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pCkNVw
순천 신성리 충무사 이순신 영정.
<33>이순신의 리더십 (15) 인격이 리더십이다①
높은 뜻 기린 군·백성 열렬한 서포터스로
2012. 08. 27 00:00 입력 | 2013. 01. 05 08:18 수정
나라·백성 중심의 삶 살려는 마음 사랑·공정성까지 갖춰 ‘효과 두배’
순천 신성리 충무사 이순신 영정.
순천 신성리 충무사 중건기.
순천 신성리 충무사 소개 안내판.
자율적인든 타율적이든 모든 리더십의 바탕에는 리더의 인격이 자리한다. 처벌하더라도 리더의 인격에 기초한 사랑 또는 공정성이 포함돼 있을 때 그 효과가 배가된다. 그런 면에서 인격은 리더십의 중심이요 주체다.
백성·의병·승병들도 따르고 존경
이순신은 1592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 참모들과 인연을 맺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라좌수영의 지휘관, 참모들은 대부분 열렬한 이순신의 지지자가 됐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그의 고결한 인격에 감화됐기 때문이다. 1593년 8월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고부터는 전라우수영, 경상우수영 등 타도의 장수들 가운데도 지지자가 생겨났다. 그뿐만 아니라 통제영 관할의 백성과 의병, 승병들도 이순신을 따르고 존경했다. 그런 면에서 이순신은 나라 걱정, 백성 걱정으로 힘든 전쟁 시기를 보냈지만, 인간적으로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삼국지’를 보면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의형제를 맺었다는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소개된다. 이순신에게는 그런 의형제 같은 부하 장수들이 없었을까. 이순신은 녹도 만호 정운이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자 정운을 녹도에 있는 이대원 사당에 함께 배향해 주기를 요청하는 장계를 조정에 보내는데 여기에 유사한 내용이 확인된다. “여러 장수 중에서도 순천 부사 권준, 방답 첨사 이순신, 광양 현감 어영담, 흥양 현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 등은 달리 믿는 바가 있어서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여 계획을 세웠는데….”(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이 장계를 통해 우리는 이순신에게 의형제 같은 5인의 장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년 제1차 출동을 앞두고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 여부를 놓고 부하 장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의 반응에 대해 일기에 적고 있는데 여기서도 이들의 이름이 일부 거명된다. “진해루(鎭海樓)에 앉아서 방답 첨사 이순신, 흥양 원 배흥립, 녹도 만호 정운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모두 분격하며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것이 과연 의사(義士)들이라고 할 만하다.”(임진년, 5월 1일 일기) 이들은 일본군의 침략에 분개하면서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이순신은 이들을 의사(義士)라고 지칭할 만큼 신뢰했다. 그러나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 중에도 경상도 해역으로 출동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장수가 있었다. “오정 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와 함께 약속하니 모두 즐거이 나갈 뜻을 품는데, 낙안 군수 신호는 회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해서 탄식스러웠다.”(임진년, 5월 2일 일기) 그러나 초기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낙안 군수 신호도 결국은 이순신의 능력과 인품에 감복돼 지지자가 됐다. 을미년(1595년) 신호가 파직되자 이순신은 그를 자신의 조방장으로 삼았다.
권준 등 의형제 같은 5인 장수 둬
의형제와 같았던 5인의 장수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순천 부사 권준은 일본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여수로 달려와 이순신과 함께 대책을 논의한 장수다. 문과 출신이었지만 이순신이 칭찬할 정도로 활 쏘는 실력이 출중했다. 동명이인인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임진년 제1차 출동 때 중위장을 맡았으며 ‘적을 사살하는 데 주력하고 목을 베는 일에 힘쓰지 말라’는 이순신의 지시를 가장 충실히 따른 장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의금부에 하옥됐다가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풀려나던 정유년(1597년) 4월 1일, 술병을 차고 와서 밤새 위로했던 이가 이순신(李純信)이었다. 갑오년(1594년) “수륙의 여러 장수가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갑오년, 9월 3일 일기)는 임금의 질책성 밀지(密旨)를 받고 이순신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밤늦게 방문해 이순신을 위로하고 그 이튿날 이른 아침 또 찾아와 심기를 살피던 이는 흥양 현감 배흥립이었다. 정의감과 용기가 남달라 경상도 해역으로의 출동을 적극 주장하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순신으로부터 최고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췄다고 평가받은 이는 녹도 만호 정운이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지리에 밝아 출동할 때마다 언제나 앞장서 물길을 인도하고 선두에서 용전분투했던 이는 광양 현감 어영담이었다.
탁월한 전문성 갖춘 참모·지휘관 모여
전라좌수영 소속 장수들뿐만 아니라 원균 휘하 경상우수영 소속의 장수들도 이순신의 인격에 감화되어 좋은 감정을 갖게 됐다. 소비포 권관 이영남, 웅천 현감 이운룡 등은 수시로 이순신을 찾아와 활도 쏘고, 군사 일도 의논하고, 식사를 함께 했다. 이영남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가리포 첨사 신분으로 참전해 이순신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이순신이 아들처럼 아끼던 장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순신 주변에는 탁월한 전문성을 지닌 지휘관, 참모들이 모여들었다.
판옥선 건조와 각종 무기 개발에 일가견이 있었던 정걸, 거북선 건조를 책임진 나대용, 화약 제조기술을 소유한 이봉수, 정철 조총을 개발한 정사준, 모병과 군량 조달에 힘쓴 종사관 정경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순신과 함께했다. 나아가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한산도에서뿐만 아니라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했을 때도 순식간에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에 감복한 때문이었다. 또한, 이순신 곁에 있으면 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남해연안을 순시하던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은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조정에 올린다.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며,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었겠습니까. 이순신이 나라를 위해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선조실록, 무술년 12월 7일) 무엇이 무지한 노약자조차도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문하도록 감복시켰을까. 그것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 중심’의 삶을 살고자 했던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격이 리더십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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