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svHJ7

<17>이순신의 해전 전술 (1):조선 수군은 총통포격전술을 구사하는 첨단 수군
“당파전술은 충돌전술이 아닌 총통포격전술”
2012. 04. 30   00:00 입력 | 2013. 01. 05   07:55 수정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징하는 것은 조총(鳥銃)이었다. 우리에게 임진왜란은 신식 화약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침략자 일본군에게 재래식 무기인 활과 창으로 대항한 조선군이 곤욕을 치른 전쟁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지상군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수군은 적용되지 않는다.

거북선은 근접 총통포격용 돌격선  대장군전·장군전·철환은 ‘피사체’



조선 수군의 총통포격 장면.


경남에서 복원한 판옥선.

 

고려 수군을 계승한 조선 수군은 잦은 왜구의 침략에 맞서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1500년대만 하더라도 1510년 삼포왜변, 1555년 을묘왜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에는 정해왜변이 있었다.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이전에 어떤 해전전술을 사용했을까. 을묘왜변이 있었던 명종 10년(1555년) 7월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해전전술에 관한 자료가 있다. 

“전라도 관찰사 김주가 장계하기를 <왜변이 창궐하여 화(禍)가 극심합니다. 적선을 깨뜨리는 기구로는 대장군전(大將軍箭)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총통을 주조할 놋쇠를 준비할 방법이 없어서 이준경이 여러 사찰의 종을 거두어 총통을 주조하려 하였습니다>….” 이 장계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쯤에 조선 수군은 이미 왜구와의 해전에서 총통포격전술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전에서 대장군전의 효용성이 입증됨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총통 주조 사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사용된 천자·지자 등의 대형 총통류는 대개 명종 10년에서 2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한다. 그중에 눈에 띄는 것이 거북선 건조다. 총통포격전술을 위주로 하는 조선의 주력 전투함 판옥선이 있음에도 이순신은 무엇 때문에 거북선을 만들었을까. 그것은 판옥선의 총통포격 명중률이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판옥선에서 쏘는 천자·지자·현자총통의 사정거리가 대략 1000미터에 달하지만, 그 정도의 거리에서 20~30미터 정도의 일본 함선을 명중시킨다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명중률을 높이려면 가까이 근접해서 포격전을 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본 수군의 등선백병전(登船白兵戰)에 당할 위험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가까이 접근해서 포격전을 벌여 총통의 명중률도 높이고, 일본 수군의 등선백병전으로부터도 조선의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창제한 것이 돌격선 용도의 거북선이었다. 배 위에 거북 등 모양의 덮개를 씌우고, 덮개의 판자 위에 칼과 송곳을 꼽은 것은 근접했을 때 전개될 수 있는 일본 수군의 등선백병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북선은 근접 총통포격용 돌격선이었던 것이다.

해전이 벌어지면 거북선은 가장 먼저 선두에서 적의 지휘선을 향해 돌격한다. 10~20미터까지 적의 지휘선에 접근한 거북선은 선수에 있는 용의 입에 설치된 현자총통으로 지휘관이 있는 누각을 공격한다. 그리고 선수를 돌려 현 측에 배치된 6문의 총통을 발사해 일시에 적의 지휘선을 격파한다. 최근접 거리에서 총통을 발사했으니 명중률이 높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상부 구조물이 격파돼 숨을 곳이 없는 일본 병사들이 우왕좌왕할 때, 뒤따르던 판옥선에서 일제히 활을 사용해 지휘관을 비롯한 일본 병사들을 일거에 사살한다. 개전 초기에 지휘선과 지휘관을 잃은 일본 수군은 지휘체계가 마비되고 결국 도망가기 바쁜 상황이 되며, 이때 판옥선이 일제히 전진해 총통포격에 의한 격파, 활에 의한 사살, 화공(火攻)에 의한 분멸(焚滅)에 돌입한다. 이렇게 볼 때 거북선이 동원된 해전에서의 조선 수군의 해전 전술은 1단계로 거북선 돌격에 의한 지휘선의 무력화, 2단계는 판옥선의 총통포격에 의한 격파, 3단계 활에 의한 사살, 4단계 화공(火攻)에 의한 분멸로 요약할 수 있다. 

조선 수군의 해전전술을 이야기할 때 범하는 오류 중의 대표적인 사례가 ‘당파전술(撞破戰術)’이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이 ‘당파전술’을 배를 부딪쳐 깨뜨리는 ‘충돌전술(Ramming Tactics)’로 이해했다. 

다음은 옥포해전 뒤 이순신이 조정에 보낸 장계 내용인데 거기서 쓰인 당파(撞破)의 의미를 확인해 본다. “좌부장 낙안 군수 신호는 왜대선 1척을 당파(撞破)하고, 우부장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대선 1척을 당파하고…. 합해서 왜선 26척을 모두 <총통으로 쏘아 맞혀 당파하고, 불태우니(銃筒放中撞破焚滅)> 넓은 바다에는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산으로 올라간 적도들은 숲 속으로 숨어 엎드려 기운이 꺾이지 않은 놈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총통으로 쏘아 맞혀 당파하고, 불태우니>라고 한 대목이다. 당파(撞破)가 배가 부딪치는 충돌의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당파전술은 충돌전술이 아니라 총통에서 대장군전·장군전·철환 등의 피사체를 쏘아 격파하는 총통포격전술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당파전술이라 불리는 충돌전술을 구사했다는 주장의 배경은 두꺼운 소나무로 건조된 조선의 거북선이나 판옥선이 삼나무로 건조된 일본의 아다케부네[안택선]나 세키부네[관선]보다 견고하고 튼튼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록에도 “조선 사람의 수전이 육전과는 크게 다르고, 배가 또 크고 빠를 뿐만 아니라 누각과 뱃전까지도 든든하고 두꺼워 총탄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 배가 부딪치면 모두 부서진다”고 했으니 조선의 함선이 일본의 함선에 비해 견고하고 튼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순신이 장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당파(撞破)는, ‘쳐부수다’ ‘두드려 깨다’ ‘격파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그리고 ‘쳐부수고’ ‘두드려 깨뜨리고’ ‘격파’하는 주체는 함선 자체가 아니라 천자, 지자, 현자 총통 등에서 발사한 대장군전·장군전·철환과 같은 피사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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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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