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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는 경로가 잘 안 보여 좀 진하게 그렸습니다.
정유재란 5 :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1.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 지도는 경로가 잘 안 보여 좀 진하게 그렸습니다.
정유재란 5 :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1.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조선 조정은 의외로 침착하게 바로 이순신을 통제사에 임명됩니다. 김식의 보고보다 더 정확한, 수군이 전멸한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권율도 곧바로 이순신을 추천했죠. 사실 방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배가 남아 있기나 할까, 그리고 이순신이 그것을 받을까 하는 거였죠.
이순신은 곧바로 길을 떠나 18일에 삼가 -> 19일 단성 -> 20일 진주 -> 21일 곤양에 이릅니다. 이 때까지는 수군이 패했다 하나 적이 진격하지 않았고 동산산성, 정개산성 등 아직 우도의 산성들이 기능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백성들도 추수하고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말 그대로 폭풍전야였습니다.
이 날 이순신은 노량으로 가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수군을 만납니다.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이 와서 통곡했죠.
"피해 나온 군사들과 백성들이 호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 수사는 도망가서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찾아왔거늘, 패하게 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나 뭍으로 올라가고 여러 장수들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장의 과오를 말하는 것은 입에 담아 형언할 수 없고, 그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고 했다."
그 날은 안위의 배에서 자면서 밤새도록 얘기했는데, 그 때문에 눈병이 생겼다고 합니다.
다음 날에는 도망 갔던 배설이 돌아와서 많은 얘기를 나눕니다. 남해현령 박대남도 찾아 오죠. 23일에는 배흥립을 만납니다. 이들이 병에 걸려서 전투에 참가 못 한 게 오히려 다행이었죠. 이 때 상황을 정리해서 권율에게 보냅니다.
25일에는 조방장 김언공이 제석산성의 병력을 수군에 인계하기 위해 이순신을 찾아 오지만, 아직 직책이 없던 이순신은 이를 인수하지 못 합니다. 이 병력은 다른 곳을 지키다가 흩어졌다고 합니다.
이후 수군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만나며 회의를 했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 했습니다. 그는 아무런 직책이 없었으니까요. 한편, 일본군은 예열을 끝내고 드디어 진격을 개시합니다.
적의 진격이 시작된 8월 3일, 그는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재임명됩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 23일날 조정에서 보낸 선전관이 3일에야 도착한 거였죠. 정유년의 기적은 그렇게 시작부터 아슬아슬했습니다. 2일 왕명을 받을 꿈을 꾸었다는데 신통하네요.
이 때 교서의 내용을 약간 옮기면 이렇습니다.
"임금은 이같이 이르노라. 아아! 나라가 의지하고 든든함으로 삼는 것은 오직 수군 뿐이었노라. 그런데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니, 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삼도의 대군이 한번 싸움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도다. 앞으로 바닷가 고을들을 누가 지켜주랴? 한산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랴?"
"생각컨대 경은 일찍이 수군절도사를 제수받은 날로부터 널리 알려졌고 임진년 대첩이 있고 나자 다시 그 이름을 크게 떨쳤도다. 이로써 변방의 군사들은 경을 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노라."
"그런데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진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역시 사람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됐노라.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선조는 이렇게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며 부디 삼도 수군 통제사를 맡아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상중임에도 일으켜 세우고 백의종군에서 해제해서 통제사 직에 다시 앉힌다고 하죠. 조선시대에 효를 위해 직책을 사양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왕의 뜻이 자기와 안 맞아서, 혹은 자기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출사를 늦추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고, 상중이라는 것은 최고의 변명거리였습니다. 송시열만 해도 수틀리면 바로 벼슬 버리고 가 버렸는데요 뭐.
