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o4EbuN

<34>이순신의 리더십 (16) 인격이 리더십이다 ②
군사모집 공표하자 의병·승병들 ‘구름 떼’
2012. 09. 03   00:00 입력 | 2013. 01. 05   08:20 수정

자신의 이익보다는 항상 의리 선택한 삶  병사·백성 ‘무한감동’

의승 옥형, 자운을 기리는 여수 석천사의 의승당.
 

남해 화방사 전경.
 

남해 화방사 일주문.
 
이순신의 인격에 감동해 뜻을 함께하고자 한 사람은 비단 관직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이 군사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 승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록을 확인해 본다. “승려들이 소문을 듣고 즐거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무려 4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중에서 용기와 지략이 있는 순천에 사는 승려 삼혜(三慧)를 시호별도장, 흥양에 사는 승려 의능(義能)을 유격별도장, 광양에 사는 승려 성휘(成輝)를 우돌격장, 광주에 사는 승려 신해(信海)를 좌돌격장, 곡성에 사는 승려 지원(智元)을 양병용격장으로 모두 정하고, 달리 더 소집할 무렵에 구례에 사는 진사 방처인(房處仁), 광양에 사는 한량 강희열(姜熙悅), 순천에 사는 보인(保人) 성응지(成應祉) 등이….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방처인을 도탄으로, 강희열과 승려 성휘 등을 두치로, 승려 신해를 석주로…. 성응지는 순천 성을 수비하는 일을 맡기고….”(分送義僧把守要害狀) 이처럼 이순신은 자발적으로 모여든 승병과 의병들을 도탄, 두치, 석주, 순천성 등 영·호남 경계에 있는 주요 방어 지역에 배치했다. 일본군들이 지상으로 호남을 침범할 것에 대비하는 조치였다.

의병·승병으로만 구성된 수군 탄생

그런데 평양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에 패퇴하자 조정에서는 도망가는 일본군에 대해 ‘바닷길을 막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이때 이순신은 승병과 의병의 일부를 해전에 투입한다. “많이 도망치는 적을 가로질러 막아 모조리 무찌르자면 병세가 외롭고 약해서는 안 되겠으므로 소속 수군을 많이 정비하고 의병장 성응지와 승장 삼혜, 의능 등에게도 전선을 나눠 줘 수선해서 갈라 타고 함께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하였습니다.”(分送義僧把守要害狀) 바야흐로 의병과 승병으로만 구성된 수군 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실제로 의병과 승병의 활약은 결코 적지 않았다. “자진해서 수군을 모집해 들어온 의병장 순천 교생 성응지와 승장 수인(守仁), 의능 등이 이번 전란에 제 몸의 편안을 생각하지 않고 의기를 발휘해 군병들을 모집해 각각 300명을 거느리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 하였던바,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일 뿐만 아니라 수군의 진중에 2년 동안 스스로 군량을 준비해 이곳저곳에 나눠 주면서 간신히 양식을 이어 대는데, 그 부지런함과 고생스러운 모습은 군관들보다 배나 더했으며, 조금도 수고를 꺼리지 않고 지금까지 부지런할 따름입니다.”(分送義僧把守要害狀) 이순신은 이들의 공로와 애국심에 대해 “일찍이 싸움터에서 적을 무찌를 적에도 뛰어난 공로가 현저하였으며, 그들의 나라를 위한 분발심은 시종 변하지 않으니 더욱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分送義僧把守要害狀)라고 평가한 뒤 “위에 적은 의병장 성응지, 승장 수인과 의능 등을 조정에서 각별히 표창하여 뒷사람들을 격려하여야 하겠습니다.”(分送義僧把守要害狀)라고 그들의 포상을 조정에 적극 건의했다. 

스님들과의 교감·애정 남달라 

특별히 이순신과 스님들 사이의 교감과 애정은 남달랐다. 이순신이 통제사에서 파직되고 옥고를 치르다 방면되어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러 가는 도중인 정유년(1597년) 5월 7일 정혜사의 스님인 덕수(德修)가 와서 이순신에게 짚신 한 켤레를 바쳤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8일에는 승장 수인이 밥 지을 스님 두우(杜宇)를 데리고 왔다는 기록도 일기에 있다. 다시 통제사에 임명된 직후인 정유년 8월 8일에는 혜희(惠熙)라는 스님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그러자 이순신은 즉석에서 의병장의 사령장을 만들어 주고 임무를 부여했다. 이순신과 스님들 사이의 돈독한 신뢰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순신과 함께 전쟁을 치렀던 스님들의 이순신 사랑은 순국 후에도 계속됐다. 

순천 마래산 아래에 있는 충민사(忠愍祠)에는 스님 옥형(玉泂)의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본래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는 배에 타고 함께 전투에 참여한 이로 언제나 공(公)의 곁을 지켰는데 공이 순국한 후에도 충민사 사당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 주변 해상에 변고가 생길 때는 공이 사전에 옥형의 꿈에 나타나 알려주므로 “공(公)의 나라에 대한 충혼이 죽어서도 이와 같도다”라고 하며 80살이 넘어, 죽는 날까지 숭배했다고 한다.(昇平志)

남해 노량의 호충암이라는 암자에서는 화방사의 스님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숙직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승장 유습(裕習)의 꿈에 공이 긴 칼을 집고 서서 꾸짖되 “너는 왜 산을 순시하지 않느냐!”하기에 일어나 산을 수색했더니 과연 어떤 이가 사당 뒤에 암장(暗葬)된 것이 발견돼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보고해 파 옮겼다고 한다.(忠愍祠記)

자운(慈雲)이란 스님은 공의 진중에서 함께 있던 승군이었는데 공의 충의(忠義) 정신을 깊이 사모해 공이 전사한 직후에 쌀 수백 석을 갖고 와서 노량 바다에서 엄청난 규모의 수륙제를 지냈다고 한다.(行錄)

인격에 감동한 구성원들 믿고 따라

그렇다면 이처럼 스님들을 감동시킨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좌우명으로 간주되는 문구를 살펴본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쓰이게 되면 죽기로 일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게 되면 초야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권세 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때의 영화(榮華)를 훔치는 것 같은 것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白沙集) 이순신은 관료 생활을 하는 22년 동안 이 좌우명을 충실히 실천했다. 그 결과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이라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개인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사람답게 사는 의리(義理)를 택하곤 했던 이순신의 실천적 삶은 부하 장병, 의병, 승병, 백성들에게 무한 감동을 줬다. 

리더의 고결한 인격으로부터 비롯된 구성원들의 이성적, 감성적 공감은 리더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사시 구성원들은 리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친다. 이것이 ‘인격이 리더십이다’라고 하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며,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인격 도야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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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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