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rqt6B

<15>이순신의 수군 전략(2)수륙병진(水陸竝進) 후 부산 앞바다를 가로막아야 합니다
“수륙 합공으로 웅천·가덕도 적 섬멸이 먼저”
2012. 04. 16   00:00 입력 | 2013. 01. 05   07:53 수정

‘日軍 퇴로차단’ 조정 지시 따르지 않자 충무공 파직  조선수군 칠천량서 궤멸…전략선택의 중요성 일깨워 

칠천량 해전 설명비.
 

조선수군이 패배한 칠천량 전경.



웅천왜성.

임진왜란 전 기간 중 이순신이 일본군의 침략 거점인 부산포를 마음 놓고 공격한 것은 임진년(1592년) 4차 출동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시점부터 그 다음 해인 계사년(1593년) 6월 이전까지 거제도부터 부산포에 이르는 남해연안의 해로 주변에는 일본군의 병력이 그다지 많이 배치돼 있지 않았다. 또한 한산해전의 패배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과의 해전을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까지 진출했던 일본군은 평양성 전투의 패배와 조선 수군의 ‘남해 해로차단전략’으로 보급로가 원천 봉쇄되자 계사년 4월 중순 무렵부터 남해연안으로 전면 철수하게 된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후퇴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일본군 퇴로 차단전략’이다. 다음은 이순신이 계사년 1월에 받은 임금의 지시내용이다. “이번에 명나라 군사들이 이미 평양을 수복하고 이긴 기세로 휘몰아 가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흉적들이 서로 뒤이어 도망가고 한성의 적들도 반드시 도망쳐 돌아갈 것이니 그대는 수군들을 모두 거느리고 합세해 쳐 무찔러서 한 척의 배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이 명령에 따라 이순신은 계사년 2월 경상우수영, 전라우수영 함대와 함께 출동해 웅천에 이르렀는데, 웅천의 포구에는 수많은 일본군이 포구 깊숙이 배를 감추고 포진해 있었다. 웅천은 부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물목이었다. 만약 웅천의 일본군을 섬멸하지 않고 부산포로 진격했다가는 자칫 조선 수군이 퇴로를 차단당하고 앞뒤로 포위당할 수 있는 위험한 형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웅천의 적을 토벌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은 계사년 2월부터 약 1개월 동안 칠천량과 가덕도 앞바다를 왕래하면서 웅천의 적을 공략했다. 그러나 조선 수군의 위용에 겁을 먹은 일본군은 포구 밖 넓은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방책은 육지 쪽에서도 동시에 공격해 일본군을 바다로 내몬 후 해전을 통해 섬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급히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냈다. 장계를 확인해 본다. “이 긴요한 목(웅천)을 지키는 적을 섬멸하고 그다음에 양산과 김해의 길을 막아서 우리 뒤를 둘러쌀 염려가 없게 한 연후에 차츰 부산으로 진격해 도망치는 적을 막고 섬멸해야 할 것이므로 수륙으로 합공하려고 ‘급히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병마를 거느리고 곧장 웅천을 공격하도록’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재촉하였습니다.” 이른바 ‘수륙병진(水陸竝進) 후 퇴로차단전략’이다. 부산으로 가는 물목인 웅천을 지키는 일본군을 수군과 지상군이 합세해 격파한 뒤에 비로소 부산으로 가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전략이다. 

이순신은 먼저 수군 단독으로 웅천의 적을 계사년 2월 12일, 18일, 20일 세 차례 공격했다. 많은 전과가 있었지만, 포구 깊숙이 공격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모조리 섬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순신은 재차 경상우도 순찰사에게 지상군의 투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순찰사의 답변은 ‘곽재우를 시켜 창원의 적을 무찌른 다음에 웅천으로 진격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순신은 2월 22일 날랜 병사를 선발, 10여 척의 함선에 태우고 수군 단독으로 안골포와 제포에 상륙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치명타를 입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조선 수군은 2월 28일과 3월 6일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을 포함해 총 7차례의 해전을 끝으로 1개월에 걸친 웅천 공략작전을 종료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한성을 포기하고 남하하는 같은 해(1593년) 6월께부터는 상황이 바뀌었다. 남해 연안으로 몰려든 일본군들이 부산포에서부터 거제도 동북쪽의 송진포, 칠천량까지 진출해 왜성을 쌓고 웅거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웅천을 지나 부산으로 나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이순신은 조정에서 지시한 ‘일본군 퇴로차단전략’을 포기하고 한산도에서 ‘남해 해로차단전략’을 수행했으며, 이에 기초한 해상작전은 통제사에서 파직되는 정유년(1597년) 2월까지 지속된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지속됐기 때문에 병신년(1596년) 8월까지는 전쟁도 소강상태가 됐다. 

병신년 9월, 4년여에 걸친 강화 협상이 결렬됐으며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재침해 올 것이라는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이제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재침해 올 일본군의 부산 상륙을 저지할 것인가가 지상과제가 됐다. 이와 연계해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재침을 바다에서 격퇴하기 위해서는 한산도보다 거제도를 점령해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는 건의와 함께 원균을 경상도 통제사로 삼자는 윤근수·김응함 등의 주장도 제기됐다. 부산 앞바다까지 나아가려면 웅천·가덕도 등에 포진해 있는 적들을 수륙병진(水陸竝進)으로 섬멸한 뒤라야 가능하다고 신중론을 펴 온 이순신의 입지가 점차 좁아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유년(1597년) 1월 22일, 조정에 가토 기요마사가 150여 척을 이끌고 서생포에 상륙했다는 장계가 경상도위무사(慶尙道慰撫使) 황신(黃愼)으로부터 올라왔다. 조정에서는 이미 비밀리에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를 이순신에게 주어 요격(邀擊)하게 했지만, 거짓 정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따르지 않은 터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선조는 정유년 1월 27일 어전회의에서 “지금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이순신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2월 초 이순신은 결국 통제사에서 파직된다. 새로 통제사에 임명된 원균 또한 이순신과 똑같이 수륙병진 후에야 부산 앞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조정과 도원수 권율의 강압적 지시에 굴복해 웅천·가덕도 등의 일본군을 그대로 둔 채 부산 앞바다로 나아갔다. 결과는 칠천량에서의 조선 수군 궤멸이었다. 전략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관련글
임진왜란 군사 목록  http://tadream.tistory.com/11518
  



Posted by civ2
,