조정은 이순신이 그것을 거부할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쌓인 한 때문에, 아니면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한 번쯤 튕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늦어 버립니다. 일본군의 진격이 시작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이순신의 결단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선조가 제대로 대접해줬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교서는 현재 품계 부분이 지워져서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듬해 명량 해전을 거치고도 정 3품 절충장군 그대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통제사에 임명하면서 정 2품 정헌대부도, 종 2품 가선대부도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간단히 명량에서 중군장으로 참전한 미조항첨사 김응함도 절충장군이었고, 배흥립도 통정대부로 동급이었습니다. 수군은 임진년의 승전으로 많은 이들이 자기 직책보다 높은 품계를 가지고 있었죠. 말 그대로 당하관(종 3품 이하)보다 당상관(정 3품 이상)이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딱 정 3품만 돌려준 거죠. 제대로 엿을 먹인 겁니다.
이순신 개인으로서는 한 번 튕겨도 나라 빼고는 아무런 해도 없는 상황,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숙배한 후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발 그날로 길을 떠나 곧장 두치 가는 길로 들어섰다."
이 너무도 간단한 한 줄에 얼마나 큰 결심이 담겨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육로로 떠납니다.
2.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곧바로 두치 (전남 광양)으로 떠난 이순신은 남해 현령 박대남이 길을 잃기도 하고 -_-; 하다가 구례로 갑니다. 이후 옥과로 갔다가 배경남을 남원으로 떠나 보내고 순천에 이르죠.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광양으로 바로 가는 길을 가지 않고 구례로 갔다가 순천으로 갑니다. 먼 길을 돌아가는 거죠. 통설은 이렇게 돌아가며 병력과 군량, 화약 등을 모았다는 것인데 김경진님은 적이 섬진강을 장악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추정하시더군요.
실제 이순신이 통제사에 재임명된 3일은 적이 진주를 함락한 날이었고, 한편 시마즈 요시히로군은 하동에 상륙해 남원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적의 점령지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 한 순간만 적에게 발각되었어도 그 날로 그의 운명은, 조선의 운명은 끝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어떻게든 전라좌수영 경내를 이동하면서 물자 및 장수들을 모집하려 했습니다. 5일에는 옥과현에 도착해서 정사준 등을 만났고, 옥과 현감 홍요좌는 병이 났다는 핑계로 오지 않다가 처벌하려고 하자 옵니다. 7일에 순천으로 갔고, 거기서 곳곳이 청야된 것을 보게 되죠. 광양 현감, 나주 판관, 옥구 현감 등이 와서 질책하니 모두 병사 이복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9일에 낙안에 도착했을 때도 이복남이 적이 쳐들어 온다면서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서 병사들이 흩어졌다고 하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복남은 남원으로 당당히 들어가서 전사했습니다. 전라도의 혼란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거죠.
그래놓고 정작 순천부의 창고는 불태워지지 않았는데, 이순신은 이것을 휘하 군관들이 들 수 있을 정도만 남기고 없애 버립니다. 아무래도 이복남이 이순신을 위해 남겨 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날 우치적을 만납니다. 이 때 적은 남원을 공략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약간의 여유가 있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이 약간의 여유가 조선 수군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7일자 일기를 보면 선전관 원집을 만나 밀지를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순신은 이에 대한 답장과 수군의 상황을 적은 장계 7통을 윤선각에게 주어 서울로 올려보냅니다.
이순신이 패해서 숨어 있는 수군 장수들을 만나고 남은 함대의 수를 알게 된 것은 13일이었습니다. 이 날 거제 현령 안위, 발포 만호 소계남이 왔다 갔고 수사와 여러 장수, 피해 나온 사람들이 묵고 있는 곳을 알았다고 하죠. 한편 전라좌수영 우후 이몽구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좌수영의 군기와 군량을 버리고 갔다는 죄로 곤장 80대를 맞습니다. 그가 맡고 있는 것이 정말 중요했기에 도망간 다른 수군 장수들에 비해 큰 죄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는 조정의 명에 의해 참수당하죠. 다 같이 도망간 것을 생각하면 그 혼자에게 너무 가혹했나 싶긴 하지만, 도망간 건 죄가 맞죠. 또한 이 날 3일에 진주 등의 군대가 흩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통탄할 노릇이라고 했지만, 단 하루라도 늦었을 경우 어떻게 됐을지 몰랐다는 사실을 알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네요.
