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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이순신 정론(2) 백의종군·당파(撞破)전술·자살설
功 세우면 관직 복귀 백의종군 인재들 ‘재기’ 기회로
2012. 09. 17   00:00 입력 | 2013. 01. 05   08:22 수정

당파는 총통 쏘아 격파 기술 자살 암시 주장 현실성 부족

이순신 노량해전 전사도.
 

이순신 장군의 일생 기록화 십경도 중의 녹둔도 전투.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백의종군(白衣從軍)이다. ‘흰옷[白衣]’은 계급이나 직책이 없다는 것이고, ‘종군(從軍)’은 군문에 종사한다는 것이니 일견 백의종군은 계급이나 직책 없이 군문에 종사하게 하는 처벌임을 알 수 있다. KBS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순신이 흰옷을 입고 짚단을 나르는 등 일반 병사들과 더불어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백의종군을 묘사했다. 과연 그런가. 

이순신은 두 번의 백의종군 처분을 받는다. 제1차 백의종군은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근무하면서 두만강 하구에 있는 녹둔도(屯島)의 둔전관을 겸할 때 오랑캐의 공격을 받고 피해를 본 사건이 빌미가 됐다. 이순신은 녹둔도의 병력이 오랑캐를 지키기에 역부족임을 알고 수차례 직속 상관인 함경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587년 8월, 오랑캐가 녹둔도를 기습해 1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곧바로 반격을 시도해 오랑캐 다수를 사살하고 또 포로로 잡혀가던 60여 명을 구출했다.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책임을 묻고자 했지만 조정에서는 이순신은 패전한 장수와는 다르다고 해 백의종군 처분을 내렸다.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다가 그 이듬해인 1588년 1월 시전부락 전투에 우화열장(右火烈將)이란 직책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다. 이 공로로 이순신은 백의종군 처분에서 벗어나고 곧이어 훈련원으로 복직한다.

제2차 백의종군은 가등청정을 잡으라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빌미가 됐다. 이순신은 의금부에 투옥돼 한 달여 심문을 받다가 초계에 있는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고 정유년(1597년) 4월 1일 옥에서 나온다. 이날부터 다시 통제사에 임명되기 하루 전인 정유년(1597년) 8월 2일까지가 백의종군 기간이다. 이 기간에 이순신은 어떤 일을 했을까. 일기를 살펴보면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군사 자문 역할을 담당했으며, 도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이순신과 권율 사이를 오가며 가교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같은 해 7월 15일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권율로부터 패전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노량 등 남해 연안을 돌아본다. 그러던 중 8월 3일 진주의 손경례 집에서 통제사 임명 교지를 받고 관직에 복귀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의종군은 무과 과거 급제자의 신분이 유지된 채 군문에 종사하는 처벌로서 이후 어떤 임무를 부여받아 공을 세우면 다시 관직에 나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관직회생제도다. 이순신 또한 두 번의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지만 모두 복직된 것을 보면 백의종군은 인재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착한 처벌로서 오늘날 관료사회에서도 참조할 만한 선진적 측면이 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주요 해전전술은 무엇이었을까. 조선 수군의 주요 해전전술은 총통포격전술이다. 총통포격전술은 천자·지자·현자 등의 총통으로 대장군전, 장군전, 철환 등의 피사체를 쏘아 맞혀 격파하는 전술이다. 이순신의 장계를 보면 당파(撞破)라는 용어가 수없이 나오는데 바로 이 당파가 총통을 쏘아 맞혀 격파하는 총통포격전술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당파전술(撞破戰術)을 소나무로 건조한 견고한 판옥선, 거북선을 적선에 충돌시켜 깨뜨리는 충돌 전술로 설명하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돌격선 용도로 만들어진 거북선도 마찬가지다. 거북선은 총통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적선 가까이 돌격해 총통을 쏘기 위한 근접포격용 돌격선이지 충돌용 돌격선이 아니다. 거북선에 거북 등 모양의 덮개를 씌운 것은 근접했을 때 자칫 일본 수군의 해전전술인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이런 위험으로부터 조선 수군 병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총통포격전술을 구사하는 혁신된 첨단 수군이었다. 조선의 지상군은 준비가 미흡해 조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해전에서는 천자·지자·현자총통 같은 대형 화약 무기로 무장한 조선 수군에게 오히려 일본 수군이 맥을 추지 못했다. 새롭게 조명돼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이순신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이른바 ‘자살설’은 임진왜란 종료 직후부터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단골메뉴다. 자살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자료는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다. 이 책은 의병장 김덕령(德齡)의 전기물인데, 여기서 이민서는 이순신이 “전투가 벌어지자 투구를 벗고 스스로 탄환을 맞고 죽었다(方戰免?自中丸以死)”고 했다. 그는 이순신과 함께 싸우지도 않았고 그와 동시대 사람도 아닌데 무얼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여러 자료를 분석해 볼 때 이순신이 투구나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면에서 이민서를 포함해 이순신이 자살했다고 암시하거나 주장하는 자살설은 모두 추측성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런 자살설의 배경에는 ‘못난 임금’ 선조와 당쟁을 일삼았던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짙게 깔려 있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간 ‘못난 임금’ 선조나 그를 부추겨 권력 쟁탈을 일삼던 무리가 백성들의 희망인 이순신을 결코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순신 스스로도 역모에 희생된 의병장 김덕령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숙종 때 안동부사를 지낸 맹주서(孟?瑞)가 “본시부터 그 한 죽음 뜻이 있거니, 뒷사람들이 그 까닭을 어찌 알리오”라고 한 것처럼 이순신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저런 추측은 위대한 리더 이순신을 폄하는 행위일 뿐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자살설이며, 누구를 위한 자살설인가.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전사(戰死)는 위대한 리더 이순신의 일생을 그리는 데 있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마지막 전투에서의 극적인 죽음으로 이순신은 우리 가슴 속에 ‘민족의 태양’, ‘한국적 리더의 표상’으로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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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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