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TkkZht
<32>이순신의 리더십 (14) 동고동락으로 감성적 공감을 불러일으켜라
가슴을 나눈 군사, 목숨이 열 개인듯 용맹
2012. 08. 20 00:00 입력 | 2013. 01. 05 08:17 수정
병사들과 함께 뱃전서 활 쏘며 전투 부하들 武科 보게 ‘진중서 시험’ 건의 조선 수군 전투력 갈수록 맹위 떨쳐
목포 고하도 이충무공유적.
고하도 이충무공기념비.
대화나 논리적 설득이 이성적 공감을 통해 마음을 모으는 방법이라면 부하 장병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同苦同]’은 감성적 공감을 유도해 마음을 모으는 방법이다. 이른바 인간은 ‘감성적 존재’라는 데 기초한 리더십이다.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도 내놓는다.
‘사기’ 손무·오기열전에는 오기(吳起) 장군이 종기가 난 부하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 치료했다는 사례가 나온다. 치료받은 그 병사가 그 다음 전투에서 어떻게 싸웠을지는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엄청난 욕구를 지니고 있는 인간에게는 감동을 받으면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는 특성까지도 동시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도 감동
감동은 꼭 거창한 일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이순신은 많은 시간을 부하 지휘관, 참모들과 함께했다.
“식후에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사저 방에서 바둑을 두었다.”(계사년, 3월 12일)
“전라우수사·충청수사·순천부사·낙안군수·방답첨사를 초청해서 함께 햇과일을 먹고 놀다가 저물어서 헤어졌다.”(계사년, 6월 15일)
“이날은 명절이어서 방답첨사·여도만호·녹도만호·남도만호를 불러서 술과 떡을 먹였다.”(병신년, 3월 3일)
“우수사와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계사년, 5월 4일)
“여러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그대로 들어가 앉아 위로하는 술잔을 네 순배 돌렸다…. 밤이 깊도록 뛰놀게 했는데 그것은 억지로 즐기게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의 수고를 풀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병신년, 5월 5일)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기간에는 바둑을 두거나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리고 수시로 군관들과 편을 갈라 활을 쐈으며, 뒤풀이로 술을 마셨다. 고향을 떠나 전쟁터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강조되는 스킨십이나 지휘관·부하 병사들이 함께 몸을 부딪치는 집단 체육 활동, 회식 등은 감성적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리더십 요소다.
부하 장병들 위기 상황서 빛 발해
이순신이 부하 장병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조성된 감성적 공감대는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이순신은) 밤이면 병사들을 쉬게 하고 자신은 반드시 화살을 다듬었다. 또 몸소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총탄이 좌우에 떨어져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장병들이 붙잡고 만류해도 이순신은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너희들만 수고하게 하겠는가?’라고 했다. 승전해 상품을 얻으면 곧 여러 장수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고 하나도 아끼지 않으므로 장병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해 각기 제 힘을 다해 전후 수십 번 싸움에 한 번도 곤욕을 당한 일이 없다.”(宣廟中興志)
조총의 탄환과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조선 수군의 최고 리더인 삼도 수군통제사가 병사들과 함께 나란히 뱃전에 서서 활을 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곁에 있던 장병들은 감격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한 후에 받은 상품을 하나도 아끼지 않고 부하 장병들에게 모두 나눠 주는 이순신의 모습에 또 한 번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이순신의 전승무패 신화 속에는 이처럼 부하 장병들을 감동시킨 동고동락의 리더십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부하 장병들과 나눈 동고동락의 백미는 임진년 2차 출동 기간 중 벌였던 사천해전에서 보인다. 사천해전은 사천의 선창가에 함선을 매어 두고 육지로 피해 올라가 조총을 쏘아대는 일본군과 벌이는 싸움이어서 매우 위험한 해전이었다.
“그날(사천해전이 있던 날) 공(公, 이순신)도 철환을 맞아 왼편 어깨를 뚫고 등에까지 박혀서 피가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공은 그대로 활을 놓지 않고 종일 독전하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철환을 파냈는데 깊이가 두어 치나 됐다. 온 군중(軍衆)이 그제야 알고 모두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공(公)은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했다.”(行錄)
이순신은 이 부상으로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순신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그때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접전할 때 스스로 조심하지 못해 적의 탄환에 맞아 비록 죽을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어깨뼈가 깊이 상한 데다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는 까닭에 상한 구멍이 헐어 물이 늘 흐르기로,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건만 아직 쾌차하지 못해 민망스럽습니다.”(上某人書)
사부들과 나란히 뱃전에 서서 활을 쏘다가 총탄을 맞고 그 상처 때문에 오랜 기간 고초를 당하는 리더 이순신의 모습에 과연 감동하지 않을 장병이 있었을까.
전쟁의 와중인 계사년(1593년) 왕세자였던 광해군이 전주로 내려와 과거 시험을 치렀다. 수군의 무사들도 전주로 달려가 과거를 보고 싶었으나 거리가 멀어 전쟁터를 이탈할 수 없었다. 부하들의 답답한 심정을 꿰뚫었던 이순신은 한산도 진중에서 과거를 볼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한다.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은 … 진중에서 시험을 보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하되, 규정 중에 있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 쏘는 것’은 먼 바다에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라 말을 달릴 만한 땅이 없사오니, ‘편전 쏘는 것’으로써 재능을 시험해 보면 편리할까 생각돼 감히 품고해 조정에서 선처해 주시도록 삼가 갖춰 아뢰옵니다.”(請於陣中試才狀)
이 장계로 인해 이순신을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결국은 받아들여져 진중에 있는 군사가 한산도에서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됐고 많은 군사들이 무과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무과에 합격한 장수들이 이후 해전에서 어떻게 싸웠을지, 처벌을 무릅쓰며 무과 시험 기회를 만들어 준 리더 이순신을 얼마나 존경했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조선 수군의 강력한 전투력의 바탕에 부하 장병들의 감성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순신의 동고동락 리더십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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