14일에는 어사 임몽정을 만나야 돼서 보성으로 갔고, 15일에는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수군을 폐하고 육지로 와도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바로 그 답장을 씁니다.
이 장계가 바로 지금 너무나도 유명한 그 장계죠.
"5~6년간 적은 감히 호남으로 곧바로 쳐들어오지 못 하였습니다. 이는 수군이 그 길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로 힘을 다 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 볼 만 합니다. 만일 수군을 폐한다면 이것은 적이 가장 기뻐하는 바로써, 호남을 거쳐 한강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역사상 최고의 명언 중 하나가 이 때 나온 것입니다. 당시 조정은 수군이 흩어졌다 하나 어느 정도 규모가 남아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수가 너무나도 적자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한 듯 합니다. 이게 당연하죠.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하지만 이순신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적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한다는,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반박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 이순신 그 자신 뿐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죽지 않았으니 적이 업신여기지 못 할 것이라는 강력한 자신감을 피력하는데, 이것은 잘난 척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선조나 조선 대신들은 괜히 생각해 준 것일지 몰라도 이들과 만나는 것은 이순신을 짜증나게 하는 짓일 뿐이었죠. 수군 추스릴 시간도 부족한데 이들은 임금의 명이니 하면서 만나야 했습니다. 이순신이 마침내 장흥에 도착한 것은 18일이었습니다. 전날 배설은 약속을 어기고 배를 보내지 않았고, 이 날에도 배멀미를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3.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
마침내 수군의 장수들이 다 모였습니다. 이순신은 임금이 보낸 교서를 꺼내 들죠. 하지만 여기서 배설은 숙배,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책들에서야 이 사건을 단순히 배설의 항명으로만 보지만, 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것을 거부하는 거니까요. 교서는 곧 임금의 말씀, 여기에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임금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설은 조선 수군의 실세였고 큰 처벌은 하지 못 합니다. 경상우수영 군관들을 벌 줄 뿐이었죠.
한편 민정붕은 명의 관리인지 상인인지 모를 위덕의에게 술과 음식을 받아 먹고 판옥선을 빌려줬다는 것으로 곤장 20대를 맞죠. -_-;
이후 배설은 적이 온다는 말만 듣고도 도망가려고 하다가 30일에 병세가 위중해서 요양한다는 핑계를 대고 육지로 가려고 합니다. 이순신도 처리하여 보냈죠.
9월 2일의 일기는 아주 짧습니다.
"맑음. 배설이 도망갔다."
배설이 그냥 도망만 간 무능한 장수라고 알려져 있지만, 김경진님은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십니다. 원균이 충청도로 간 후 경상우수사가 된 배설은 일을 열심히 해서 경상우수영의 배가 25척 이상으로 늘어났고, 경상우수군의 굶주림도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하시네요. 제가 확인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배설이 우수사에서 물러날 때, 그것도 자기의 심복이었던 권준과 교체되는데도 이순신이 매우 아쉬워했다는 구절 뿐이었습니다.
이후 칠천량 해전 과정에서 8척을 깨뜨려 유일한 전공을 올린 것도 배설이었고 적이 야습을 가할 때 김완과 함께 맞서려 한 것도 배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군을 견내량으로 도주시켜 전력을 보존하게 한 것도 배설이었죠.
이전에 썼지만, 견내량을 통과해 도주한 것은 경상우수영의 12척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 배가 12척이었는가도 의문이죠. 권율이 따로 나주목사 이정언에게서 받은 보고에 따르면 탈출한 배는 7척이었습니다. 실제 명량해전 당시 12척 중 전라우수영, 좌수영의 배가 섞여 있었고 배설과 같이 탈출했다는 옥포만호의 배는 포함돼 있지 않았습니다. 즉 그가 실제 탈출한 게 몇 척이었는지는 의문인 거죠. 그렇다면 12척의 배를 끌어 모으고 유지한 것은 배설이 한 것으로 봐도 될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보아 김경진님은 이 때 배설이 보여 준 소극적인 모습은 이미 적에게 한 번 당한 것에서 나온 전쟁공포증과 또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주장하십니다.
