립니다. 10일 새벽, 이억기를 가덕도로 보낸 후 원균과 함께 안골포로 나아가죠, 거기엔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 모두 42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좁은 포구에 의지하고 있었죠. 몇 차례나 끌어내려 했지만 그들은 걸리지 않았고,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해야 했죠. 좁은 포구에 각 병력들을 교대로 보내면서 포격하기를 계속했고, 이억기도 돌아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이에 대해서 적은 맞서 싸우러 나오지도, 도망가지도 않은 채 굳건히 버텼습니다. 어떻게든 포구를 지켜내려 한 거였죠. 주로 공격이 집중된, 안택선으로 추정되는 누각선(3층 한 척, 2층 두 척이 있었습니다)에서는 전사자를 소선에 실어 육지로 보내고 다른 배에서 계속 병력을 충원하면서 버텼습니다. 이 때 배에 막 같은 것을 씌워 아군의 장군전 등이 꽂히면 뽑아서 바다에 던지는 식으로 침몰만은 안 되게 했다는군요. 결국 실컷 때리다가 지쳐서 물리고 다음 날에 가니 황급히 도망가 있었고, 전사한 적들의 시체를 모아 불태웠는데 그 곳이 12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거의 타다 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도적들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안골포 해전을 마무리하는 말이었습니다.
이후 양산강과 김해 포구 및 감동 포구를 모두 수색했는데 이 감동 포구가 어디인고 하니... 제가 사는 곳이예요 >_< 지금이야 서울에서 자취하지만 -_-;; 지금 이름으로 구포라고 하죠. 낙동강이 바로 옆이긴 하지만 부산에서 바다가 제일 먼 곳 중 하난데 참 높이도 올라왔네요. 당시 쌀은 운반하던 포구 중 하나라서 왜성도 축조된 곳이죠. 각 출동에서 진격할 땐 정말 느리게 가는데 돌아갈 땐 빠르게 가는 건 바로 이것 때문일 겁니다. 지나가는 거의 모든 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진격한 거죠.
하도 적이 없어서 정찰병을 보내니 양산과 김해의 강 으슥한 곳에 합쳐서 적 백 척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지의 중에게 물어보니 안골포에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다 도망쳤다고 하는군요. 이후 몰운대까지 가서 아군의 위세를 자랑한 후 돌아왓습니다. 3차 출동은 이렇게 성공리에 막을 내립니다.
4. 전과
한산도 대첩에서 도망간 적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으로 총 14척입니다. 그 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배를 버리고 부하 400명과 함께 한산도로 도망쳤고, 우리가 잘 알듯이 미역 웰빙을 하며 13일간 버티다가 뗏목을 타고 도망치죠. 지금도 그 후손들은 그 날에는 해초만 먹는다는군요. 거 참... 그의 가문 기록인 협판기에 따르면 가신 와키자카 사베에, 시치에몬 등이 전사했고 (여기선 도망간 이가 200명이라 돼 있네요) 마나베라는 자는 섬에 내린 후 할복했습니다. 400명이든 200명이든 이 때 와키자카의 병력은 완전히 전멸된 거죠.
안골포 해전에서의 적장은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인데 위에서 말했듯 요격하지 않고 포구만 지키면서 버텼고, 대부분의 함선을 불태운 듯 합니다. 결국 버티지 못 하고 후퇴하죠.
특이할 점은 백호전서, 잠곡유고, 택당선생 별집 등의 사료에서 적 대장으로 우키다 히데이에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백호전서에는 "경성으로부터 양산에 이르렀는데,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결전을 벌인 다음, 곧장 호남으로 가려고 하였다."라고 돼 있죠. 구키와 가토의 연합 함대가 단 40척이었다는 걸 보면 이전 해전에서 그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와키자카의 병력이 70척이 넘는 건 설명이 안 되죠. 우키다 히데이에군은 서울에 주둔하면서 진주성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독성산성을 치기도 하는 등 예비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때도 직접 참전하진 않았지만 다수의 병력을 지원했다고 보면 되겠죠. 그렇다면 후방으로 도망친 14척 역시 와키자카 휘하의 함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장을 보호하지 않았던 걸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장계에도 있네요. [그리고, 순천 부사 권준이 빼앗아 온 서울 사는 보인 김 덕종의 문초 내용은,『날짜는 기억하지 못하나, 6월 경에 수를 알 수 없는 왜적들이 4개 부대로 나우어 소인의 식구들을 함께 이끌고 서울로부터 내려왔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서울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1600명이 4개 부대로 나누어 내려왔다는 건 뭔가 초라하죠? ( ..)
다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그저 패전 책임을 뒤집어 썼다고 단정하기는 힘든 게 그의 가문 기록인 협판기에도 그가 단독으로 출진했다고 나와 있거든요. 워포그에 아케치 미쓰히데님이 번역하신 협판기를 참조했습니다만, 딱히 억울하다는 표현은 보이지 않네요. 대신 "적은 크고 아군은 작아서 졌다"는 변명이 보이구요.
