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m1NhL
<35>이순신 정론(1) 관점의 전환, 명량해전 철쇄 문제
‘전황<戰況> 유리하게 조성’ 필승 해법의 달인
2012. 09. 10 00:00 입력 | 2013. 01. 05 08:21 수정
좁은 물목 택해 수적 열세 극복 명량해전 철쇄 설치는 사실무근
명량해전 이후 조선 수군이 후퇴했던 고군산도 인근 전경.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순신에 대해 강의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순신에 대한 인식 수준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몇 년 전에 방영된 KBS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이순신의 위대성을 널리 알리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명량해전 철쇄 설치 문제,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시각, 백의종군이나 면사첩(免死帖)에 대한 이해, 원균과의 교우 관계 등 오류 부분도 적지 않았다. 작가의 역사 인식 수준이나 상상력이 가미될 수밖에 없는 소설이 지니는 한계다.
또 한편 이순신은 우리 국민들에게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초인적인 역량을 지닌 인물로 각인돼 있다. 50여 척을 갖고 70여 척의 일본 함대와 싸워 이긴 한산해전, 13척으로 133척이나 되는 일본 함대와 맞서 승리한 명량해전의 결과는 어찌 보면 이순신을 일당백하는 무협지의 주인공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이순신을 조망하는 이런 관점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순신은 무협지의 주인공도 아니며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을 만나 언제나 승리하는 그런 초인(超人)도 아니다. 이제 이순신 그리고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 보자.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어떻게 일본 수군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물론 위대한 리더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해전에서 승리하려면 리더의 개인적인 역량도 중요하지만, 함선과 무기체계 같은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질적 전투력 면에서 일본 수군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은 당시로서는 첨단 해전전술인 총통포격전술을 채택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 수군은 여전히 재래식 해전전술인 등선백병전술(登船白兵戰術)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임진왜란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이 보인 맹활약은 첨단 조선 수군과 위대한 리더 이순신의 합작품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특히 고려 말 이래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만들어진 대형 화약무기류나 임진왜란 발발 71년 전부터 건조 논의가 시작돼 만들어진 판옥선 같은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는 해전의 승패 원인을 규명하는 데 있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요소다.
관점의 전환은 이순신을 훌륭한 리더, 위대한 리더라고 추앙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순신이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1 : 10, 1 : 20의 열세 상황에서 싸워 이겼기 때문에 위대한 리더라고 설명하곤 했는데 이 또한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전에서 수적 측면에서도 결코 열세가 아니었다. 열세의 해전으로 소개해 온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일본 함선 73척과 싸운 조선의 함선은 거북선 3척, 판옥선 55척, 지원선 50척 모두 108척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은 언제나 열세한 상황에서 우세한 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유능한 리더요 탁월한 리더라는 관점보다는 오히려 어떤 상황에서도 인위적으로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 분산된 열세의 적과 싸워 이겼기 때문에 유능한 리더요 탁월한 리더라는 관점이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이순신 정론 확립과 관련해 두 번째로 제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량해전 철쇄 설치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명량해전 철쇄 설치설은 설화성 이야기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명량해전에 관한 가장 자세한 자료는 이순신이 직접 기록한 정유년(1597년) 9월 16일 일기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이전, 당일, 이후의 행적에 대해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 그런데 일기에는 철쇄를 설치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해전의 전 과정을 분석해 봐도 철쇄를 걸어 승리할 수 있는 국면이 나오지 않는다.
이순신의 일기에만 없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이 기록한 자료에도 없다.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行錄)’에도 없고, 서애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도 없으며, 이순신 사후 곧바로 제작된 이항복의 충민사(忠愍祠) 비문에도 없다. 철쇄와 관련된 기록을 담고 있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해남현지’ 등은 임진왜란 종료 이후 150년이 지난 시점의 기록들이다. 명량해전 당일 힘이 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철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이나 ‘현무공실기(顯武公實記)’는 각각 1799년과 1900년대 초기에 만들어진 자료들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억추는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의 일기에 김억추는 중과부적의 해전이라 겁을 먹고 뒤로 처져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김억추가 수사(水師) 재목이 아니라고 탄식하는 내용도 일기에 보인다.
명량해전 철쇄 설치설은 명량해전 당일 일본 수군 함대가 거의 모두 철쇄에 걸려 넘어져 전멸했다는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 이후 전열을 수습한 일본 수군의 주력 함대는 9월 20일께 전라우수영을 접수한 것을 시작으로 무안·법성포까지 진출해 대대적인 살인·방화·약탈·포로잡이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강항(姜沆)과 정희득(鄭希得)이 영광 근처 해상에서 포로로 잡히는데 이들이 남긴 ‘간양록(看羊錄)’과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은 명량해전 이후의 일본 수군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명량해전에서 31척을 격파한 이순신의 조선 함대는 고군산도까지 작전상 후퇴해 함대의 보존에 들어간다. 그리고 명량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과 통제사 이순신의 건재를 확인한 일본 수군은 결국 서해 진출을 포기하고 순천 이동(以東)으로 철수했다. 그렇다면 명량해전 승리요인으로 줄곧 철쇄가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천자·지자총통 등 첨단 무기체계로 무장한 판옥선의 막강한 전투력에 대한 이해의 부재, 명량의 좁은 물목을 해전 장소로 택해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한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에 대한 간과, 부하 장병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만든 이순신의 탁월한 지도력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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