왕의 교서에 숙배하지 않은 점, 후에 배설이 도망가자 배설의 고향인 성주를 가지 않고 수군으로 와서 무언가를 의심하는 느낌이라서 이순신이 화를 낸 점, 후에 배설이 "무슨 일을 벌이다" 권율에게 잡혀 사형 당한 점 등을 본 거죠.
난중일기에는 "나도 그 사정을 알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의 계책이 아니므로 몰래 참고 있는데"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배설이 도망가려고 했다는 것에 딸린 문장일 수도 있지만, 따로 보면 뭔가 의미심장하죠. 정작 배설이 도망가려 한다고 욕했던 이순신은 그가 육지로 간다고 하니 바로 허락해 줬고, 도망갔다고 하자 그냥 덤덤하게 도망갔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둘의 갈등은 도망가자 싸우자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일 수도 있다는 거겠죠.
어찌됐든 배설은 도망갔습니다. 그것도 적의 점령지인 전라도와 경상우도를 통해서 집으로 갔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4. 폭풍전야
20일. 포구가 좁아서 창사로 진을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입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음했다고 합니다.
21일. 새벽 2시에 곽란이 일어나서 소주를 마셔서 치료하려고 했다가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거의 죽기 직전에 토하기를 10여 차례 하고 밤새도록 앓았다고 합니다.
22일. 여전히 곽란에 시달려 대변도 볼 수 없었다고 하죠.
23일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배에서 나와서 잤다고 합니다.
24일에는 조금 나아졌는지 어란포 앞바다로 향했습니다. 25일에는 보자기들이 소를 훔쳐 놓고 적이 가까이 왔다고 거짓말을 해서 참수하고 그 목을 효시합니다. 상황이 안정됐는데 배설은 이미 도망가고 있었다고 하네요.
26일 임준영이 와서 적이 이미 이진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합니다. 또한 이 날 김억추가 판옥선 한 척을 이끌고 가세하죠. 조선 최고의 소드마스터(주:검술의달인)가 왔으니 얼마나 힘이 났을까요. -_-;
27일에는 배설을 만나서 따집니다. 배설은 이 때도 두려워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27일에는 배설을 만나서 따집니다. 배설은 이 때도 두려워 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28일에는 적선 8척이 새벽에 야습을 해 옵니다. 적도 이순신이 돌아온 걸 알고 있었고, 소수지만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척의 배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물러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하니, 여러 배들이 뒤쫓아 갈두에 이르자 적선이 멀리 도망하므로 끝까지 쫓지 않았다"
배설 뿐만이 아니었죠. 이미 조선 수군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때 후방에 50척이 더 있었다고 하니 칠천량처럼 조선 수군이 무너지면 바로 공격해 왔겠죠.
29일에는 벽파진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 날 척후를 많이 보냈고, 배설이 육지로 간 것도 이 때입니다.
이렇게 9월이 다가왔습니다.
2일에는 배설이 도망갔고, 3일 밤부터 5일까지 거센 북풍이 불었습니다. 6일에 조금 나아졌다고 하네요.
7일에 군관 임중형이 적선 55척 중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몇 번이고 엄중하게 경계하라고 하죠. 4시경에 적선 12척이 이르러서 추격했다고 합니다. 다시 장수들을 모아서 야습이 있을 것이니 경계하라고 다짐했고, 역시 밤 10시경에 적이 와서 덤볐습니다. 이순신은 직접 앞장서서 적을 맞서 싸웠고, 적은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갔다만 반복하다가 새벽 1시경에 돌아갑니다.
8일에 장수들을 불러모아서 회의를 하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김억추는 일개 만호 수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김응남과 친하다는 이유로 억지로 보냈다고 하죠.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 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보통 조정이라는 말을 쓸 경우 누구를 향해서 말 하는 걸까요.