한산도 대첩에서 적의 전사자가 8980명이라고 십의 자리까지 정확히 쓴 건 대체 어느 기록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네요. 고바야, 세키부네, 아다케후네로 나눈다지만 이 배들이 통일된 게 아니었거든요. 판옥선 역시 임란 후 나대용이 정원이 125명이라고 했지만 이게 통일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때 그 때 달랐죠. 결국 모두 추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선"이라 해서 그냥 안택선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각이 있는 대선" "판옥선 만한 대선" "2, 3층으로 방을 만든 왜선" 등으로 나뉘거든요. 이 중에서 안택선이라고 추측할 만한 건 누각이 언급돼 있는 것들 뿐, 각 해전마다 한두 척 수준입니다. 이게 각 다이묘들이 탄 기함이고 안택선으로 봐야 되겠죠. 나머지 대선은 크기가 큰 세키부네로 봐야 될 것입니다.
그냥 대~충 계산해 봅시다. 고바야의 노는 14~30개로 일인당 하나씩 저었다고 합니다. 세키부네는 40개 정도였다고 하죠. 안택선이 노가 90개라고 하니 왠만한 세키부네는 커도 이를 넘진 않을 겁니다. 격군과 전투원이 1:1의 비율이라고 치고, 대선에 평균 60명, 중선 40명, 소선 20명이라고 칠 경우 도망간 400명 빼면 적의 피해는 3500명 정도입니다. 너무 적죠? 두 배로 늘려보면 칠천... 에 각자 대입해 봅시다. ^_^
수정실록에는 "적들이 한산도에서 죽은 수가 구천명이라고 한다더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뤄진 전투인 만큼 적은 모두 죽었고, 그 피해는 육지 어느 곳에서 벌어진 전투보다 컸습니다.
생각해보면, 한양으로 후퇴할 때 우키다 히데이에군의 전사자는 절반에 이릅니다. 독성산성, 진주성, 행주산성에서 패했다 하나 너무 크죠. 그런데 이 해전에 병력을 지원했다면 설명이 되는군요. 와키자카군의 피해는 천 명을 넘는 수준, 나머지 병력의 절반만 지원했다고 쳐도 우키다군의 전사자는 사천명에 달합니다. 비전투원을 뺀다 치면 이천이죠. 비교적 안전한 한양에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우키다군의 피해는 거의 한산도 대첩에서 나왔다고 보면 되겠군요.
안골포 해전에서도 전사자를 모아서 불태운 게 12곳이었다고 하니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죠.
마지막으로... 이 때 조선군의 전사자는 19명이었습니다. 묵념.
5. 후일담
장계에는 구출한 포로들에게의 진술이 나오는데, 대부분이 "전라도로 간다"는 거였습니다. 3개 부대로 나뉘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부대가 한산도 대첩으로, 두 번째 부대가 안골포 해전으로 꺾였다는 거죠. 이전의 해전들과는 달리 확실하게 전라도로 진출하기 위해 준비된 출정이었고, 그 셋 중 둘이 꺾임으로써 적의 전진은 완전히 막히게 됩니다. 오히려 조선 수군이 다시 부산으로 진출하면서 본거지마저도 위험하게 됐죠. 포위에 걸렸다 하나 적은 2, 3척이 당하자 포위를 뚫을 생각을 못 하고 후퇴하려 했습니다. 조선 수군이 왜군을 아직 못 딴 수급으로 여기듯 일본군도 조선 수군을 인공 재해로 여기게 된 거죠. 구키 요시타카 가문은 아직도 조선 수군의 장군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수륙병진 정책에 거대한 철퇴가 내려진 것이고, 이후 적은 바다에 나오지 못 했습니다.
한산도 대첩의 의의는 여기서 볼 수 있을 겁니다. 거짓 후퇴로 유인, 학익진으로 적을 포위하는 과정이 교과서처럼 매끄럽게 되었던 거죠. 그리고 수륙병진을 완전히 좌절시켰습니다. 적은 이제 전라도는커녕 경상도 내에서도 배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 하게 되었죠. 바다 뿐 아니라 강까지도 마구 휩쓸며 전진해서 보급로는 끊겼고 조선 육군은 바다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낙동강 보급로 역시 완전히 장악해 버립니다. 한산도 대첩은 전쟁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곳이 남아 있죠. 다음 목표는 적의 소굴, 부산포였습니다.
여기서 원균 등의 경상우수군은 병력이 부족해서 학익진에 참가하지 못 했고, 전투가 끝날 무렵에야 우르르 달려들어 적의 목을 땄다고 합니다. -_-; 애초에 적을 발견했을 때 그냥 밀어붙이자고 했다가 이순신에게 "님 병법 모름-_-?"이라고 면박 당하기도 했죠. 후에 원균이 따로 한산도 대첩에 대한 장계를 올리는데 잘 싸운 걸로 알려진 이운룡, 우치적보다 원균과 함께 목 수거하고 다닌 기효근이 더 높은 상을 받습니다. 이 때 벤 목은 전라좌수영이 90급,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까지 다 합치면 250급이었다고 합니다.