9일은 중양절로 추석과 비교할 만한 명절이었죠. 이 날 제주도에서 보낸 소 5마리를 병사들에게 먹입니다. 비록 상 중이었다 하나 이것을 잊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날 적선 2척이 아군을 정찰하기에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추적했다고 합니다. 10일에도 적선이 멀리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네요.
11일.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로 눈물을 흘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몹시 언짢아했다."
11일부터 14일까지는 다시 날씨가 나빠집니다.
13일에는 꿈을 꿨는데 임진년에 크게 승전할 때의 꿈과 비슷했다고 하네요.
14일에는 정찰병이 와서 50여 척이 벌써 어란으로 왔다고 합니다. 또 이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중걸의 말이 나왔는데, 왜장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13일에는 꿈을 꿨는데 임진년에 크게 승전할 때의 꿈과 비슷했다고 하네요.
14일에는 정찰병이 와서 50여 척이 벌써 어란으로 왔다고 합니다. 또 이 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김중걸의 말이 나왔는데, 왜장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혹은 쏘아 죽이고 또 배를 불태웠으니 극히 통분할 일이요,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수군을 모조리 죽인 뒤 바로 경강으로 가자고 하더라는 것이다"
일본어를 얼마나 알았는지 몰라도 적이 몰래 의논하는 걸 들었다니 차암 -_-; 아무튼 여기서 "병력을 모아" "수군을 친 후" "서울로 간다"는 계획을 알게 된 거죠. 이 날 피난민들을 급히 뭍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적이 마침내 오고 있었습니다.
5. 必死則生 必生則死. 一夫當逕 足懼千夫
15일 벽파진에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깁니다. 이 날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말 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날의 회의 결과는 간단했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싸운다는 것이었죠.
조선 수군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적의 목표가 확실해진 지금 적을 서해로 들인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이었죠. 지금까지 일본 수군은 칠천량 때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병력으로 야습을 했습니다. 당연히 조선 수군은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순신은 직접 돌격해서 이들을 몰아내었죠. 그렇게 해서 겨우 안정시킨 조선 수군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경우 좋은 전장을 찾기도 힘들었고, 기껏 모은 수군이 다시 흩어질 염려가 있습니다. 김억추는 도움이 전혀 안 되었고, 바로 근처인 무안에 있는 임치첨사 홍견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경기수사는 한강 방어를 위해 동원됐고, 충청 수군 역시 임금을 지키기 위해 오지 않았죠. 그에게 있던 배는 단 열 세척 뿐이었습니다.
첨사는 무관직에서는 수사 바로 밑으로, 수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두 명의 첨사가 각 도의 수군 절반씩을 맡았습니다. 임치첨사의 병력이 칠천량에서 별 손해를 입지 않았을 경우 동원할 수 있는 판옥선은 열 척에 달했죠. 하지만 그는 격군을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 밤, 이순신은 꿈에서 신인을 만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거였죠. 자세한 건 적지 않았죠.
잠시 김경진님의 임진왜란에서 나온 걸 적어 보죠.
"충청수사나 경기수사, 임치첨사 홍견이 판옥선 10여 척 이상을 몰고 올 경우 크게 이긴다. 그러나 그 인간들은 오지 않아. 자네 부하들이 열심히 싸워도 크게 이긴다. 글쎄. 이건 두고 봐.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자넨 혼자 싸워도 지지 않아."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하면 집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자네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거나, 포기하고 자진하거나, 왜놈에게 항복하면 진다."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그래서 자네는 무조건 이긴다."
왜 이런 엄청난 스포일러를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 참 재밌게 만들었네요.
9월 16일. 날 일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맑음. 이른 아침에 별진군이 보고하기를, 적선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들어온다고 했다."
이렇게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말도 안 되고 어이 없는 전투가 시작됩니다. 장소는 명량이었습니다.
명량해전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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