6. 조선군이 불리했는가?
하나 더 의문을 얘기해보고 끝내고자 합니다. 왠지 해전을 다루는 얘기들을 보면 조선 수군이 아주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 이겼다고 하죠. 불멸의 이순신에서도(글 쓰면서 보는데 재밌긴 하네요. 휴... 뭐 일단 김명민씨 연기는 짱입니다) 병력이 10분의 1에 불과한데 어쩌구 저쩌구 합니다. 마찬가지로 육지에서 경상도는 다 먹힌 상황에서 바다에서만 이겼다 이런 느낌만 나구요.
글쎄요. -_-a 93년에 명에 보고하기 위해 집계한 병력에서 전라좌수영은 오천, 우수영은 일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라우수영이 좌수영 수준의 병력만 끌고 온 건 병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라감사 등의 명으로 절반 정도만 끌고 왔다고 봐야겠죠. 충청수군 역시 한참 후에야 참전합니다. 육군에 차출되었거나,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을 막기 위해 병력을 놔두고 온 것으로 봐야 됩니다.
전라좌수영의 병력이 모두 참전했을 경우 오천, 우수영 역시 그 정도의 병력을 끌고 왔다면 일만이 됩니다. 판옥선마다 125명씩 탔다고 가정하고 계산할 경우 병력은 6750, 기타 협선과 사후선에 탔을 병력까지 계산한다면 조선 수군의 규모는 한산도 대첩 당시 일본 수군의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죠. 천이천 단위로 적보다 적거나 오히려 많을 수는 있지만요.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한산도 대첩에서는 그냥 일개 부대가 꺾인 거고 조선의 대군이 조그만 와키자카의 함대를 집단으로 다굴한 거라고 폄하하기도 하죠.
어려운 상황이기는 했습니다. 주력인 전라좌수군이 꺾이면 조선 수군의 앞날은 예상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죠. 수적으로도 그랬고, 판옥선의 이점도 컸으니까요. 하지만 수적으로 크게 불리한 상황에서 이뤄낸 전투는 아닌 겁니다. 육전을 수행하기에는 적었을 뿐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은 열세한 상황에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싸웠고,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이겼다는 게 의의죠.
비슷하게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수전에 능했다는 게 있죠. 심심하면 보이는 게 와키자카가 해전을 잘 해서 어쩌구저쩌구 -_-; 하지만 일본 수군은 이제까지 언급했듯 수송선 호위용일 뿐이었고, 수군으로 출전한 다이묘들도 그저 바닷가에 접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구루지마나 구키 같은 경우 해적 출신이긴 하지만 정말 일부였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히데요시가 통일하는 과정에서 양성한 가신 중 하나였고, 같은 칠본창이었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에 비해 능력이나 영지 규모 면에서 비교가 안 됐습니다. 이건 가토 요시아키 역시 마찬가지였죠. 이후 그가 세력을 불린 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배반한 이후였습니다.
아무래도 이순신의 승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강한 적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무리수입니다. 오히려 불멸의 이순신이 일본에 방영된 후 "아니 와키자카가 이렇게 대단한 장수였다니" 하는 반응이 있었다는군요. -_-; 에휴... 적이 강해야 승리가 더 빛을 발한다고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일본 수군은 수가 적고 허접했습니다. 네. 허접했죠. 계속 깨지다가 육군까지 동원했지만 수전에 약한 건 여전했죠. 조선 수군은 화포가 있었고 판옥선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기는 게 너무도 당연했을 수 있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수전에 약하다 하나 그들 역시 악귀 같던 왜군들이었으며, 조선 수군 역시 몇 차례의 왜변 빼면 육군처럼 전투 경험이 없다시피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조선 수군을 "저기 왜놈들 아니 수급들이 도망간다" 수준으로 키운 건 바로 이순신이었죠. 막말로 어린애가 사람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어른에게 덤비면 어른도 상처를 입습니다. 하지만 해전 내내 조선 수군이 입은 피해는 상처라고 보기도 힘든 수준이었죠.
김경진님은 "한국에서 해전을 다룬 책들은 해전이 모두 일본 수군만으로 행해졌다고 말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와키자카 명장설이 나올 수밖에 없죠) 일본인들에게 논리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일본 수군은 다 합쳐 만 명도 안 되니까요.
이렇게 까이는 게 얼마나 보기 안타까웠던지 원균은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이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소수로 엄청난 다수를 이길 수 있게 해 줍니다. 원균의 유일한 공이죠. -_-;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이니 뭐니 하면서 까는 건 당연히 미친 짓이고, 과장도 필요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은 그 자체로 위대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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